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
프로메어/NCP
오전 10시 26분.
전 매드 버니시의 리더, 리오 포티아가 프로메폴리스 번화가 대로 중앙에서 쓰러진 시각이다.
정오를 막 앞둔 태양은 하늘을 불태우고 이제 막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거리에는 시민들이 북적이고 있다. 버닝 레스큐의 신규 인력으로 입사한 그가 막내라는 이유로 도맡은 심부름의 내용물인 커피 캐리어가 바닥을 나뒹군다. 사방으로 쏟아진 룽고 커피의 씁쓸한 모카 향과 산산히 깨진 얼음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채 보도블럭 사이로 스며든다. 오로지 그 광경이 주는 지독한 안타까움이 군중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는 점은 분명 리오 포티아가 가진 행운이었을 것이다.
비명, 고함, 휴대전화의 신호음.
혼란 속에서도 대응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해, 역사에 길이 남을 규모로 이루어진 버닝 레스큐의 활약 덕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간단한 응급처치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입시키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차치하고서도 쓰러진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시민의식이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훈장처럼 자리잡았던 덕에 사람들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적극적인 시민 몇몇은 구급대에 연락을 넣는다. 보다 적극적인 시민들은 이미 다가와 가슴팍 중앙을 힘껏 압박한다. 기본적인 응급처치 지식의 보급은 이렇듯 필연적으로 사람을 살리곤 한다.
혹여 그 외에 더 적극적인 규명의 이유가 있다면, 여기에 쓰러진 그가 리오 포티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리오는 프로메폴리스 시민 사이에 얼굴이 팔릴대로 팔린 매드 버니시의 전 리더이자 포사이트 재단이 일으킨 국지적 재난사태에 맞선 인물로써 언론사에 의해 고조적으로 대서특필된 일종의 셀럽 같은 위치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한낮에 대로변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이 주는 국지적 충격은 대중의 주도적인 구호 행위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심정지까지 골든 타임 4분. 응급 처치와 빠르게 도착한 신고를 받은 버닝 레스큐가 긴급 출동으로 현장에 도착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행정구역과 출동 매뉴얼로 관리된 인명 구조 시스템이 단축해낸 쾌거였다. 곧 현장에 도착한 응급의료차량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바삐 움직인다. 의료 시트에 실린 손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 누구도 실려온 상대가 리오 포티아라는 것에 당황하지 않는다. 루치아! 새된 외침에 늘상 능글거리는 어조로 대꾸하곤 했던 자그마한 과학자의 대답은 이런 순간만큼은 진중하여 믿음직스러운 것이 된다. 옙, 준비됐습죠. 하얀 가운이 팔락인다. 응급 현장을 대비한 자동심장제세동기를 가슴팍에 붙인 레미가 침착하게 카운트를 센다.
하나, 둘, 셋. 공급된 전력이 강한 전류를 심장에 통과시킨다. 벨트로 고정된 몸이 덜컥 튀어오른다. 다시 하나, 둘. 애처롭게 마른 몸이 처참할 정도로 들썩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다. 아는 얼굴이 늘어진 채 실려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고 해도. 동요는 실수와 유착되어 곧 죽음과 직결되는 문제를 일으키니까. 침묵과 다가오는 죽음 앞에 덤덤한 혈투를 벌이는 이들 사이에서는 전운이 감돈다.
그래. 확실히 리오 포티아는 운이 좋은 편이다. 빠른 응급처치와 적합한 대처로 병원까지 환자가 무사히 옮겨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 아마도 비상의료설비에 대한 좋은 사례로 남을 터였다. 거리마다 설치된 제세동기같은 것들이 예산 낭비라고 끈질기게 기안서를 올리는 몇몇 정치인들이나 안전불감증에 걸려 현장 실무자들의 보고서를 족족 반려시키는 윗선을 설득하기에 좋은 미담으로 남을 정도의.
물론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상황이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편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소생 처치를 이어가며 리오 포티아는 프로메폴리스 응급의료센터로 옮겨진다.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버니시로 각성함과 동시에 사회적 신분이 말소된 상태이고, 모든 전 버니시 피해 대상자가 그렇듯 법적 보호자가 부재하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로 그 법적인 보호자의 신분을 맡은 버닝 레스큐의 대장 이그니스는 눈 앞의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 설명을 들어둬야 하는, 리오 포티아의 동거인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남자의 입맛을 더없이 씁쓸하게 만든다. 마시지도 못한 모카 룽고 커피처럼. 그 애한테 커피 심부름 같은 걸 시키지 말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그니스는 문득 그런 후회를 떠올렸다.
오전 11시 48분.
갈로 티모스가 힘차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그 청년의 과장되게 힘이 들어간 태도와 시원시원한 어조는 보는 사람의 기운을 북돋기 위한 일종의 쇼맨십이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막 복귀했습죠, 히야. 이번엔 정말 너무했어요, 대장~ 백업도 늦고 무슨 일이었습니까, 대체?”
