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졸면서 쓴것같은기분이
어린 나이에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아 도착한 이 나라에 처음 병사로서 자원하던 날, 뭣도 모르는 어린 타지인을 주워 잘도 키워내신 집주인은 말했다.
“전쟁도 말이지, 옆나라랑 하는 전쟁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지금은 이 나라 안에서 같은 사람끼리 싸우고 있잖니. 그러니 말이야….”
친구도 믿지 말라. 전우도 믿지 말라. 네가 입대하는 날에 같이 군인이 되었고 같이 진급을 했어도 믿지 말라. 등을 보이지 말고 상대가 등을 보여준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라. 그건 십 년 전 쯤에 갓 입대했던 아들을 주검으로 돌려받아야 했던 젊은 과부의 그림자가 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형의 최후라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지. 같은 사단 안에 숨어들었던 졸렬한 밀정에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납탄에 미간을 제대로 맞아 알아보지도 못할 모양새로 집에 돌아왔던 아주머니네 외동 아들. 목에 달려있던 인식표가 아니었다면 집에 실려오지도 못했을테다.
집주인이 나에게 했던 말은 한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아주머니가 나이를 먹어 머리가 눈 맞은 듯 바래버리고, 죽은 아들 대신 나를 아들삼아 키우는 게 낙이었다면서 낡고 좁은 벽돌집을 물려주었을 때도, 기억마저 오락가락하여 눈을 감는 순간에는 폴이 아닌 제이크라는 이름을 불러버렸을 때에도. 나는 한 번도 아주머니가 나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잊어본 적이 없다.
그 나이 먹은 할머니는 내가 사지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뛸듯이 기뻐하셨다. 마치 내가 반란군의 미간에 박아버린 최신식 무기의 탄환이 제 아들의 복수인 것 마냥 굴었고, 내가 어깨에 뱃지 하나 더 달고 완장 하나 더 차고 각 잡힌 군복 차림으로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친아들이 진급한 것마냥 파티를 열자고 했다. 어쩌면 집주인이 하얀 병상 위에서 자글자글한 주름과 함께 눈을 감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상실보다 자유에 가까웠던 이유도 알 듯 했다.
이야기가 어찌되었든 그 뜻깊은 가르침 덕에 흙내나는 군복보다 깔끔한 정복도 입을 날이 늘어나고, 가슴팍에 달아야할 뱃지가 늘어나고, 아래로 굴려야하는 부하가 늘어났음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입대한 이후로 잘라낸 밀정이 셋. 붙잡은 반란군 간부가 하나. 고집스러운 간부를 꼬여내서 얻은 정보로 직접 지휘한 소탕작전은 명실상부하게 제대로 성공한 작전 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도 이뤄낸 위업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하산처럼 들어온 부하가 생겨버렸다. 키는 크고, 얼굴도 반듯하고. 사실 반듯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광채가 나는 외모에 군 홍보용 친선대사가 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도 남을 피지컬이니까. 군복 예쁘게 입히고 활짝 웃는 얼굴에 경례를 하면서 얼굴에 위장크림 조금 바르면 딱 좋은 홍보 전단지가 나오겠다는 생각을 하던 도중 인사를 받았다. 새로 온 대위님 직속으로 일할 부사관으로 인사드리게 되었다는 얼굴은…. 누가 봐도 죽기 딱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다른 것보다도 의심스러웠던 것은 분명 저런 사람을 봤을 법도 한데 곁에 붙은 사람 치고는 처음 보는 얼굴같다는 생각이 사라지지를 않아서인 탓이 컸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선 이곳과는 완전히 먼 타지에서 생활하느라 처음 봤을 거라는 흔한 사유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 그 무엇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뒷조사를 탈탈 털어내고 나서 느낀 것은 완전 생사람을 잡았다는 결론이었다지만.
신분이 확실한 가문 출신에, 좋은 성적으로 학교도 졸업을 깔끔하게 해내놓고서는 정말로 이곳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남쪽 끝의 육군으로서 몇 년을 복무했다는 기록까지. 오히려 너무 완벽해서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군더더기 없는 이력이었다. 육군으로 굴러온 군인 치고는 피부가 티 없이 하얗다는 점이 조금 의아했을 뿐이다.
“하야시야마 대위님은 이런 거에 너무 약하십니다. 여기로 갓 오고 나서 알았는데, 대위님이랑 제대로 된 저녁식사 자리를 해본 사람이 한 손으로 꼽힌다니. 이런 짬밥 먹을 바에는 차라리 나가서 좋은 식사 자리 대접받는 게 낫지 않으십니까?”
“기름지게 거북한 식사 먹고 체할 바에는 질리도록 먹어서 익숙하고 소화 잘 되는 여기 밥이 낫지 않은가? 역으로 생각하자면 그런 자리 다 챙겨가면서 술잔 나눠주고 나면 다음 날 훈련은 어떻게 참가할 생각인지 묻고 싶군.”
“덕분에 대위님 한 번 만나보겠다고 연락 올 때마다 최대한 그 분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서 전달해야 하는 저는….”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대위는 벌떡 일어났다. 뒤에서는 부사관이 투덜대다가 급하게 옆으로 다가가려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대위님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걸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있는 건 아니라지만 대위님의 업적을 생각해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대위님이 출세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이 많으셨으면 별을 7개라도 달아서 북두칠성을 모자에 새기셨을텐데 그런 건 모르는 척 하시면서 귀찮은 일은 다 저에게 넘겨버리시면 제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식사에 입도 안 대고 술도 안 드셔도 괜찮으니 얼굴만이라도 잠깐 보이고 오시면 저야말로 감사할텐데 말입니다….
