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An invitation to the mood for love

BL 드림

Max Richter - November

셀라이블라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에 어떤 귀족을 위한 별장이 하나 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사라지지 않은 땅이었지만 셀라이블라손보다는 형편이 나은 곳이었다. 적어도 대저택의 하인이 되면 숙식은 걱정 없고 인근에 사는 식구들도 굶주리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최근 어떤 부자가 셀라이블라손 고성을 매입해 리모델링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저택과 하인용 숙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자세한 정보를 알 리 만무했다.

평범한 귀족의 시골 별장으로써 조용한 일상을 보낼 터였는데, 얼마 전부터 저택이 부쩍 소란스러웠다. 일주일 내내 새로운 식료품과 장식품을 실은 버든비스트 짐마차가 뒷문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게다가 평소라면 가볍게 넘어갔을 실수도 몇 번이나 교육하며 하인들의 품행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무언가 저택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런더니움에서나 돌아다닐 법한 최신식 자동차 몇 대가 연달아 도착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친 필라인이며 루포 등이 수행원들의 보필을 받으며 저택의 현관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저택의 주인과 빅토리아식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화제는 대체로 이번 파티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던 신비로운 예술가에 대해서였다.

"글쎄, 빅토리아 예술 양식의 전설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캐스터 공작님도 쉽게 손에 넣지 못하실 영광이지요."

"그치들의 코가 워낙 높은 게 아니잖습니까? 부귀 같은 건 개뼈다귀 취급하곤 하던데요."

"언젠가는 그 뼈다귀도 급한 날이 오기 마련이죠. 그 작자가 얼마나 대단해도 입에 풀칠은 해야하지 않겠어요. 위장에 파리가 꼬이기 전에는 말입니다."

귀족들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모욕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천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본의 승리를 확신하는 눈치였다. 한편으론 얼마나 급했으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저자가 이런 시골 구석까지 내몰렸느냐면서 영지의 흠을 잡기도 했다. 호스트는 점잖게 흘러넘겼지만, 집에 대한 모욕은 곧 집주인에게 이어지는 법이었다. 아무리 급하게 꾸며냈어도 촌티는 쉬이 벗을 수 없는 거라며.

귀하다고는 말 못할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가자, 집사 역시 주인을 모시려고 했다. 필라인 자작은 말없이 손을 들어 제지하곤 느지막히 내려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절대 빠르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안녕하신가, 자작."

"어서 오시오. 답신을 받았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소."

"교류는 중요한 법이니까."

"그 범상찮은 말투. 당신이 박사겠군. 편지를 몇 번씩 읽어서 기억하고 있지."

박사라고 불린 사람은, 남성용 예복을 입고 있었다. 외투에 달린 검은 후드 때문에 종족은커녕 하관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밀을 상당히 중요시 한다더니 간부의 신변 보호에 공 들인 듯했다. 어쩌면 그냥 취향일지도 모르겠지만. 빅토리아 권력층 사이에선 퍽 괴팍하다고 알려졌으나 회사 로고가 적힌 외투를 걸치고 있을 뿐이지 인상은 꽤 평범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자작.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일개 제약 회사하잖아. 친분의 장소는 귀하거든."

"설마! 온 테라에 명성을 떨치는 로도스 아일랜드가 어떻게 일개 회사에 비할 수 있겠소?"

"과찬이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박사가 데려온 이들은 조용히 저택을 살폈다. 오늘을 위해 깔끔하게 정돈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특별한 구석은 없어보였다. 중요한 것은 역시 저택 내부일 터였다.

공치사를 비롯한 이야기가 끝나자,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온 손님들은 연회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샴페인을 마시거나 핑거푸드를 먹는 등 나름 즐기는 듯보였다. 그 모습을 빠르게 눈에 새겨넣고서 박사는 출발하기 전 작전대로 오퍼레이터들을 저택에 침투시켰다. 가능한 수색 인원을 차출했다지만, 인력 낭비가 될 지언정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길 바랄 뿐이었다.

'팬텀, 너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오퍼레이터 팬텀으로부터 연락이 끊긴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암살자라는 직업 상 잦은 연락을 하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박사는 딱 일주일 전 1개월 간의 휴가 신청서를 받았다. 쉬는 동안 꼬박꼬박 연락할 의무는 없더라도, 팬텀 쪽에서 먼저 안부를 전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셀라이블라손 근처에서 팬텀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그것도 팬텀 본인이 아니라 어떤 귀족의 초대장이 대신 전해주었다. 그러나 방금의 대화를 통해서 박사는 초대장을 보낸 사람과 접객하는 귀족이 동일 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번지르르한 농간을 부릴 만한 인품으로 보이진 않았다.

'우리가 갈고 닦은 붉은 보석을 당신에게 선보입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갈고 닦기는커녕 흠집을 냈겠지. 박사는 속으로 이죽거리며 회장을 노려보았다. 그 중심에는 파티의 주최자와 엘라피아를 본 뜬 듯한 가면을 쓴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박사가 있는 기둥까지 닿진 않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내 박사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청년이 싱긋 미소지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박사는 팔짱을 풀고 놀란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츠를 쓴 걸까?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거는 듯한 감각이었다. 서둘러 의문을 파악하려던 찰나, 귀족의 뒤에서 집사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좋은 밤들 보내고 계십니까? 저희 영지에 방문해주신 내빈 여러분을 성대히 환영합니다."

목소리의 크기를 확대시켜주는 물건, 마이크인 모양이었다. 호스트는 판에 박힌 인삿말을 내뱉더니 곧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언급했다. 박사가 직접 이런 변경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러오신 '극단장'님께서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던 소장품들을 소개해주신다고 하더군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빅토리아 전역을 울리는 최고의 예술가가 품고 있는 보물들을! 과연 어떤 것들이 장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오늘 밤 여러분이 직접 가져가실 수도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경매'였다.