그러나 오늘만큼은 갈로의 활기참에 화답할 이가 없다. 막 긴급 화재 현장에서 복귀한 갈로 티모스는 그러나 그 순간, 서내에 감도는 기민한 침묵을 감지하고 입가의 웃음기를 천천히 지운다. 리오 포티아가 자리에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팀플레이를 기본 전제로 한다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인력 수급 문제로 개별 긴급 출동이 잦은 버닝 레스큐의 서내에 사람 한 둘쯤 빈자리가 눈에 띄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긴 휴지에 대한 온당한 응답이 될 수 없다.
“갈로.”
루치아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내심 그들 중 가장 이 방면의 전문적 지식이 깊은 루치아가 상황을 대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인다. 미간을 찡그린 조그마한 과학자는 의사로부터 받은 소견서를 떠올리며 몇 가지 문장을 조합하려 애를 썼다. 혀 끝으로, 말을 자아내는, 비상벨은 타이밍 좋게 그 순간 울린다.
긴급 출동을 요청하는 알림이다. 갈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이그니스가 말한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것이 명백한 회피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더는 캐물을 기분이 들지 않았던 갈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엄습해오는 불안과 나쁜 쪽으로 돌기 시작한 상상력이 제멋대로 질주한다. 그런데 리오는요? 커피 사온다고 나가지 않았어요? 발랄하게 머리 한 구석을 맴돌던 그 물음을 꺼내지 않은 이유야말로 짐작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마는 두려움을 외면하는 까닭이었기에.
▽
속칭, ‘버니시 사태’ 로 불리는 일련의 사건의 종결 이후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정관 크레이 포사이트를 비롯한 임원진이 대규모 구속된 이후 포사이트 재단의 규모는 현격히 축소화가 이루어져 관련 피해 복구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그 재단의 기금으로부터 파생된 기관의 정식 명칭은 국제 염상발현후속환자 재활 센터. 국제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버니시 피해자들의 후속 조치 및 금전적, 의료적, 정신적 케어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현재 포사이트 재단이 남긴 기금의 약 5할 정도가 센터의 운영에 쓰이고 있었다.
현 시점까지도 사회적 시선과 파장을 두려워하여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은거 중인 버니시들의 소재를 파악하거나, 파르나소스 호의 동력으로 쓰인 버니시의 건강 상태 등을 정밀히 체크할 수 있다는 것도 센터의 역할 중 하나였다. 그 중 검증되지 않은 인체 실험을 통한 동력원이 신체에 어떤 악영향을 남겼을지의 여부 역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사람을 산제물로 삼아 이륙하려 든 방주에 오직 1만명의 인원만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여론을 버니시의 편으로 만들었다. 역겨운 일이지만 필요한 절차였다. 교육, 재취업, 심리 상담, 그 외 모든 상황을 망라하여 케어를 돕는 것을 전제로 설립된 센터에 그만큼의 자본이 투자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재단의 뒷처리를 위한 기관은 처음 설립되었던 당시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설이었던 시절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피해자의 케어를 도맡은 사회적 기관으로 세간에 받아들여지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당사자들로써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문답무용으로 수갑을 차고 수용소에 처넣어지고, 믿었던 지인에게 신고당하고, 숨어 살던 도중 발각당해 붙들려 끌려가는 일들을 오랫동안 반복했던 자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하지 않기도 어려웠다.
리오 포티아는 포사이트 재단의 시설과 자금에서 기인한 센터의 자립에 대한 이들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 갖은 애를 쓴 사람 중 하나였다. 연쇄적 염상발현 현상이 종결지어졌다 한들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패인 골은 저절로 메워지지 않는 법이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요? 울분에 찬 목소리는 그럼에도 이 사회에서 늘 소수이다. 리오는 그런 이들을 독려하여 센터로 보내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를 향해 배신감을 터트리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누그러트리고, 온전히 그들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세상은 변할 거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버니시들 앞에서 리오 포티아가 선언한 그 말의 무게는 어떠하였던가. 여러 차례 건의가 들어간 안건이 내부에서 검토되어 버니시였던 당사자들이 센터의 실무 인력으로 직접 투입되었다. 그게 단순한 구색 맞추기건, 진심을 다하겠다는 암묵적 선언을 대신한 행위이건 간에 인력 증원의 퍼포먼스로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30년간 꾸준히 쌓인 적대감과 날카로운 태도를 누그러트리는 기조를 생성하기에도 썩 적합한 타이밍이었다. 사람의 증오라는 것은 쉬이 누그러지지 않지만, 또 어떤 문제는 단지 신경을 써준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음이 풀릴 때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센터 앞을 지날 때마다 침을 뱉는 사람들 역시 아직까지 분명 존재한다. 개 같은 새끼들. 치밀어오르는 분을 굳이 삭이지 않으면서. 전 매드 버니시의 간부였던 게라와 메이스는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오늘도 정기적 검진을 받고 나오는 길이다. 팔뚝에 바늘 덕지덕지 꽂히는 기분 정말 최악이야. 그렇지. 연구원이라는 놈들은 항상 음험하고. 어제는 담배를 줄이라는 연락을 휴대전화로 넣더라니깐. 이야, 감시 카메라라도 붙였나? 길에서 꼴까닥 뒈지기라도 하면 지들 체면이라도 상한다 이거야? 사회적 안전망 밖에서 오랫동안 헤메던 이들답게 정제되지 않은 날날 것 감정이 담건 언사는 경박하게 튀어나온다.
