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하야시야마 헤비코에게 크리스마스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산타의 존재를 인지한 건 사춘기가 이미 다 지났을 때였고, 애시당초 한겨울의 새벽에 늙은 노인이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간다는 이야기를 자라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보통 그에게 있어서 새벽에 찾아오는 늙은 노인이란 마을 공동체에 일이 생겨서 급히 전하러 찾아온 늙은이거나, 자신의 꿈자리가 사나웠다며 공포에 질려 찾아온 장로였거나... 하나같이 어린 아이를 위하는 짓이라고는 하지 않는 인간들 뿐이었으니.
그러니 또래와 겨우겨우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들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받았다던가, 산타를 믿느냐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이번 크리스마스에 만날 상대가 있냐는 질문따위는 하야시야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이야기였다. 다만 종종 하얀 무명 타비를 머리맡에 두거나 눈이 소복이 쌓인 뒷마당의 소나무에 조잡한 오너먼트를 올리는 것이 그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타비는 이런 걸 머리맡에 두느냐며 치워졌고 대부분의 장식품은 누가 쓰레기를 나무에 올려두냐며 버려졌지만. 어쨌든 그게 하야시야마의 크리스마스였다.
그러니 그가 처음으로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부모도 아니고 산타도 아닌 하야시야마 헤비코보다 한참은 어린 샤나 레가토 스위트하트가 준비한, 그의 나이 무려 30을 넘어가던 겨울에 준비해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샤나는 12월이 오기도 전부터 지독하게 물었다.
"겨울인데 손이 시리거나 목도리는 필요하지 않아요?"
"가게에 난로도 하나 없던데 작은 난로라도 두는 게 어때요?"
"딱히 물질적인 게 아니라면 가고 싶은 곳이라던가... 연말이 바쁜 건 사실이라지만 하루정도 시간 내는 건 일도 아닌걸요."
보통 하야시야마의 대답은 일관적이었다. 괜찮아, 그다지 생각 없어, 없어도 잘 지냈는걸, 아니면 당장은 필요 없어.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이 나이 많은 풋내기 남자의 대답을 유추할 수 있을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샤나는 겨우 말했다. 그야 곧 있으면 당신 생일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야시야마 헤비코의 생일은 12월 초였으니 11월부터 꼼꼼하게 물어보고 따져서 가장 좋은 걸 품에 안겨주고 싶은 샤나의 다정한 생각이 와닿았다. 다만 하야시야마가 간과한 점이라면 샤나는 애시당초 연인을 위한 생일선물은 준비를 끝마친지 오래이며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크리스마스를 위한 이야기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작년에는 주중이라 시간도 빼지 못했잖아요. 기껏 예약한 레스토랑에 발도 들이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데요. 올해는 주말이니 정말 다행이지 않아요?"
맞아. 그래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촬영은 분명 8시면 끝나고도 남을 정도로 간결하다고 했는데 돌아오지를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2인 코스를 예약한 레스토랑에 혼자 발 들이기 싫어서 싸늘하게 식은 집에서 네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잖아. 다급하게 들어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나를 위로하던 네 모습이...
잡념이 길어졌다. 하야시야마는 목구멍에 걸린 수많은 문장과 단어를 뒤로하고 와인잔을 두어번 흔들었다. 샤나는 그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도, 하다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음에도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는 표현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구태여 대답을 해달라던가 같은 투정을 부리진 않았다. 대신 하야시야마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생일 축하 노래를 흥얼거렸다. 물론 헤비코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입술조차 달싹이지 않았다. 대신 흡연자임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폐활량으로 초의 불을 단숨에 꺼버렸을 뿐이다.
한 쪽은 케이크를 그닥 좋아하지 않고 한 쪽은 그런 설탕덩어리 식품류를 맘 놓고 흡입할 인물이 되지 못했기에 둘 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와인만 줄곧 비웠다. 창 밖이 새까매지고 찬바람이 스며든 방에 훈훈한 열기가 돌 때쯤, 샤나는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보나마나 생일선물. 굳이 묻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정체. 하야시야마는 샤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상자를 대뜸 열어버렸다. 자신이 없을 때 열라고 하려던 부탁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바시락거리는 종이 완충제 사이로 들어있는 것은 스노우볼이었다. 하얀 가루와 글리터가루가 물속에 같이 섞여들어 뒤집어 흔들면 화려한 설경이 펼쳐지는, 손 안에 쏙 들어올 크기의 스노우볼. 안에 들어있는 조각은 그리 대단하게 생기지는 않은 작은 정원이었다. 크게 눈에 띌만한 요소는 없음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완성도와 보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샤나가 자신을 위해 골라왔다는 요소때문에 하야시야마가 이것을 거절할 리는 없었다. 몇 번 뒤집고 흔들어 푸릇하던 정원에 눈이 쌓이는 것을 관찰하는 걸 지독하게 반복하던 하야시야마는 샤나에게 물었다.
"매일같이 필요한 건 없느냐고 물었으면서. 이건 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게 아닌데."
"그렇다고 필요한 걸 말해준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기왕 고르는 거 당신이 좋아할만한 거라도 골라봤어요."