사람들은 황호성을 내뱉었다. 승리. 완전한 승리. 세상에서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술의 경지마저 정복하고 신비의 빗장마저 열어젖혔다. 주최자와 청년의 입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다들 잘록한 유리잔을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박사는 느릿느릿 시늉했다.

"처음 보여드릴 작품은 작자 미상의 《추락하지 않는 이카루스》입니다. 날개 달린 피디아의 전설은 알고 계시죠? 상이한 신체 부위에서 불멸과 영속성을―."

물론, 알다마다. 라이타니엔 국립 박물관에서 본 가울의 전리품이었다.

"다음 작품은 《사미 엘프의 눈물》인데요. 작가는 테라의 험난한 자연 그 자체입니다. 저 머나먼 설원에서 살아가는 경이로운 존재들이 자아낸 생명의 찬사를 문명의 실로 엮어 만든 것이죠."

진주. 흔하디 흔한 진주 목걸이였다. 아주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귀족들은 경매가 진행될수록 무엇이라도 손에 넣으려고 들었다. 박사가 시큰둥하게 바라볼수록 청년의 입가는 올라갔다.

소장품들은 빠르게 주인을 찾아갔다. 다락방에서 썩어가는 것들과 별 차이가 없을 텐데도 있으나 마나한 출처에 현혹되고 있었다. 이 열기, 이 박수 소리. 감탄과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지갑의 두께를 과시하는 장소에 과연 팬텀이 나올지 의문이었다. 팬텀을 미끼로 박사와 접선하고 싶었다면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었다.

고작해야 오퍼레이터였다. 뛰어난 아츠와 전투 능력을 갖고 있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의 특수성에 비하면 딱히 내세울 부분도 없다. 대체 불가능한 인력도 아니고, 함께 겪어낸 세월도 엘리트 오퍼레이터들처럼 길지는 않다. 그렇지만, 하지만….

박사에게는 팬텀이 필요했다.

"자아, 대망의 순간입니다."

박사는 경매가 끝나자마자 청년에게 팬텀의 행방을 물어볼 작정이었다. 생각이 정리된 순간 청년과 비슷한 가면을 쓴 사람이 수레를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여태껏 낙찰된 물건들과 달리 새까만 천에 가려져 있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가울이 남긴 또다른 유산이기도 하죠."

마지막이라 더욱 기대를 고조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듯했다. 사회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용물을 공개했다.

새장 안에는 붉은 벨벳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인 남자가 벌벌 떨고 있었다.

"크림슨 극단의 살아있는 걸작, 《블러드 다이아몬드》입니다."

경악 어린 침묵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도 그럴게, 전쟁이 끝나고도 힘 겨루기가 한창인 테라에서 인신 매매 금지 협정서는 피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전히 신분제가 남아있고 인신 거래가 암암리에 돌더라도 문명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중의 인식도 간신히 상식으로 자리잡았는데, 애써 새겨놓은 정상성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작품'이 나온 것이다. 아니, 소장품이라고 해야할까?

어째 알몸의 사내를 보고 있으니 박사는 웃음이 번졌다. 수많은 시선과 낮은 실내 온도에 일방적으로 노출된 몸뚱이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금속 같은 눈동자는 죄인처럼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팬텀이었다.

"팬텀."

블러드 다이아몬드 따위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박사와 조금 떨어져 있던 부인이 옆에 있던 남작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성을 잃은 파울비스트처럼 사정없이 목을 물어뜯었다. 또 그 옆에서 늙은 필라인 신사가 시중을 들던 하인을 쓰러뜨렸다. 박사가 데려온 오퍼레이터들은 조각상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경매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피와 절규로 물든 난장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는 건 청년과 박사 뿐이었다. 팬텀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박사는 옛 선지자가 이베리아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부르듯 앞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재현극이나 다름없었다.

"박사? 정말 박사인가? 박사, 알려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신뢰도 상승 후 대사 2

하고 있는 걸까. 팬텀은 혼란스러워보였다. 박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 위 배역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박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팬텀의 입술에 스스로를 부딪혔다. 영양 상태가 나빠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감촉이 호흡처럼 얕게 스쳤다. 탕, 탕. 경매품의 낙찰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들렸다.

"팬텀, 돌아가자."

그곳을 집이라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팬텀이 돌아올 장소였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다른 누구도 아닌 박사 자신의 곁으로.

철창 너머에서 팬텀의 손을 잡으려고 하기 직전, 박사는 확 뒤로 밀려났다.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팬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방금까지 박사가 있던 자리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손님."

"…뭐?"

"아직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청년은 생글생글 웃으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팬텀은 경매품이었다. 비록 낙찰 받았지만 완전히 인수한 것도 아니었다. 박사는 팬텀과 남자 사이를 가로막듯이 섰다.

"우리 루시안을 마음에 들어하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이곳은 작품을 즐기기엔 마땅한 장소는 아니지요. 어떠십니까? 저희가 준비한 곳에서 마저 즐기시는 것은."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바로 팬텀을 데려가겠다며 헛소리를 일축하려는 차였다. '극단장'은 박수를 한 번 쳤다. 그러자 어둠이 내려섰고. 다시 박수 소리가 한 번. 회장이 밝아졌다.

고통 어린 비명도, 시체들이 떠다니는 피바다도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악몽처럼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오직 박사와 오퍼레이터들만이 연회장에 현실로 남아 있었다. 지독한 환각의 후유증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박사는 새장에 지난 밤의 흔적을 발견했다. 편지 봉투였다. 그렇다,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단 두 사람의 무대를 위한 초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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