그들을 걱정하고, 챙기고, 일일히 안부를 묻는 역할을 전담해온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다. 바로 그 사람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이딴 곳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건 분명 리오 포티아가 원하던 일이었으니까. 비록 거기에 들인 기금이라는 것이 버니시의 피로 쌓은 부와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할지라도… 바로 그 이유로 게라와 메이스는 연신 툴툴대면서도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건강 체크에, 생활 지원? 재취업 프로그램? 뭐 이딴 병신 같은 제도가 다 있냐.”
게라가 볼멘소리를 지껄였다. 누가 이딴 거 해 달라고 빌었냐고, 같은 말이 당연히 뒤따라올 상황임에도 메이스는 침묵을 지킨다.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사람들을 위한 묵념이다. 사회적으로 버니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그들의 삶을 보장받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이후의 삶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정작 리오 포티아 본인은, 전 버니시 피해자들을 독려하면서도 본인은 ‘필요 없다’는 말로 일축해가며 재단에서 검진 한 번을 받은 기록이 없다. 그가 어떤 기분으로 수많은 요청을 거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게라와 메이스는 이따금 보스의 결벽적인 태도에 숙연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 우회적인 시위의 표명에 동참하고자 의사를 밝혔던 날 리오는 부드럽게 웃더니 너희를 위해 만든 거야, 하고 어깨를 짚어가며 권유하는 것이었다.
책임이라는 것은 때로 그런 결과를 낳는다.
차마 그런 표정을 짓는 보스 앞에서 거절의 의사를 밝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키지 않더라도, 못마땅하더라도. 가진 자들이 베푸는 시혜가 역겹게 느껴지더라도.
찌르르르-
휴대전화에서 수신음이 울린다. 또 그 엿같은 알람시계 울리는 시간이냐, 하고 중얼대며 꺼내든 화면의 액정 메시지에는 알림 문자 대신에 긴급 연락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순간 사고가 정지한다.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기분, 세상이 온통 표백되는 감각에 두 사람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불합리함, 거짓말 같은 비현실감, 꿈을 꾸는 듯 붕 뜬 감각 속에서 문자가 가리키는 뜻은 명백했다. ‘리오 포티아/오전 10:47. 상태 위독, 긴급 확인 요망.’
위치는 그들이 떠난지 반 시간가량 지난 염상발현후속환자 재활 센터로 지정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핏기 없이 하얗던 낯빛이 삽시간에 창백해진다. 게라와 메이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렸다. 보스! 완연히 겁에 질린 목소리는 상실의 무게를 가늠한 사람들의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억지로 움직인다. 가장 끔찍했던 순간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듯 잔상처럼 일렁인다.
포트에 갇혀 있던 시간이 영혼에 새긴 상흔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흩날리던 재의 냄새가 결코 잊히지 않듯. 그들의 나약해진 손 끝이 이제 더는 불꽃을 자아내지 못한다 해도. 예전처럼 멋대로 황야를 누비는 무법자가 아니라고 해도. 대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오토바이를 몰고 다닐 수도 없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불길과 함께 사그라졌다고 한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정말 다 끝났다면, 정말로 다 끝난 일이라면 그들은 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게라와 메이스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 같은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도 되었을 텐데. 적어도 그들의 리오 포티아는, 이 세상 누구보다 그럴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일 터인데.
▽
의료 기구가 연결된 장치는 바이오 리듬을 일정 주기로 스크린 판에 표시하고 있다. 오직 그 액정으로 비추는 화면만이 눈을 감은 채 말없는 이의 생존을 증거한다. 호흡기에 덕지덕지 붙은 장비들은 급조된 티를 숨기지 않은 채 병원 침대의 시트 위로 불룩불룩 솟아있다. 긴급하게 연결된 조악한 설비였다.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목이 메여 뒷말을 잇지 못하는 갈로 티모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여자의 이름은 에리스 알데빗이다.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무겁다. 아무렴, 다섯 살 때부터 신동으로 자자하던 천재 과학자의 이름과 사람을 분쇄해가며 이룩한 기술로 오랫동안 성과를 거둔 사람들의 대표자의 이름이 같은 선상의 무게로 불리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파르나소스 호 개발팀의 중심인력이자 워프 엔진의 설계자인 에리스 알데빗 박사가, 본인의 전공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자리에 자리잡은 것은 오롯이 재단의 실험 피해자에 대한 사후 책임에 관해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에리스 알데빗은 그 총책임자의 자리를 수락함으로써 재판에서 제외되었다. 아무렴,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연구원이 의료 센터로 소속을 옮긴 것은 누가 본들 퍽 우스운 그림이 아닌가. 그것도 그녀가 연료삼아 불태웠던 버니시를 전담하는 자리라니 못매를 맞기에도 적당한 자리였다. 정부의 총알받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세운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센터의 설립 배경에 그 이념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크레이 포사이트를 반대하지 못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는, 에리스의 개인적인 속내를 알고 있는 상대는 세상에 아직까지 아이나 알데빗 한 사람뿐이다.