털어놓는 이야기의 수준이 지극히 사적인 술자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문이 굳게 닫혀있는 대위의 개인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군 내부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굳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기 시작하자 부사관의 입도 조용해졌다. 정확히는 주제만 돌렸다. 10초 남짓하게 다물렸던 입술은 곧바로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신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온갖 장교들께서는 한시라도 바삐 출세하시려고 혈안이셨던 분들이었는데. 가뜩이나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이유를 만들어내고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한 단계 더 오르려고 혈안이신 분들만 잔뜩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대위님은….”
“출세를 원했으면 누구 말마따나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비싼 고기 씹으러 정장이나 꿰입고 있었겠지. 애초에 그런 시시한 이유였다면 총칼맞으며 여기 있기보다는 다른 길을 택하지 않나.”
“그렇다면 정말로 정의로운 이유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부사관의 목소리에서 유독 정의와 국가가 도드라지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더 이상의 영양가 없는 대화도, 그렇다고 제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도 없었던 대위께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뚝뚝하고 사회생활의 경험이라고는 쥐톨만큼도 없어보이는 꽉 틀어막힌 대위의 말 없이 하는 의사 표현에 익숙해지신 스위트하트 부사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의 전선에 나가시다니…. 나지막한 한마디만 귓가에 스쳤다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하야시야마의 군입대는 누군가의 복수나 대의명분을 위한 이야기보다는 훨씬 단순하게도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의 취업 선택지 중 하나였을 뿐이기에 타인이 듣기에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몇 분 전까지 스위트하트 부사관이 투덜대며 나열한 위업의 목적도 이유도, 이 시시한 대위는 그저 ‘군인이 할 일이 따로 있나.’ 같은 말로 축약시켜 버릴 것이기에(실제로도 부사관이 몇 번이고 시도해본 결과였다.) 부사관은 제 할일을 해야한다며 자리를 비웠고, 대위는 고대했던 혼자만의 시간을 덥혀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궁금해하면서 불쾌할 선까지는 넘나들지 않고, 저 혼자서는 처리하지 못해 난감했던 온갖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길 즐긴다. 오죽하면 워커홀릭이라는 게 저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을 찾아서 하고, 그 숙련도나 완성도는 굳이 트집을 잡으려해도 군더더기 없어 어느샌가 전부 맡겨버려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생겨버린지 오래다. 이 정도의 재능을 가진 병사를 어째서 여태껏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됐을 때 안부를 겸해서 연락을 보냈던 그의 전 상관은 스위트하트의 그 대단한 실력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도, 그가 잘 적응하였는지 몇 번이고 묻곤 했다. 서글서글한 낯과는 별개로 사람을 사귀지 않는 성격인가, 혹은 그 성격 자체가 모나서 타인이 다가가질 않는건가.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느샌가 이곳에서 저보다 많은 사람을 사귄 듯 했다.
첫만남의 그 어리숙함은 거짓이었는지 적응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나서는 것에도 익숙해진 부사관을 대위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일테다. 물론 그에게 물어본다면 분명히 부정하겠지만, 이곳을 지나다니는 그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다 같은 말을 할테니 말이다.
‘처음 오셨을 때는 불평 가득한 눈으로 부사관님을 보시더니 이제는 눈빛이 다르지 말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합을 몇 년은 맞춘 사이로 보이는데 대위님만 부정하시지 않습니까?‘
같은 식으로.
스위트하트 부사관은 하야시야마 대위가 가지지 못했던 인간성을 넘치도록 채워넣었다. 함께 있는 전우들이 종종 불평했던 쌀쌀맞음이 완화되고, 농담을 던져도 굳은 표정으로 무시하는 일이 줄어들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부사관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대위께서는 부사관을 얼마나 아끼셨을지, 또 부사관께서는 대위를 얼마나 존경했을지 감히 묻기도 어려울 일이었다.
그러니 지독하게 냉혈하다는, 사람 사이에 인정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군다는 하야시야마 대위가 소문처럼 날카롭게 굴었다면 결과에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하지만 본디 이 어리숙한 대위께서는 얼음이 아니었던 탓에 정작 차가워져야할 때에는 차갑지 못하고 날카로워야하는 순간에 한없이 무뎌지는 성정을 지녔다. 뱀을 닮았다는 인상은 꼭 독사다운 잔혹한 성질이 아닌 주변의 따뜻함을 따라가는 변온동물같은 성질을 뜻했을지도 모른다.
곁에 들러붙은 분홍빛 장미 곁에서 햇빛을 쬐다보면 따뜻하게 변해버리는 것은 결국 뱀인지라, 제가 똬리를 튼 것이 가시덤불인지도 눈치채지 못한 뱀은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쯤 이미 사방을 옭아맨 가시덤불만 마주해야 했다. 나가려고 하면 몸이 긁히고, 몸을 비틀기라도 하면 찔리기 일쑤다. 도망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늦을대로 늦어버렸으니, 오래도록 봄볕 아래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죽어갈 뱀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