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신이 사는 마을

1화 구름짬 - 1

구름 덩이의 틈새

내 이름에는 낭만과 저주가 깃들어 있다.

바다, 넓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이름.
피, 특이한 성.
합쳐서 피바다.

장난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악의가 보여서 섬뜩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내 이름 속의 악의를 읽고 나를 놀리지 않았지만, 어린애들은 시도때도 없이 놀렸다.

나는 버려진 자식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내 생각이 우습고 유치하다고 무시하겠지.

지금도 나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 있다.
부모님은 이혼 소송을 진행중이고, 이 싸움에 별로 중요한 대상이 아닌 나는 시골로 보내졌다.

말로는 딸에게 더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고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주로 오가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고, 내 동생인 지우를 누가 데려갈 것인가만 이야기했다.

이 싸움은 사실상 아들을 누가 데려갈지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 동생은 서울에, 나는 시골에 있는 것이다.


언니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자취를 시작했다.
이 꼴을 보기 전에 집을 떠나다니. 완벽한 행운아였다.
언니와 달리 이제 중학생인 나는 집에 붙어서 더러운 꼴을 다 볼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배려하는 척이나 하지 말지.

한겨울에 난방도 잘 틀어주지 않는 시골집으로 보내면서.

나는 방학에 친구들이랑 놀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데.

아니다. 그래.

부모님 말대로 지금 시골에 있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집에선 이혼을 하네마네 싸움이나 하니까.
저걸 다 봐야하는 지우가 더 불행하지.
나는 평화로운 내 상황이 더 낫다며 나 자신을 속이려 들었다.

-

불행에 취해있는 것도 첫 날 뿐이었다.
시골은 너무 지루했다.
이혼? 버려진 기분? 불안함? 그건 지루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컴퓨터도, 핸드폰도, 친구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들리는 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새소리 뿐.
이쯤되니 공부라도 하고 싶었지만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책은 한 권도 챙기지 못했다.

지루한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3일째 되는 날, 산 쪽에 사는 사촌 동생인 은하가 놀러올 때까지.
놀아달라고 조르는 초등학생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은하는 아침부터 놀러 와서 산에 가자고 졸랐다.
어제 냇가에 갔다가 모자를 잃어버렸으니, 같이 찾아달라고 말했다.
냇가라니, 그거 산 중턱에 있는거 아닌가.
아무리 심심해도 이 추운 날 등산은 꺼려졌다.
나는 은하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등산은 적당히 거절할 핑계를 생각해냈다.


영월의 산골짜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구렁이가 산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다 아는 전설이다. 뒷산에 있는 절에 사는 스님이 자주 해주시는 이야기이다. 놀겠답시고 산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믿지 않지만, 아직 어린 은하를 겁주기엔 좋겠지.

“산에는 괴물이 산다니까?”

“나 이제 그런 거 안 믿어.”

은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작년까진 통했던 괴담이었는데 올해는 얘도 많은 걸 알게 됐나 보다.

“그런 거 아니어도. 가다가 멧돼지를 만날 수도 있다고. 나도 옛날에 본 적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쫓아내 준 적 있단 말이야.”

은하가 멧돼지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어 말을 꺼냈다.

나는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멧돼지와 마주친 것은 9살 때였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 때,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다.

“멧돼지 없어. 난 한번도 본 적 없어.”

사촌은 단호하게 말했다.

체력이 약한 도시인은 등산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사촌 동생이 바락바락 우기다가 그럼 혼자 가겠다고 선언하자, 끌려가는 기분으로 따라갔다.
혼자 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은 나였다.

등산을 시작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분명히 두 다리로 똑바로 걷던 나는 네발로 걷기 시작했다.

“여기야! 거의 다 왔어!”

은하가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앞에 개천이 있었다.
개천 가운데 있는 바위에 모자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촌스럽고 강렬한 분홍색 모자라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저런걸 누가 사준 건지.

“저걸 가져와 달라고?”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아이가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운 깊이였을 것이다.
저게 어쩌다 저기까지 떠내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몸이 점점 잠겼다.
발목에서 다리,
다리에서 허리,
허리에서 어깨,
어깨에서 목까지 잠기고 나서야 모자에 손이 닿았다.

바위에서 모자를 낚아채면서 개천 건너편에 검은 뱀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저 거대하고 아름다운 뱀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바다야, 그곳에는 사람을 죽이는 구렁이가 살아.’

왜 하필 그 이야기가 떠올랐을까?
갑자기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걸음질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바위 아래에 발목이 걸렸다. 내 머리가 물속에 잠겼다. 빨리 발을 빼고 싶었지만,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헛발질을 하면서도 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뱀은 천천히 움직이더니 수풀 속으로 숨었다.