프로메어가 세상에서 사라진 이래, 에리스는 30년간 가장 부진했던 분야의 연구 기록을 통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을 모으고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프로메어와 공명한 인간의 몸에 프로메테크 엔진이 남긴 흔적이 장기적으로 어떤 후유증을 유발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어떤 인본주의적 긍지나 이타심 탓은 아니었다. 다만, 동생에게 부끄러운 언니로 남지 않기 위해서. 알데빗이라는 이름 위에 덧씌워질 오명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 그녀의 동생처럼, 그녀도 사람을 살려내 보이겠다고.
모든 연구의 기반은 데이터다. 유능한 연구원인 에리스 알데빗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다. 3년간 기록된 데이터들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단기적 무기 동력 엔진과의 결합은 생물체에 치명적이며, 그것은 염상발현질환자-버니시로 명명된 프로메어와의 공명도가 높은 인류에게 잠시 주어졌던 재생력을 상회하여 몸을 갉아먹는다.
따라서 모든 버니시가 재생력을 잃은 현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치사율은 시시각각 높아진다.
물론 에리스는 다섯 살 때부터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던 우수한 연구자다. 많은 데이터의 종합과 시행착오를 겪은 약물의 임상실험을 통해 부작용은 거의 극복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상기한 대로 데이터의 문제이다.
“리오 포티아 군은 3년 전… 프로메테크 엔진의 코어로 직접 기동되었던 적이 있지.”
“… ….”
기억한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이 문자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지던 순간을. 그 상황에서 리오를 긴급하게 구명한 것은 전적으로 갈로 티모스의 공이다. 놀라운 소방관 정신과 모종의 기적이 겹쳐 리오는 생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계를 구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종결된 일인 것이다. 그 과정이 지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없어야만 하는데.
“지금까지 개발된 신약은, 인체에 가해진 간접적인 과부하를 멈추는 것을 전제로 개발되었어. 프로메테크 엔진을 한번 기동시키기 위해 투입된 버니시의 추산 인구는 약 6,217명이야. 그러니까, 그들 각자가 부담을 나눠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에 미친 부하가 계측된 신체 붕괴의 기준치보다 낮았어.”
“리오는….”
“그런 엔진의 코어에 연결된 상태로 감당했을 부하는, 설령 그 동기화 시간이 아주 일시적이라고 해도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어. 3년씩이나 흘렀다면 지금까지 징후를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착잡하게 말을 끝맺은 에리스의 시선이 침대 위를 향한다. 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가며 센터로 이끌었던 장본인이 정작 본인의 신체에는 단 한번도 바늘을 대지 않았다. 모순적이라고 해도 좋을 태도를 꿋꿋이 견지했다. 크레이 포사이트의 돈을 쓰라고?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날, 참지 못하고 내보인 그 섬세한 증오 속에는 영구한 동력처럼 새겨진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지독한 감정이.
엔진 후유증을 앓는 이들 중 리오 포티아의 예후가 가장 좋지 않을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더 권유하지 못한 것은, 그 갈무리된 슬픔을 그녀로서는 책임질 수 없었던 탓이다. 도망치고 외면하면 없는 일이 될 것도 같았던 탓이다. 언젠가는 잊힐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탓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동생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조직 붕괴만은 막았지만 이미 주요 기관이 활동을 정지하기 시작해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장기의 괴사를 간신히 막고 있을 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어떻게 살아있는지 과학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 상태야.”
“그렇군요.”
말이 문장이 되지 않은 채 분열된 낱말로 입 안을 빙빙 맴도는 것을 느끼며 갈로가 대꾸했다. 맴돌이치는 말, 건조한 언어. 의미가 없는 단어들. 이제는 제 것이 아닌 감정들. 그렇군요. 뭐가 그렇단 말인가? 에리스가 행간에 생략한, 그 소리없는 후회를 갈로는 그러나 기민하게 눈치챈다. 같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한번이라도, 그래, 눈치채서,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런 감정은 갈로 티모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리오가 정신을 차린다면 분명 한심하게 여길 것이다. 선택도 결과도 오롯이 내 책임인데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나. 금방이라도 쓴웃음과 함께 타박이 날아올 것 같은데, 응답은 없고, 그의 손에 쥐여진 것은 침묵뿐이다. 갈로는 내심 생각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순간도 있구나.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지금 네가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는데, 고작 이런, 고작 이 정도의…
“보스! 보스는 어떻게 된 건데!”
