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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델금랑] 관종 금랑 (2020.03.24)

dnkb

Snapdragon by 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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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다." 

어린 시절부터 입에 붙은 이 말은 그저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그 허기는 처음 참가했던 챌린지에서 열광과 환호성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공허한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건 눈앞에 있는 저 금색 눈의 사자를 물어뜯어야만 채울 수 있다는걸. 

* * * 

배가 고프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먹을 걸 건네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팬이 선물이라며 준 수제 쿠키를 먹고 급성 복통에 구급차까지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 버릇이 여전하자 트레이너들은 팬에게 받은 간식은 반드시 가지고 와서 다 같이 상태를 확인하라는 규칙까지 만들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클짐에는 곳곳에 간식 바구니가 채워졌다. 금랑이 일을 하다 척추가 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의자에서 무너져 내리면 바구니에 담긴 소소한 간식거리를 챙겨 주는 게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과자부터 초콜릿이나 사탕까지 가리지 않고 맛있게 우물거리며 다시 기운 내보자며 서류를 붙들어 매는 모습에 눈치채지 못한 게 있다면 금랑이 스스로 바구니에 손을 대는 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채울 때뿐이라는 점이다.

굳이 따지자면 늘 배가 고프긴 했다. 키도 크고 머리도 몸도 잔뜩 써야 하는 일이다. 도저히 하루 권장 칼로리만으로 살아갈 만한 스케줄은 아니기에 다들 금랑의 식성에 기겁하면서도 이상한 의문을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먹는 거에 비해 살이 찌지 않아서 되려 걱정을 받기도 했다. 후드에 가려져서 그렇지 벗겨놓으면 얇은 손목만큼 가는 허리가 드러나기라도 하면 너나 할 거 없이 주머니에 간식이 없나 뒤져보기까지 한다.

그럴 때마다 금랑은 웃음이 났다. 아주 조금씩 배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입안이 달아지고 뱃속이 꾸물꾸물 차오르는 감각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포만감을 채워준다. 아무리 칼로리 높고 당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뭐 한가. 그 허기진 기분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를 향한 '관심'밖에 없으리라. 

설령 그게 사랑스럽고 따뜻한 관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다른 관장들과 달리 금랑은 SNS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았고 자연스럽게 노출수가 높아지고 관심이 커지면서 이른바 소위 악플이라는 전혀 영양가가 없는 메시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 빈도와 수위는 이제 팬들뿐만 아니라 금랑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마저 "이건 너무하지 않아?"하고 한마디 거드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주변에서 SNS를 좀 쉬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으나 금랑은 괜찮다고 했다. 실로 괜찮았으니까.

금랑은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전부 읽었다. 가끔 일부러 먹이를 던져주듯 답변을 달아주기도 했다. 그럼 예상대로 먹이를 보고 달려오는 짐승들이 물어뜯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물어뜯기는 금랑을 가엽게 여기는 사람들마저 나오자 금랑은 정말로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따듯한 관심도 동정도 하물며 욕설과 희롱마저도 그저 다양한 먹을거리가 쌓인 간식 바구니를 떠올리던 그는 정말로 괜찮았다.

<도를 넘은 안티팬 금랑을 공격하다!>라는 메인 기사가 나왔을 땐 자신의 라이벌인 단델이 직접 연락해 괜찮은지 안부를 물었다. 응, 나님은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구나. 대처가 늦어져 부러진 왼쪽 팔에 깁스를 감고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 응, 아직 배틀타워 시스템 조정에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있거든. 안정기에 접어들려면 좀 더 걸리겠지.

"아~ 그럼 당분간 배틀은 무리네."

-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그래서 이 상황은 금랑에게 몹시 안 좋았다. 

금랑에게 있어서 단델은 그저 옆에만 있어도 온갖 이슈가 달라붙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뷔페가 아닌가. 단델을 이런 취급 한 걸 알면 단델 본인은 물론이오 가라르 시민들도 펄쩍 뛰겠지만 금랑은 단델을 만난 덕분에 배가 고팠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 어찌 보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닌가 싶어 그 의미를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아, 팔로워 숫자 떨어졌네."

젠장. 단델과 통화하기 전에 올린 셀카의 반응을 보며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무패 신화의 그 남자 단델이 왕관을 내려놓은 날, 새 챔피언과 전 챔피언에게 이목이 가득 채워진 그날 금랑은 질투보단 부러움이 가득 찬 눈을 빛냈다. 단델을 쓰러뜨린게 10살짜리 아이가 아닌 이 몸이라면 그럼 저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갖고 싶다. 챔피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인기가 많아질 텐데.'