수풀 속에서 인영이 나타났다.
그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올 수록 구체적인 형태가 보였다.
길게 늘어뜨린 하얀 머리와 하얀 소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가슴팍에 붙은 부적이 보였다.

그것이 가까이 올수록 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나는 머리까지 오는 수심에서도 그 사람한테는 가슴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가까이 오자 나는 그 사람의 머리채를 잡았다.
얼른 물 밖으로 빠져나가 살고 싶었다.

“너 미쳤어?”

물속에서 흐릿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내 멱살을 잡아서 나를 들어 올렸다.
바위에 걸려있던 발이 신기할 정도로 쉽게 빠졌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백발이라 멀리서 봤을 땐 노인 같았지만, 얼굴을 보면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략 20살 정도로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구렁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그것이 나를 내려다보자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산발로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단정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키도 몸집도 거대한 사람이었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오밀조밀해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방금까지 반쯤 감겨있던 눈이 커졌다.
그렇게까지 뚫어져라 볼 필요는 없잖아.
어쩐지 호승심이 생겨서 나도 눈을 부릅떴다.

"뭐야, 그 애인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사람은 뒤돌아서서 걸어갔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뒷모습이 멀어지는 속도도 빠르다.
이런걸 원한게 아닌데.

"어, 언니!"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일단 불러세웠다.
하지만 상대는 멈추지 않았다.

"어, 언니 처음 보는데, 이름이 뭐예요?"

이름만 알아내도 누군지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큰 마을이 아니니까 누군가는 그 이름을 알거야.

다행히도 그 사람은 잠깐 발을 멈추고 고개만 뒤로 돌려 나를 보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을 들려줬다.

"우솔이야."

우솔.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 커다란 덩치에 이런 귀여운 이름은 좀 어색하다.

그 사람은 서서히 멀어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숲 속에서 나타났을 때처럼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된거지?

“언니?”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은하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

은하의 말에 의하면, 나는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난 혼자서 말한 기억이 없다.

내 앞에는 ‘우솔’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못 봤다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우솔'이라는 인물에 대해 물었지만, 은하는 아는게 없었다.
한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인 시골에서 저 사람에 대해 아는게 없다고?
그것도 저렇게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큰 여자에 대해?

아니지. 은하는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직접 알아보면 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뭐.

은하가 내 손에 있는 모자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은하에게 모자를 씌워주었다.

촌스러운 모자였지만, 어린 아이가 쓰니까 그럭저럭 귀엽다.

“언니, 이거 먹어. 고마워서 주는 거야!”

은하가 패딩 주머니를 뒤지더니 쭈뼛거리며 껌을 내밀었다.

‘만화 풍선’이라고 적혀있었다. 껌 5개와 껌이랑 똑같은 크기의 만화책 한 권이 있었다. 만화책과 껌 한 개를 은하에게 주고, 나도 껌 하나를 뜯어서 입에 넣었다.

이런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니.

주머니 안이 따뜻했던건지 껌은 물렁물렁하게 녹아있었다.

“그 모자는 어디서 났어?”

그 못생긴 모자를 대체 어디서 구한거냐?

비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질문을 던졌다.

이런걸 왜 그렇게 열심히 쓰고 다니는거야.

“저번에 엄마가 사줬어.”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은하와 손을 잡고 어색하게 하산했다.

“바다야?”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내려오는 길에 옛날 친구를 만났다.

이름은 최성찬.

이 근방 남자아이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이유로 꽃미남 취급받는 존재이다.

미남? 납득할 수 없다. 그냥 눈이 좀 크고 호감상일 뿐이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특히 하얀 피부를 칭찬했다.

원래 색이 옅게 태어났는지, 머리카락도 눈도 갈색이었다.

저 애는 종종 ‘튀기같다’는 말을 듣는다.

칭찬인건 알지만,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 의도야 어찌 됐든 잡종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성찬은 그런 말을 웃으며 넘겼다.

칭찬을 고마워하고, 약간의 자기비하를 섞은 겸손을 떨면서.

성찬은 그런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착한 아이.

그래서 나는 최성찬이 늘 불편했다.

“오랜만이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긴 왜 왔어?”

왜 왔냐니. 몰라서 물어?

따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화낼 필요 없다. 진짜로 몰라서 묻는걸지도 몰라.

“방학이라서 놀러온거지. 왜 물어봐?”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말투가 날카로웠다.

이러려던게 아닌데.

“넌 나랑 안 맞는거 같다.”

“그래? 나는 너 마음에 드는데.”

부끄러워 하기는.

성격은 나랑 안 맞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면 재밌다.

“이 동네에 190정도 되는 여자가 있어?”

잊어버릴 뻔했다.

오늘 마주치는 사람에게 우솔이라는 여자에 대해 물어보려 했었지.

“아니. 그렇게 큰 여자는 본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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