“씨발, 이 정신 나간 새끼들이 관계자고 나발이고 길을 막잖아. 급하니까 저리 비켜!”
급작스레 소란스러워진 바깥을 흘끔 내다본 에리스가 손짓하자 도어 록의 잠금 장치가 해제된다.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지듯 엎어진 두 사람 역시 익히 아는 얼굴이다.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지만 도무지 웃을 수가 없다. 절박한 표정을 지은 그들은 매드 버니시의… 리오의 동료들이다. 세상에서 리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갈로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게라, 그리고 메이스였나.
“소방관 형씨? 당신이 대답 좀 해 봐! 지금 보스가 왜 여기 누워 있어야 하냐고!”
넋을 놓은 표정으로 갈로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루치아가 입을 열었던 순간 소방서 내에 감돌았던 정적을 갈로는 이제 이해했다. 리오가 죽는다고,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차마 입에 담기가 싫었던 것이다.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 앞에서.
“리오는….”
단어를, 언어를, 문장을 고른다. 절망을 전염시켜야만 하는 그 순간은 자체로 폭력이 된다. 설령 입 밖으로 문장이 맺히지 않았다고 해도.
“어이… 잠깐만. 형씨, 표정이 왜 그래. 응? 왜.”
맥락도 없이 사정을 이해하게 만드는 착잡한 표정 앞에 그들은 망연자실하게 무릎을 꿇는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헛웃음이 가시고 나자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빌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들. “잠깐만. 형씨. 형씨, 대답 좀 해달라니까. 보스를 구해줘. 처음도 아니잖아.” “그래, 형씨가 우리 모두 살려줬잖아. 박사님! 저희가 지금까지 불평불만 쏟아낸 것 정말 미안합니다.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저희 몸으로 실험도 하고, 예, 이렇게, 어떻게든… 상관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가면 안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웅웅거리는 말들. 사람이 죽는 현장에 따라오는 애원들.
그것은 갈로 티모스에게 익숙한 울부짖음이다.
다만 그 비명과 절규는, 어디까지나 급작스러운 재해 현장에서 외치는 비명의 편린들이었다. 불꽃이 타오르고, 건물이 무너지고,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서. 갈로는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가장 든든한 방파제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괜찮아. 이 몸이 어떻게든 해줄게. 튀는 불똥도 전부 막아준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창백하게 굳은 이의 침묵 앞에 곧 짐승 같은 울음이 터져나온다. 잘못했으니까 어떻게 좀 해달라고, 그런 절규를 듣고 있음에도.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느린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는지 그는 아직 모른다. 리오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눈 앞이 새하얘지고 발 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집이 불타던 날, 어떤 남자의 품에 달려가 안겼던 무력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 무기력함. 어떻게든, 대처를…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내가 최선을 다할 테니까… 조금도 사람을 안심시키지 못할 말이란 걸 알면서도 갈로는 기계적으로 그런 말을 읊는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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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시간이 종료되었다.
갈로 티모스가 마지막에 두서없이 늘어놓은 말들 중 어떤 이름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 까닭으로, 에리스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잡아든다. 이 방식이 통할지 어떨지는 모른다. 설득할 말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예. 에리스 알데빗입니다. 프로메폴리스… 형무소로. 크레이 포사이트에게… 연결 부탁드립니다. 긴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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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질감이 좋지 않은 싸구려 죄수복에 아무렇게나 새겨진 죄수번호와 달리 남자에게 주어진 환경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감자의 인권적 대우에 대한 논의가 인류를 진보시킨 덕에 크레이 포사이트는 그가 형무소로 몰아넣었던 버니시들에 비한다면 확실히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사실에 본인이 만족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이런 환경을 기자들에게 말이라도 흘릴라 치면 아마, 그래. 난리가 나지 않을까. 이따금 크레이는 그런 자기파괴적인 생각에 몰두한다. 끌려나와 빛 앞에서 날달걀을 얻어맞고 군중에게 지탄받는-아직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상상 속에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그를 비난하는 군중 사이로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파란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크레이는 그 미소를 떠올리는 매 순간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오랫동안 그를 지배해온 분노였다. 갈로 티모스. 진작에 죽었어야지. 왜 살아남아서 내 속을 이렇게 불태우는 거냐? 그러나 또한 자문한다. 그 애를 왜 불태우지 못한 건지. 왜 진작에 적극적으로 죽여 없앤다는 방식을 택하지 못한 것인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보면 속이 끓어오르는 감각이 되살아난다. 프로메어라는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가 떠났든 어쩌든 그의 심장 어귀에는 여전히 타오르는 불씨가 남아있다. 묵은 감정을 매개로 타오르는 불꽃이.