그랬던가.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자기가 뭘 원한다고 말했는지도 잊어버린다. 와중에 샤나가 신중히 골라온 선물을 본인이 싫어할 리는 없으니 샤나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약간은 떨떠름한 얼굴로 하야시야마는 잿가루만 쌓인 벽난로 위에 스노우볼을 올렸다. 받침대에 새긴 문구와 조각의 벗겨진 페인트칠을 봤을 때 갓 만든 제품도 아니고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도 아니다. 자신의 컬렉션에 어설픈 복제품을 둘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테니 고르는데 발품도 팔고 고민도 많이 했을 모습이 선했다. 기특한 마음과 사랑스러움에 뺨에 가벼운 키스를 남겨준 건 덤이다.
그랬기에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을 때, 누가봐도 하야시야마를 위해 준비한 자리 앞에 놓인 선물 상자에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초록색의 무광 포장지를 빨간 벨벳 끈으로 묶은 그 상자를 한 번 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마주앉은 샤나를 한 번 보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면서도 입은 열지 않는 모습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보나마나 당장이라도 자신을 끌어안고 '예상하지 못한거죠?', 혹은 '깜짝 놀랐죠!' 같은 말을 하고싶음에도 굳이 체면 살리겠다고 조용히 하는 것이겠지. 표정으로 다 드러나고 있는데도. 괘씸하다며 한 번 쏘아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별한 기념일도 아니지. 내 생일은 이미 지났어. 신년 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화려한데….”
그 놈의 ‘크리스마스’ 라는 단어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지는 기분이 들어서. 오로지 눈빛만으로 네가 설명하라는 눈치를 종용하자 샤나는 금새 입을 열었다. 아니, 애시당초 참을 생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산타가 준비한 선물이예요. 열어보면 분명 멋진 선물이 있을걸요?”
산타라는 단어가 꼭 샤나. 라고 들렸다. 발음이 비슷한가? 아니면 의도해서 발음을 뭉갰나.
양손으로는 쥐어야할만큼 적당히 큼직한 박스를 집어들고 누군가가 손수 묶었을 리본을 풀면서 헤비코는 꿍얼거렸다. 산타를 믿는 어린 아이에게나 선물은 찾아온다던데 말이야. 네가 받을 선물 아닌가? 내 나잇대에 산타를 믿으며 머리맡에 빨간 양말을 걸어놓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분명 네 침대 위에는 있었던 것 같고 말이야…. 남에게 온 소포 함부로 뜯으면 절도죄라던데.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불평불만에 헤비코는 자각이 없었다. 그러나 샤나도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움과 설렘, 긴장, 솔직하지 못해서 비비 꼬아진 내면이 결국 저런 말을 줄줄 늘어놓고 있는 거였으니까. 생판 남이었다면 그런 말할 바에는 내놓으라며 뺏었어도 무관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저리는 샤나의 귀에선 고맙다는 인삿말의 ver. 하야시야마 헤비코였고, 자각하지는 못했어도 헤비코의 늘상 창백한 얼굴은 기대로 인해 약간 상기된 모양새였다. 느긋하고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손끝도 사실은 꼼꼼히 감싸진 포장을 뜯느라 아주, 아주 약간 다급해져 있었다.
유독 완충제에 애를 쓴 모양새가 보이던 상자를 다 헤집어놓자 나온 건 브로치였다. 새상품은 아닌듯 했지만 오히려 그 탓에 광택이 두터워져 고급진 느낌을 보여주는, 크지 않은 크기의 호박이 박혀있는 브로치. 테두리에는 나뭇잎이 드문드문 붙은 가지가 새겨져 있었다. 호박 안에 갇혀있는 것은…. 조금 흐릿하게 보여도 조금만 집중하면 나비의 날개가 안에 보존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브로치가 손에 소중히 쥐어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멈춘 잔소리와 귀끝까지 빨갛게 변한 얼굴에 샤나가 말로 꺼내기 어려울만큼 행복했음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절대로 샤나를 바라보지 않고 입을 뻥긋하지도 않은 채로 굳어있는 하야시야마 헤비코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단지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워 굳어버린 것뿐이지.
“그거, 다음에 만날 때 하고 와줄 수 있어요?”
“….”
“글쎄. 그런 건 이런 장신구랑 어울리는 옷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 아무 옷에나 달고다닐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흠집이 생겨도 괜찮을텐데요. 오히려 그런 게 더 세련된 느낌이 나잖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헤비코가 분명 작은 흠집 하나라도 날까봐 전전긍긍해서 어딘가에 전시해두기만 할 것을 알기에 한 말이였다. 그 예상이 적중한 것마냥 헤비코는 브로치를 들어 빛에도 비춰보고, 색을 유심히 뜯어봤다가, 근처에 있던 거울 앞에 서서 가슴팍에 가져다 대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놓치는 사람은 없었다.
헤비코는 잠시 머뭇거린 후, 조심스레 셔츠에 브로치를 달았다. 물론 뒤는 돌지 않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을 보고, 또 그 뒤에서 비치는 샤나의 모습을 잠시 보고. 둘의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바야흐로 하야시야마 헤비코의 인생 중 찾아온 첫번째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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