처음 며칠은 두 사람의 이목뿐이었다지만 둘 다 SNS에서 반응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바람에 조회수를 늘리기 좋은 금랑은 산 제물이 되었다. 10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던가, 그는 단델의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있냐던가하는 기사나 게시물이 수없이 올라왔으며, 포케스타그램에 반응이 올라오지 않자 자살 의혹 기사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팬들에 의해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신고가 쇄도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그런 자극적인 내용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시들해지자 금랑만 울상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단델의 라이벌은 새로운 챔피언이라며 입을 모았고 이제 금랑과의 배틀이 기대된다는 인터뷰 따위는 볼 수 없을 거라며 입방아를 찧어대기 바빴다.

'이제 정말 단델에게마저 버림받으면 나님 뭐 먹고 살지? 진짜 굶어 죽을지도 몰라.'

* * *

"금랑은 이제 곧 어른이잖아. 그러니까 남은 시간 동안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지? 약속이야."

금랑은 그저 오랜만에 좋아 보이는 엄마의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뭔지도 모르는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게다가 엄마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건 늘 있던 일이기에 이상하단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으레 그랬듯이 식사 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리면 금랑이 준비해 둔 음식 앞에 비척비척 걸어 나와 먹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평소처럼 착한 아이라고 웃어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사흘이 지나서였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고 음식을 데우고 버리고 새로 만들기까지 이렇게 오래 기다렸던 적이 없었으니까. 냉장고에 채워져 있던 음식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틀이 지났다. 금랑은 그저 배가 고파 소파에 웅크려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를 일부러 크게 해보아도 평소라면 시끄럽다며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조용했다. 오히려 금랑이 소리에 지쳐 화면을 꺼버렸다.

금랑의 엄마는 우편물을 쌓아두는 일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쌓인 우편물을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문을 두드리자 쓰러지기 직전인 금랑이 문을 열어준 걸 보고 기겁하며 안으로 들어가 잠긴 문을 확인하고 경찰을 부르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방문을 열어도 좋을지 잠시 망설이던 그들이 금랑이 꿋꿋하게 자리를 비키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부수고 방문을 열었다. 어른들의 시야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새까만 발이 바닥이 아닌 곳에 떠 있는 걸 보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금랑은 10살이 되기까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보호소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도 거기까지란 이야기다. 보호소에서 심리상담을 겸하여 지내는 동안 금랑은 앞으로 트레이너를 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고 그에 관한 절차가 천천히 이루어졌다. 마무리 직전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금랑에게 서류 몇 장과 포켓몬이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건네주었다. 서류에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이 보호자란에 서명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몬스터볼 안의 포켓몬도 앞으로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깨달았다.

'그래, 어쩐지 엄마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이더라. 원래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좋아 보였잖아.'

그제야 그날 우편물을 뜯은 엄마가 엉엉 울다가 금방 좋아하던 이유도 10살을 앞둔 자신을 두고 죽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트레이너로 가끔 편지로만 연락을 해오던 아빠의 생사를 유감하는 내용이었으리라 짐작한 금랑은 두랄루돈이 있는 몬스터볼을 손에 쥐고 더는 기다릴 사람이 없는 그 집을 남겨두지 않고 처분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 * * 

금랑은 집중하지 못하는 펜 끝을 노려보기만 했다. 동숙이 안경을 살짝 올리며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기에 부지런히 뭐라도 쓰는 척을 해야 했다.

그래도 괜찮은 삶 아닌가? 이후 여행하면서 한평생 가족으로 삼아도 좋은 포켓몬들을 만났고 우연히 도와준 매크로코스모스 뱅크의 관계자에게 챌린저 추천을 받았다. 그쪽도 홍보 겸 제안한 거지만 나름 제안한 조건이 나쁘지 않아 흔쾌히 수락했다. 챌린저만 끝나면 가라르를 떠나야지. 단델의 눈을 보기 전까지, 그를 물어뜯어야 한다는 열기에 압도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가라르를 떠날 생각이었다. 

너클짐 관장은 금랑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용이 어디 조막만 한 음식을 먹고 살겠냐며 자고로 위가 커야지 많이 들어가고 쑥쑥 큰다며 금랑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정식으로 제자로 두었다. 금랑은 어이없어했으나 단델을 만나고 가라르를 떠난다는 선택지 따위는 버린 지 오래여서 금방 수긍했다.