그런 그에게 면회를 청하는 이는 언제나 정해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던 상대를 길게는 일주일에 한 번, 짧게는 나흘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크레이 포사이트에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외부 면회가 가능할 정도로 수감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형무소보다 갈로 티모스의 면회가 불가능한 북쪽의 험난한 특수격리형무소를 택할 것이다.
다만 그 날 그에게 걸려온 특수 회선의 전화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이것이 허락된 이유는 그가 포사이트 재단의 대표이자 전 사정관이기 때문이다-그가 그토록 미워해 마지않는 갈로 티모스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크레이에게 조금의 망설임을 만들었다. 물론 회선을 통해 전달된 내용과는 조금도 관계없는 망설임이었다.
“과연, 그런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로군.”
-크레이.
“속죄랍시고 열심히 뛰어다닌 자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네. 내게 그럴 자격이라도 줄 지 모르겠군. 하, 언론이 제법 재미를 보겠어.”
-크레이.
여자의 목소리는 어떤 종류의 체념에 가깝게 전달되었다. 크레이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그 만족감을 향한 뿌리깊은 자기혐오 역시 그의 속에서 번뇌처럼 들끓었다. 제게 주어진 역할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거짓말처럼 항상 이 꼴이다.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제 삶의 굴레를 재는 천칭 바깥에 지독하게 무거운 추를 걸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크레이 포사이트라는 인간의 인생을 통째로 조롱하고 싶을 정도로 그를 미워하거나.
-당신은 정말로 두렵지 않아?
“뭐가 말인가?”
-언젠가 당신이 용서를 빌고 싶어졌을 때, 그 용서를 청할 대상이 없어진 순간이.
그래, 에리스 알데빗에게 이런 말을 듣게 만들 정도라면.
“그런 것을 두려워할 리가 없지 않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에리스 박사. 자네의 몇 안되는 장점이라고는 연구 실적과 이성적인 사고방식 정도였는데, 얼간이 집단과 어울려 다니더니 그마저도 못 써먹게 되었군. 실로 유감스러워. 하긴, 그러니 나를 배신했겠지. 그렇지 않나? 아니, 이건 자네가 현명했던 것인가? 크레이 포사이트는 결국 오물을 뒤집어쓴 채 감옥에 처박히고, 자네가 택한 얼간이들이야말로 인류의 영웅이 되어 승승장구하니 말이야. 정말 웃기는군, 얼치기 소방관과 염상 테러리스트가 인류의 영웅? 날더러 그 애새끼를 살려낼 방법을 찾아보라고? 자네에게 코미디에 재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감정이 격양된 말꼬리의 끝은 거의 격정에 치닫아 외치다시피 솟구쳐 올라갔다. 내가 왜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표정이 울음도 웃음도 아닌 기묘한 각도로 일그러졌다. 크레이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쇳소리가 섞인 울림이 텅 빈 독방에 메아리친다.
정말이지 한 편의 근사한 희극처럼 짜인 판이다!
그의 계획을 망쳐버린 애새끼들, 위대한 대탈출의 구조 플랜을 흙발로 짓밟은 얼간이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모든 것들을 코웃음치며 부정한 멍청이들을 살리기 위해 나서라고? 웃기는 소리다. 이미 그 버러지같은 노예들을 살려낸답시고,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산산히 분해되어 나누어졌다. 평생을 인내하여 만든 결과물이 스스로의 충동도 참지 못한 얼간이들을 위해 소비되었다! 그것들은 수치화된 연료가 되어 인류의 밑거름으로 산화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그리고 설령, 그가 저 찌꺼기들에게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한들, 스승의 연구를 도둑질했을 뿐인 쓰레기가 대체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쓰레기같은 계획을 쓰레기같은 놈들에게 짓밟힌 가짜 연구자에게 뭘 더 바라는 것인가?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면 마음이 좀 편해?
“… ….”
-당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건 내가 알아. 버니시의 육체에 적합한 의수의 개발과 설계는 100% 당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오직 당신 혼자서 창안한 이론이었으니까. 우린 당신이 버니시라는 것도 몰랐지. 삼십 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이 학문에 권위자가 있다면 그건 당신일 수밖에 없어.
“… ….”
-당신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지. 매스컴에서 얻어맞던 이미지도 개선하고, 사회 환원을 통해 형량도 줄이고, 번듯한 모습으로 방송이나 몇 번 찍어. 진정한 화해를 바란다고. 당신이 잘 하는 일이잖아.
“역겹군.”
-당신만 하겠어? 그래, 이 말은 꼭 전해둘게. 갈로가 당신에게 간다는 것을 내가 마지막에 막았어. 나한테 조금이라도 고맙다면 머리 식히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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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35분.
전 프로메폴리스 사정관, 크레이 포사이트는 한시적 특별 허가를 받아 리오 포티아의 수술실에 입회했다.
