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To Movie and Beyond
BL 드림
니엔의 대대적인 영화 제작에 박사도 예산을 지원했다. "박사, 로도스 아일랜드의 자원은 네 사유 재산이 아니다." 하고 켈시는 일축했다. 몇 마디 핀잔이 따라오긴 했지만, 아예 막지는 않았다. 적어도 금적적인 부분은 박사가 불린 주머니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당시 박사는 리와 총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웬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박사는 흥겨웠고 영화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있자니, 꽤 괜찮은 투자 같기도 했다. 게다가 니엔도 장생하다 보니 자본이 부족한 건 아니었고, 켈시 또한 인적 자원의 사적 남용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대개의 오퍼레이터는 박사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그게 바로 문제라는 거지만.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원이 한두 명은 아니었지만, 배우로도 오퍼레이터들이 동원되었다. 암살자이자 배우였던 팬텀도 물론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잘된 거지, 뭐. 이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고.'
차마 사회성이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성격에, 사람들을 피하기까지 하는 팬텀이다. 영화 출연은 동료들과 친해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인데….
"하하하…."
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대본이 나온 뒤부터 얼굴 한 번 보기가 참 힘들었다. 주연 중 하나라곤 하지만 이렇게 바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맥락도 없이 혼자 빈 사무실에서 팬텀을 떠올리는 것도 우스웠다. 많고 많은 오퍼레이터들 중에서 하필이면 팬텀이다. 이래서야 특별 취급 하는 것 같지 않나. 박사가 애써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찰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박사."
"아니…. 어?"
필라인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팬텀이 고개를 갸웃하며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틴도 책상 위에 폴짝 올라섰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오늘따라 팬텀의 인상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얼굴이야 잘생겼지만, 팬텀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가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이상한가?"
그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겠다. 팬텀의 옷차림이 달랐다. 평소에 입던 거무칙칙한 망토는 어디 가고 말끔한 정장이었다. 그렇군.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삼 깨달으니 조금 다르게 보였는데, 당사자인 팬텀은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리면서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전혀? 잘 어울리는데? 영화에서 입는 옷이야?"
"…그런가. 다행이군. 그래.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네 마음에 안 들까 봐 걱정했다."
"글쎄, 높게 평가해주는 건 고마운데, 난 심미안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네가 가끔 오퍼레이터들의 옷을 골라주는 걸 봤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테라에 존재하는 몇몇 브랜드들과 모델 계약을 맺으며 부가 수입을 올리고 있긴 했다. 박사는 책임자로서 현장에 참석했을 뿐이다. 맹세컨대, 팬텀이 퍽 쓸쓸하게 속눈썹을 내리까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일이고…."
"일이 아니면 하지 않을 건가? 박사."
"내가 필요하면 당연히 발 벗고 나설 거야, 팬텀. 뭐 도와줄 일 있어?"
정곡이었는지 팬텀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여튼, 예술가들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일이 잘 없다. 박사는 빙산의 일각을 더듬듯이 팬텀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의상 문제는 아니다. 방금 네가 확인했으니. 최근 대본을 받았는데."
"받았는데?"
"연습할 상대가 필요해서. 아가씨에게 부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크리스틴이 맞장구치듯 냐아 하고 울었다.
"그래, 뭔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원래도 팬텀과의 대화의 흐름이 빠른 편은 아니라곤 하지만, 상대의 망설이는 기색이 후두를 붙잡았다.
"…연습을. 키스를, 도와줄 수 있겠나?"
"뭐라고?"
크리스틴이 얼간이를 보듯 박사를 노려보았다. 팬텀은 쭈뼛거리며 극단에선 그럴싸한 동작만 보여주고 직접 한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설명은 아무래도 좋았다. 박사는 잠시 굳어졌다. 키스란 게 연습이 필요한 일인가? 그냥 두 사람의 입술만 문대면 되는 일이 아닌가?
"박사?"
목소리가 한 음정 낮다. 팬텀이 불안한 눈빛으로 박사의 기색을 살폈다. 연습 그 자체를 두면 눈치볼 만큼 별 게 아니다. 행위를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 반복하는 동작이다. 연기도 그렇고, 입맞춤도 똑같다. 몸으로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입술은 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난 어떻지? 난….
"괜찮아."
금빛 눈동자에 기대감이 차오른다. 어떤 열망이었다. 흥미나 호기심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감정. 다가오고 있었다. 팬텀으로부터 박사에게로, 박사에게서 다시 팬텀을 향해서.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점점 가까워지자, 박사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도와줄게, 팬텀."
충동인지, 이성의 비약인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팬텀은 친구가 없다. 연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어느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누가 박사에게 손을 뻗었는가.
"어떻게 하면 돼?"
박사는 빈손으로 찾아온 팬텀을 바라보았다. 욕망은 훌륭한 선생이리라. 그의 대답이 곧 자신의 대답이었다. 우리는 아마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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