"금랑님 챔피언으로부터 슛스타디움 토너먼트 초대가 왔습니다." 

어차피 바로 수락이다. 그치만 가끔 거절하는 것도 이슈가 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만 배틀은 하고 싶어! 요즘 챔피언 못지않게 새로 부임한 스파이크 마을의 관장 마리나 아라베스크 마을의 관장 비트 같은 실력자들이 쑥쑥 자라는 게 보여서 재미있기도 하고. 어라? 좀 애늙은이 같았나?

"…수락하실 거죠?"

마음이 다급한지 동숙은 스마트 로토무를 쥐고 긴장한 모습이었다. 동숙이가 긴장을? 답지 않게 너무 오래 고민했나? 하긴 트레이너들도 뉴스를 챙겨보면서 혹시라도 금랑이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지 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SNS라도 접속하려고 하면 갑자기 간식거리를 챙겨오고 차를 내오면서 시선을 분산시킨다던가 낮잠이라도 자라며 스마트 로토무를 압수하곤 밀어 넣기 바빴다. 그게 귀여워서 몇 번 당해줬더니 팬들에게 자살 신고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나님을 찾는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포켓몬들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하는 사이 콜했던 아머까오 택시가 왔다. 트레이너들의 배웅을 받고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용길이가 불쑥 "으허엉"하는 울음을 터트렸다. 코를 훌쩍이며 무언가 웅얼거리는걸 들으니 금랑을 부르는 거 같았다. 옆에있던 레나는 괜찮냐던가 무슨 일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닌 미쳤냐며 용길의 등을 마구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 금랑이 생각하는 문제가 생긴 건 아닌 거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트레이너들끼리 자신 몰래 어떤 작당을 하는 거 같은데 물어봤자 알 수는 없겠지. 그러나 용길이 우는 모습을 보니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무릎을 접어 시선을 맞추고 용길의 안경을 살짝 들어 올려 눈가를 쓸어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어? 아니면 나님이 뭔가 잘 못 했어?"

응? 다정하게 다시 묻자 머쓱해졌는지 코를 훌쩍이는 용길의 다음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좋은 날이니까 금랑님…" 눈물은 멈추었지만 용길은 여전히 훌쩍거렸다. "…우시면 안 돼요."

"응?"

"모두 지켜보고 있으니까 웃어주세요."

"으으응?"

잘은 모르겠지만 용길의 말에 금랑은 웃음이 나면서도 훌쩍거리면서 시합 때 웃어달라고 말하는 트레이너의 모습에 어쩐지 미안해졌다. 나님이 그렇게 걱정시켰나? 오늘 시합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면 괜찮아지겠지? 알았다고 웃으며 이야기한 뒤 초조하게 눈치를 보는 기사님에게 인사를 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도대체 무슨 일이람. 뭐, 어차피 우리 트레이너들이 나님을 곤란하게 만들리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언젠간 알게 되겠지.'

천천히 올라가는 택시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용길의 등을 토닥여주는 레나와 동숙이 큰누나들 같았다.

* * *

대진표에서 금랑과 싸울 첫 상대는 야청이었다. 야청에게 이기면 단델과 붙을 수 있다며 이 기세로 단델은 물론이오 새 챔피언까지 이기고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야청과의 배틀은 간단히 말해 화풀이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프로이므로 이렇게까지 대놓고 화가 났다는 걸 표출하는 건 드문 일이기에(평소에 티가 안 난다는 뜻은 아니다.) 금랑은 의아했다. 승부할 때는 뜨거운 그녀라지만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는 다르다. 냉정하지 못한 야청을 매섭게 공격했고 그 결과 승리는 예상대로 금랑이 가져갔다.

야청은 평소처럼 머리카락을 헤집지 않고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역시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적어도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었을 거다. 금랑은 야청과 악수하며 그녀를 위로해 줄 심산이었다.

"젠장! 대진표는 랜덤이니까 내가 먼저 너와 싸우게 된다면 내 선에서 전부 끝내버릴 거라고 일러두었는데 결국 그 녀석 뜻대로 되는구나. 애초에 내가 그 자식 페이스에 말려들다니 자존심 상해!"

"야청? 그게 무슨 소리야?"

"금랑." 야청이 진지하게 금랑의 큰 손을 양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혹시라도 네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른다면 내가 어떻게든 도망갈 시간을 벌어줄게."