수감자의 운반은 기밀리에 진행되었다. 언론에는 시술 진행이 끝난 후 단계별로 노출시킬 예정으로 암묵적인 엠바고가 성립된 상황이다. 이 순간 크레이 포사이트는 세상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데우스 박사를 총으로 쏜 순간의 감각을 생각했다. 그는 살인자, 거짓말쟁이, 기만자, 악당 중의 악당이다. 수술실 같은 곳에 두면 안 될 부류의 악한 중 1순위이다. 멍청하게 감옥에 처박혀서 사람의 신체기관에 삽입하는 보조 장기를 이유도 없이 설계해둔 얼간이이다.
에리스의 말이 옳다. 버니시 연구학의 권위자는 데우스 박사일지언정 그들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의학에 관련하여서는 크레이 포사이트가 유일한 이론의 제창자일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박사는 발화충동 한 번을 느끼지 못한 좆같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왜 그런 것들을 만들었을까. 크레이 포사이트는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은, 증오하고 부정하고 숨긴다 한들 역시 버니시였다. 그의 몸에도 응당 당연한 부작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우주 기관에서 폭주가 발생할 경우의 대비책과 연소된 신체기관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해서 연구했을 뿐이다. 비록 그 계획이 좌절되었다 할지라도.
따라서 이 수술에 입회하는 조건으로 크레이 포사이트가 내걸었던 유일한 요구는 그에게 내려진 형량의 경감도 매스컴의 긍정적인 신호에 대한 여론 조작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갈로 티모스가 입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 소식을 들은 갈로 놈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릴 정도로 고역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술대에 누운 소년의 가지런한 몸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에서 큰 차이가 없다. 징그러울 정도로 그대로였다. 크레이 포사이트의 눈에는 그저 살아있는 동력원으로 보였던, 지금도 그 시각은 그대로이건만.
“혈액의 여과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개복 수술은 단시간 내에 진행되어야 할 듯합니다.”
“매스, 이쪽으로.”
“석션.”
“바이탈 체크. 장기의 괴사 상태에 비해 혈압이 생각보다 안정적입니다.”
“씨라인 잡아.”
하얀 피부 위를 가르는 칼날은 크레이 포사이트의 삶에서 상상하지 못한 어떤 심볼이다. 외과적 처치를 제의한 것이 자신이라고 해도 고작 십대 후반 남짓 보이는 어린애의 몸을 째고 가르고 기계장치를 삽입하는 과정의 적나라함은 그게 엄연한 생물체임을 실감하게 했다. 이 장소, 이 순간 그는 철저한 제삼자의 입장이 된다. 관객의 시점이나 다를 바 없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그에게서 비롯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멍한 시선으로 크레이 포사이트는 생각한다. 한때 저 몸에는 피 대신 불꽃이 흘렀을 터였는데. 그것은 사람이 아닐 터였는데.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그는 정말로 인간인가? 버니시는 정말로 인간인가? 쨍그랑, 시술 도구가 쟁반 위를 날카롭게 구르는 소리. 그의 설계로 이루어진 병실이건만 그는 이제 자신이 완전한 부외자가 되었음을 느꼈다.
아, 이토록 익숙한 감각이라니.
그의 인생의 시계가 멈추었던 날.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던 날. 세상과 운명에 기만당한 날. 그 때 저것은 크레이 포사이트를 죽이려 했었고, 크레이 포사이트는 저것을 죽이려 했었다. 거의 죽일 뻔했었다. 눈 앞이 아득해지는 감각에 그는 천장을 응시한다. 호흡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낀다. 수술을 집도하는 다섯 명의 집도의가 전부 갈로 티모스로 보였다. 여기도 갈로 티모스, 저기도 갈로 티모스, 사람 살리는 것에 목숨 걸고 눈이 벌개져서 달려드는 병신들, 치밀어오르는 토기…
“개복 닫습니다. 크레이 씨, 지금 장치 동기화를.”
그의 손에 쥐여지는 장치를 들자 뇌에서 멋대로 보낸 전기신호가 프로그램을 조작한다. 화면을 가득 메운 녹색 숫자들. 정상적인 동기화를 의미하는 기호들. 삐- 울리는 이명과 사람들의 환호성.
“호흡 및 맥박 확인하였습니다. 바이탈 수치, 정상입니다.”
끔찍하게도, 선고처럼 다가오는 그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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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면회도 가능하다구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병실 앞을 서성이던 갈로 티모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온 얼굴 근육을 다 써서 기쁨을 표현하는 청년은 지나가는 복도의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 순수한 기쁨은 사람을 호응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기쁨에 들뜬 갈로가 루치아와 레미를 한번에 얼싸안고 기쁨의 삼바 댄스를 추기 직전, 버닝 레스큐의 위신을 어느 정도 지킬 의무가 있는 이그니스가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갈로.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적당히 해라.”
