[박사팬텀] Illogical

BL 드림

희미한 햇살이 팬텀의 머리맡을 비추고 있었다. 블라인드 틈새로 고개를 내밀고 여전히 누워있는 게으름뱅이를 조롱했다.

팬텀은 쏘아붙이는 듯한 빛무리를 짜증스레 휘휘 젓다가 얼굴을 가렸다. 아니 중력에 못 이겨 떨어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크리스틴이 침대 위로 뛰어올라 팬텀의 냄새를 맡았다. 이상 증후를 느낀 건지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선실의 주인은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으니.

"괜찮다, 크리스틴. 조금 몸이 나른할 뿐이야."

목도 평소보다 따갑고 입술도 거슬거슬 일었다. 광석병 증세와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의학적인 소견에 팬텀은 자세하지 않았다.

"우선, 일어나자. 일어나서…."

크리스틴이 불만스럽게 울었다. 머리조차 쓰다듬어주지 못하면서 어딜 가느냐고 묻는 듯했다. 팬텀은 힘없이 미소 짓곤 검은 고양이의 귀 뒤를 긁어주었다.

오늘 박사의 어시스턴트 담당 오퍼레이터는 팬텀이었다. 다른 오퍼레이터가 교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불규칙한 박사의 생활에 맞추느라 몸이 축나기도 하고 개인 사정이 있어서 바뀌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팬텀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이 알고 싶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박사의 옆을 노리는 사람도 많거니와 자주 오지 않을 기회였다. 듣자하니 어스턴트 일이란 게 서류 정리나, 휴식 권유나 등 어려운 판단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

크리스탄은 더이상 팬텀을 말리진 않았다. 대신 위태로운 팬텀의 발걸음을 지지하듯 가볍게 치대며 옆을 걸었다.

오늘따라 멀게 느껴지는 복도였다.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 시간은 가까스로 맞췄다. 방금까지 박사와 의견을 조율하던 오퍼레이터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급히 인사하곤 자리를 떠났다. 박사가 기지개를 켜는 동시에 팬텀은 연기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 누구 있어?"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집무실의 공기가 어딘가 달라졌다. 팬텀은 박사의 의자 뒤에서 대답했다.

"찾아다니지 마라. 난 여기에 있다."

"아, 네가 팬텀이군. 입사 이후 처음 보는 건가?"

팬텀의 대답이 무엇이 되었던 박사는 다시 서류에 고개를 박았다. 컴컴한 페이스가드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팬텀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 아가씨는 미스 크리스틴.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 사라질지는 나도 모른다."

책상 위에 올라온 고양이를 바라보는 박사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입사 첫날에 둘은 만난 적이 없었다. 크리스틴의 자유로운 영혼을 팬텀이라고 말릴 수 없었다.

"아하. 오늘 어시스턴트는 둘이군."

박사는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다지 내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사의 무뚝뚝한 태도에 팬텀은 안절부절못했다. 오퍼레이터들과는 각별하게 지낸다고 들었다. 취미 모임에도 기꺼이 어울려주고, 개개인의 공부나 실험을 도와주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도 들었는데…. 팬텀이 보기엔 오늘의 어시스턴트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보였다. 오히려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박사, 뭔가 시킬 일이 있다면…."

"필요없어."

"…."

"일단, 저기 앉아있어. 내가 부를 때까지."

박사는 집무실 가운데를 턱짓했다. 종종 급한 회의를 하는 용도의 긴 소파와 소파용 낮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거의 짐 덩이 취급이나 마찬가지였다. 팬텀은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아직 박사에게 어떤 능력도 증명하지 못했다. 팬텀은 더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아팠다. 불편한 듯보이는 박사의 태도 탓인지, 자신의 몸 상태 탓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박사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박사는 자신이 영 마음에 드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엇이 탐탁찮은 걸까. 물론 암살자라는 직업이 썩 미덥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불분명한 과거도 한몫했겠지. 팬텀이 우울해하자, 크리스틴이 무릎 위에 올라왔다. 방석처럼 깔아뭉개더니 내려가는 기색이 없었다. 팬텀은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에 점점 힘이 빠졌다.

