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A blooming wind
BL 드림
"난 이제 자러 갈 건데, 넌?"
어쩔 거야? 박사가 문앞에서 팔짱을 낀 채 팬텀을 바라보았다. 컴컴한 바이저 너머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퍼레이터는 그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퇴근해도 좋다는 뜻이야. 아니면, 뭐, 연장 근무라도 하고 싶어?"
"…박사, 난 네 호위다."
박사의 다리 옆에서 크리스틴이 가냘프게 울었다.
"그래, 알았어."
박사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마치 방에서 내쫓긴 것처럼 구는 필라인 하나와 고양이 한 마리를 버틸 재간이 없었다. 팬텀이야 아직 영문을 모르는 듯보였으나 크리스틴은 방 주인보다 빠르게 실내로 들어가버렸다.
마지막으로 팬텀이 박사를 따라 문간을 넘어서면, 옅은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오퍼레이터들한테 지급되는 표준 거주용 선실과 비교해도 배기 시스템 가동음이 낮고 무거운 것만 제외하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 장식은 평범했고 재떨이도 보이지 않았다. 실내에선 안 피는 것 같지만, 방 주인에게 옮기라도 한 걸까. 자신의 선실에 거의 들어간 적은 없었으나, 팬텀도 오랜 시간을 한 장소에서 보냈다면 그 흔적이 깊게 묻어나올지도 몰랐다.
"먼저 씻을게. 옷은 가져오는 게 좋을걸. 내 사이즈가 맞지는 않을 테니까."
"박사, 나는 호위를 하러 온 거다."
크리스틴은 천천히 거닐며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박사는 외투나 페이스 가드를 툭툭 떨어뜨리면서 선실 내에 붙은 샤워실로 걸어갔다.
"나도 알아. 내 말은, 하루 종일 같은 옷만 입고 있으면 찝찝하지 않느냐는 거지."
"여벌의 옷 같은 건 없는데."
"뭐, 뭐라고?"
"속옷 정도는 있다."
박사가 오해할까봐 황급히 덧붙였다. 허물처럼 꾸물꾸물 옷을 벗던 박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팬텀을 돌아보았다.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팬텀은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보는 것 같아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목에 머리가 걸린 채로 박사는 허둥지둥했다.
"아니, 지급 받지 못한 거야? 비품 부서에 바로 연락할게."
"괜찮다. 로도스 아일랜드로부터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그동안, 잠옷의 필요성이 없었으니까."
"그래?"
박사는 마저 옷을 훌쩍 벗어던졌다. 불규칙한 생활 습관이 만들어낸 볼품 없는 몸이 드러났다. 그나마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잔근육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썩 좋은 몸매는 아닌데 어째서인지 팬텀은 박사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육체마저 배역에 맞추던 극단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팬텀?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러운데."
"…아. 미안하다."
"됐어. 먼저 들어갈게."
곧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팬텀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박사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옷가지들을 주워 샤워실 앞 바구니에 넣었다. 박사의 호위를 자처했지만, 사실 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박사의 선실은 함선 내 최심부에 있는 장소인 만큼 다른 여느 곳보다 안전은 보장되어 있었다. 또한 로도스 아일랜드나 박사 개인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서 자체적으로 함선 내부를 순찰하는 팀도 있었다. 팬텀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한 성향 탓에 그런 오퍼레이터들과 어울리진 못했지만.
줄곧 그림자 속에서 머물던 암살자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에서 팬텀의 가치는 희박했다. 어떻게든 쓸모를 인정 받지 않으면 안 된다. 팬텀이 할 수 있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이 자리를, 누구든지 채울 수 있었다. 박사의 옆을, 곁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건 싫어.'
그때 고양이가 머리를 꿍 하고 팬텀의 정강이에 박았다. 주의가 천천히 돌아갔다. 팬텀은 쭈그리고 앉아 크리스틴을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는지 알 수 없었다.
"팬텀, 나 나왔어. 들어가. 좀 습하긴 하지만."
"…알았다."
박사는 목에 수건을 두른 채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뜨거운 물로 데치듯 씻은 건지 몸에서 김이 폴폴 나왔다. 크리스틴은 팬텀을 떠나 뜨끈한 박사의 발치를 기웃거렸다. 팬텀이 옷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가자 등 뒤에서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렸다.
낯선 냄새가 팬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청결을 일부러 등한시한 적은 없지만, 늦은 밤 텅 비어있는 공용 샤워 시설을 이용할 뿐이다. 이번에는 박사의 방에서 씻는 중이었다. 그저…. 팬텀은 눈을 끔벅거렸다. 다같이 쓰는 비품일텐데, 뭔가 달랐다.
그건, 굳이 따지면….
갑자기 물 온도가 참기 힘들어졌다. 수도가 달궈져 있다고 한들 지나치게 뜨거웠다. 가슴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팬텀은 곧장 샤워실에서 뛰쳐나왔다.
"빨리 나왔네?"
아가씨의 사냥 상대가 되고 있었던 박사가 의아한 얼굴로 팬텀을 바라보았다. 필라인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 미처 닦지 못한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팬텀? 몸이 왜 이렇게 새빨개? 온수가 고장났나?"
"…박사."
헐벗은 몸뚱이 아래로 석연찮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막상 박사를 부르긴 했어도 갈무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배우로서 표현력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루시안이란 인간 자체는 서툴다는 걸 스스로도 간과하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팬텀의 모습에 박사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시설 담당은 내일 부르던가 하고. 일단 머리부터 말리는 게 좋겠다."
"온수는 제대로 나온다."
"그건 다행이네. 좋아. 이리 와, 팬텀. 여기 앉아 봐."
박사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팬텀은 박사가 가리키는 대로 다리 사이에 풀썩 앉았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물이 견갑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급한 대로 서랍장 속 여분의 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팬텀은 짧은 꼬리만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제대로 안 말리면 몸이 상하잖아. 앞으로 내 호위 안 할 거야?"
툴툴거리는 것치곤 박사의 손길은 썩 조심스러웠다. 팬텀이 채 대답하기 전에 머리 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돌풍 같은 요란한 소리도 동반하자 예민하고 뾰족한 두 귀가 파르르 떨렸다. 아마 이 남자의 연약한 부분 중 하나일 터였다. 조금 더 알아보고 싶지만, 당장의 호기심과 지금 이 순간을 맞바꾸고 싶진 않았다. 문득 샘솟는 장난기를 억누르면서 박사는 팬텀의 밀크 초콜릿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살살 집어넣고 두피를 부드럽게 자극했다. 몇 번 문지른 끝에 곧 필라인 특유의 그릉그릉 낮은 울림이 암살자의 목에서 새어나왔다.
"…아니, 할 거다."
"응. 그래야지, 그럼."
박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아마 웃었을 것이다. 팬텀은 그럴싸하게 상상했다. 박사가 바라는 게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된 것이다. 가슴 속 소란이 잦아든다. 방금까지 갈피 잡지 못하던 사고가 까마득할 정도로 바람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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