“네, 대장. 정말 잘됐어요. 그렇죠? 너무 다행입니다. 리오 녀석, 돌아오면 꼭 장기 결근계 받아야지. 정말 다행이예요. 정말로 다행이다, 정말로.”
연신 그렇게 중얼거리는 얼굴에는 뭇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환희가 가득하다. 게라와 메이스에게도 연락을 넣었으니 곧 도착할 거라며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갈로를 더는 제지하지 못한 이그니스는 멋적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그러나 역시 기쁨을 갈무리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아이나가 농담을 던졌다.
“퇴원 기념 파티랍시고 피잣집에 데려가는 건 아니지?”
“무슨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하고 그래, 아이나. …지금 그 표정은 또 뭐야, 설마 진짜 생각한 거냐?”
시시껄렁한 잡담들 사이에서 맥이 풀린 긴장의 끈과 되찾은 여유가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어진다. 설령 리오가 그들의 동료가 아니었다 한들 국가구명소방대인 버닝 레스큐의 입장에 있어서는 참으로 피가 말리는 일주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로변에서 쓰러진 전 매드 버니시 보스의 영상이 SNS 등지를 타고 여론을 폭발시키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안정시킨 현 정세가 대규모 시위를 통한 역변이 바로 코 앞에 다가온 순간 벌어진 아슬아슬한 수습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가뜩이나 속이 말이 아닐 대원들을 대신해 윗선의 온갖 헛소리를 집중 포화로 얻어맞아야 했던 이그니스야말로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 저 내일까지 휴가 냅니다. 리오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보여주고 싶거든요!”
갈로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에 들린 수술 합의서를 흔들었다. 이걸 보면 리오도 꼭 눈을 뜨고 싶어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챙겨둔 서류의 사본이었다. 리오 포티아는 법적 보호자가 부재하는 상황으로 응급 상황에서 시술에 동의 가능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로지 명목상으로 존재하는 수술 동의서에는 상단부터 적힌 이름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몇 페이지가 넘는 그 이름들은 갈로 티모스를 비롯한 버닝 레스큐 3번대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전부 한 때 버니시 마을에 머물렀던 사람들이었다. 리오가 지켜온 이름들이었다.
“분명 기뻐하겠지, 리오.”
“당연하지!”
내일 당장 의식을 찾으면 좋겠다던가 하는 소리를 해대며 싱글벙글 웃는 청년의 옆모습에 그림자는 없었다. 저기에 서명을 받던 순간에는 자존심이며 체면이며 내던지고 펑펑 울던 것은 기억조차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점마저 갈로 티모스다운 모습이라고 할 법했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가 소방대원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나저나 누구였을까. 익명의 기술 개발자를 통한 신식 개발 의료기기 투입으로 시술 성공… 크, 너무 멋있지 않냐? 버니시 후유증을 위해 비밀리에 이런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니… 우리가 아니여도 세상에 히어로는 있는 것 같고 가슴이 아주 뜨거워지는구만!”
그건 기사가 뜨는 순간 아마 세상에 너 빼고 모든 사람이 크레이 포사이트라는 걸 알 텐데. 모두의 마음 속에서 떠오른 한 문장 대신 순간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갈로는 항상 인간관계에 대한 감이 냉철할 정도로 좋았지만 꼭 이런 논제 앞에서는 한없이 청량한 바보가 되고는 했다. 굳이 설명할 의리도 그럴 필요도 없어서 레스큐 대원들은 침묵을 합의했다. ‘바보가 바보짓을 하는 건 세상이 평온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지.’
북적이는 소리가 멀어진다.
아직 면회를 허락받지 못한 병실 안쪽으로는 정갈한 흰 커튼이 흩날리고 있다. 가지런히 오르내리는 가슴팍은 안정적인 징후를 나타내는 긍정적 현상이다. 신체와 연결된 바이탈 사인 모니터에는 안정적인 수치가 반복된다. 침대 옆에는 인원 수 제한 탓에 미처 면회를 허락받지 못한 방문객들이 남겨두고 간 수천 마리의 종이학과 위문 편지 따위가 수북히 쌓여있다. 거기에는 감사와 염려와 진심 어린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들.
다리를 꼬고 앉은 크레이 포사이트는 그런 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단 한 순간도 바란 적이 없다. 그냥 천장을 한번 바라봤을 뿐이다. 지금도 시시각각 스스로가 병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면서. 복도를 울리는 갈로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애꿎은 청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빨리 꺼져. 멀리 꺼져.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이럴 줄 알았으면 조건으로 갈로 티모스의 면회 거부권을 요청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까짓 병신 짓을 백 번은 더 할 수 있는데 왜 그러지 않았더라….
크레이는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몇 번을 떠올려 봐도 좆같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너스콜을 사용해 의료진에게 보고를 마쳤다. 예후는 성공적이며, 자신은 오늘 저녁까지 다시 형무소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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