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Trust

BL 드림

어느날 밤이었다. 서류 처리가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자, 시각은 자정을 한참 지나 있었다. 옆에서 일을 보조하던 오퍼레이터들도 다정한 걱정과 함께 쉬러 돌아간지 오래였다. 박사는 기지개를 켜며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슬슬 나오지 않을래? 팬텀."

과로를 의심할 법도 하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나지 않아 어둠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어떤 형태가 드러났다. 시시하게 들켜버린 그림자는 순수하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

"다 아는 수가 있어."

박사는 픽 미소를 지었다. 로도스 아일랜드에 입사한지 얼마 안 된 대원이 가벼운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십중팔구는, 치료를 거부하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어도 그보다 무거운 사연이 발목을 잡고 있는 탓이 컸다. 개인 혹은 국가 단위로 재앙과 비극의 시대였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박사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좋은 밤이야. 오늘따라 조용해서 마음에 드네."

"박사, 나를 불러낸 이유가 뭐지?"

놀라움도 잠시 필라인 남성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암살자가 오래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우선…."

박사는 몸을 숙여 서랍 아랫칸을 뒤적거렸다. 팬텀의 어깨 위에서 검은 고양이가 재촉하듯 야옹 울었다.

"한 잔 하지 않겠어?"

동그란 얼음까지 들어있는 액체가 희미한 조명을 받으며 찰랑거렸다. 벌꿀처럼 영롱한 금빛이었다. 혹은 팬텀의 눈동자 같은.

"근무 중 음주는 켈시 선생이 바라지 않을텐데."

"물론 그렇겠지. 자, 어서 받아. 팔 떨어지겠어."

팬텀이 받아들 때까지 박사는 꿋꿋하게 잔을 들었다. 그 앞에는 박사 자신의 몫도 야무지게 놓여 있었다.

"가끔씩은 괜찮잖아.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도 아닌데. 그냥저냥 기분 낼 때 좋거든."

어떻게 회유해도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팬텀은 한숨을 내쉬면서 마지못해 박사가 내민 잔을 받아들였다.

"라이타니엔산 25년 위스키지. 내 비장의 술이야."

박사는 책상 위에 사뿐이 내려선 크리스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정도 일탈은 켈시도 봐주거든. 함선 내에선 달리 스트레스 푸는 방법도 없고."

"그런가?"

거짓말이다. 하지만 주치의와의 내밀한 관계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팬텀은 수긍하는 듯했다. 박사는 상대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곤 홀짝홀짝거렸다. 무슨 사과 주스처럼 마시는 모습에 젊은 필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술을 입에 머금었다.

"으…."

독하다. 나무 탄 재처럼 쓰다. 부드럽지만 약간은 떫었다. 고급스러운 식초 같은 미세한 신맛이 혀끝을 간지럽히듯 지나갔다. 팬텀이 모르는 과실의 향이 달짝지근하게 스쳐지나갔다.

순간순간 바뀌는 필라인 남성의 감정을 안주 삼아 박사는 잔을 기울였다. 팬텀조차 본인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런 맛을 선호하나?"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지, 나는."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걸 좋아한다. 술자리는 떠들썩한 분위기 혹은 깊은 밤에 가라앉은 달을 바라보며 마시는 걸 즐기다 보니 애초에 술 자체는 수단에 불과했다.

"도수가 꽤, 높은 것 같군…."

기습을 당한 듯 암살자가 휘청거리며 책상에 손을 짚었다. 박사가 둘로 보였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양 뺨이 붉게 물들어 있을 테고 금빛 눈동자도 거의 초점이 맞지 않을 터였다. 크리스틴이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팬텀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댔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조금 그렇지? 알콜 때문에 약성이 빨리 돌 거야."

"왜…."

"속여서 미안하지만, 치료를 잘 받지 않는다던데."

박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퍼레이터의 팔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부축했다. 멀리 가는 것도 없이 사무실 소파에 팬텀을 눕혔다.

"최악이다…."

팬텀은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술 때문이 아니더라도 얼굴이 홧홧했다. 커틀릿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서 치과에 데려가진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냥 말로 했어도 됐을 텐데….

"검진만 할게, 검진만. 지난번 부상 치료가 늦었다고 들었으니까."

달래듯이 말하는 게 더 수치스러웠다. 팬텀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박사의 옷깃을 움켜쥐며 웅얼거렸다.

"…나는, 어린 애가 아니다."

"알아. 팬텀은 착한 어른이지."

"박사…."

"응?"

"박사. 난 네가 뭘 주든 받아 마셨을 거다."

몸에 기운이 없는지 뒷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박사가 몸을 낮춰 귀를 대자, 팬텀이 한 번 더 속삭였다.

"하…."

하마터면 매달 켈시에게 받는 정기 검사에 청력을 추가할 뻔했다. 박사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팬텀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수마에 끌려가 눈꺼풀이 단단히 덮어있는 상태였다. 사람을 일격에 기습하고 떠나다니 과연 암살자답지 않은가. 박사는 열없이 자신의 입가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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