 


 

박사는 자신의 손등에 턱을 괸 채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병의 냄새가 났다. 전술 지휘관으로서 전투원들의 사기 파악은 전장에 나가기 전 반드시 확인할 요소였다.

겉보기에 오퍼레이터 팬텀은 평소와 거의 다를 바 없이 행동했지만, 공기의 흐름이 다를 정도로 ‘느려졌고’, 병색이 완연한 환자처럼 숨결이 흐트러져 있었다.

박사가 그냥 지나치지 못한 건 팬텀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팬텀은 광석병 때문에 상태가 썩 나빴지만,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걸 아직도 생각하는 나도 나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로 계속 팬텀을 보고 싶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서류 바깥의 맥락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퍼레이터들의 일과를 조정해 겨우 어시스턴트로 임명했는데, 어째 팬텀의 컨디션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팬텀 본인은 개의치 않은 것 같지만, 너무 눈길을 끌고 있었다. 좀 전부터 읽고 있던 보고서의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다. 결국 박사는 팬텀을 소파에서 쉬게 하고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진단은 박사의 주력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인 진찰은 가능했다.

힘없이 흔들거리는 머리,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홍조 어린 뺨, 빠르게 들썩이는 납작한 가슴…. 본인 건강은 당사자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왜 억지로 나왔는지 박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리를 분석하는 것도 잠시, 팬텀이 크게 기울어지자, 박사는 소파로 몸을 던졌다. 원래부터 그럴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처럼 날쌔게 떨어지는 머리를 받쳐 올렸다. 무언가를 따지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천 너머로 전해지는 열이 무척이나 높았다. 박사가 장갑을 벗자 팬텀은 손바닥에 얼굴을 문질렀다. 피부에 닿는 비교적 서늘한 온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박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일어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할 것인가.

좀 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 받은 고양이는 석상처럼 굳은 박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인간치고 제법 기민하고 영특했다. 또, 팬텀을 해칠 만한 인물 같진 않았다. 칭찬의 의미로 냐- 하고 짧게 울었다. 지금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봐주겠다는 뜻도 있었다.

박사는 급히 외투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긴급 이성 회복제, 아니고. 합성옥, 이것도 아니고. 헤드헌팅 자격증, 이것도 아니다. 한참을 까고 엎어서 해열제를 찾아냈다. 함선 내에선 보통 어린 오퍼레이터들이 종종 열을 내는 경우에 써먹곤 했던 것이다.

물성이 무른 게 체내에 잘 흡수되었다. 알약이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먹이기가 또 귀찮았다. 박사는 해열제를 입안에 머금고 팬텀의 고개를 고쳤다. 살며시 벌어지는 입속에 여린 속살이 보였다. 육체의 주인이 부재중이라 외부의 침입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이 참 무섭다. 막상 몸 안에 들어오니 타인의 신체 부위가 자기 것인 양 감싸들던 것이었다. 팬텀의 혀는 몰캉하고 체온에 비할 바 없이 뜨거웠다. 두 사람이 서로 빨아대는 소리가 고막마저 질척하게 적시는 듯했다. 스스로를 위해 변명을 하나 하자면, 박사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건 아니었다. 팬텀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받아먹었다. 정신은 잃었어도 쓰기는 한가 보지? 박사는 속으로 웃었다. 훌륭한 약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팬텀은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터였다. 세계 일류 의료 기업에서 만드는 약이니까, 걱정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박사는 어시스턴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자세를 고쳤다.

자연법칙보다 부드러운 힘이 다가왔다. 이게 올바른 판단인지 박사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팬텀과 보낼 예정이었으니 어떻게 써먹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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