"저기 나님 죽어?"

야청은 무언가 더 말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심판은 우리 두 사람에게 빨리 퇴장하라는 의미로 호루라기를 불었다. 

다음 경기는 기다리던 단델과의 승부. 야청의 의미모를 소리는 신경이 쓰이지만 여기서 집중하지 못하면 역으로 물어뜯기게 될 테니 애써 충고해 준 야청에겐 미안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오늘 나님의 컨디션은 베스트인 거 같네."

물론 단델도 마찬가지인 거 같지만. 태양처럼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금랑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뜨거워! 아직도 이런 배틀을 할 수 있다니 나님 안 죽었네. 지금껏 금랑을 비난하던 기사들을 떠올리며 비죽 웃음이 샜다. 고양감을 가라앉히지 못한 두 사람의 다이맥스 밴드가 빛이 났다.

"미쳐 날뛰어라. 나의 파트너여! 스타디움째로 녀석을 날려버려라!"

"리자몽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거다이맥스 타임이다!"

그래 이 온도, 습도, 다음은 뭐더라? 아무튼 흥분한 건 단델과 금랑뿐만이 아니란 거다. 관객들이 환호하는 소리에 금랑의 피가 끓었다. 그래서 졌을 때 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리자몽의 거다이옥염이 두랄루돈의 급소를 맞췄다. 두랄루돈이 빛에 휩싸이며 다시 작아졌고 몬스터볼로 집어넣어졌다. 분하지만 포켓몬 승부는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법. 이건 절대 불면의 진리이니. 분한 건 트레이너도 포켓몬도 마찬가지란걸 모르는 트레이너는 없다. 금랑은 머리에 손깍지를 끼고 받치며 늘 하던 루틴대로 행동하며 분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 특히 자신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잘 끄는 사람일수록. 셀카라도 찍을까? 그때의 기분을, 감정을 나오지 않는 사진에 담아두는 행위는 이제 정말로 루틴일 뿐이다. 반복되는 행동은 언제나 안정감을 준다.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비워야 한다. 감정대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금랑은 수없이 자신의 감정을 죽여왔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자신이 죽을 테니까. 모두에게 자신의 죽는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설령 가라르의 모두가 바라는 일 일지라도. 세상에 다시 없을 관심을 받더라도 죽는 순간만큼은 조용히 떠나리라고 금랑은 생각했다. 세상에 잊혀지는 게 진정한 죽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잊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제 단델과 악수를 나누고 오늘도 좋은 승부였다는 단델의 말을 위안 삼으며 퇴장하고 또 가십거리도 안되는 기사들과 악플을 읽으며 자신의 포켓몬들이랑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금랑에게 단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관객들이 술렁거리는 소리에 금랑도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지 배틀하는 동안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금랑이 다급히 도와주려고 하자 몬스터볼이 반으로 열리며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이건 몬스터볼이 아니고…

"반지?"

단델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몬스터볼처럼 생긴 케이스에 반지를 들이밀고 있는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건 프러포즈밖에 없었다. 단델이 나님에게? 방금까지 배틀을 하던 슛스타디움에서 모든 관객이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프러포즈를? 심판도 말을 잃었는지 호루라기를 입에서 떨어뜨리고 멀뚱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모든 카메라와 메인 화면은 금랑을 비추고 있었다. 

"아니, 잠깐, 단델. 갑자기 이게 무슨, 무슨 짓이야?"

"내가 챔피언에게 부탁했어. 널 초대해달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아! 걱정하지 마, 금랑!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관객들에게 사소한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전해달라고 했으니까."

"사소한 이벤트? 너 미쳤어?"

이걸 사소한 이벤트로 퉁치고 넘어가려고하다니 이게 챔피언, 아니 전 챔피언 클라스인가.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거 있지 않아? 우리 둘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게다가 나님은 널 그런 눈으로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나름 정리된 말을 쏟아내려는데 문득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단델의 노란 눈과 마주쳤다. 그제야 금랑은 모든 사람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있다. 게다가 시간 관계상 이제 슬슬 다음 경기를 해야 하는 촉박한 시간이 금랑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전부 나님을 향한 이런 빅 프러포즈라니! 드디어 아까 야청이 말한 자기 선에서 끝내버린다던가 SOS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의미를 깨달았다. 그래, 그랬구나. 아니 잠깐만 야청도 알고 있었다면 설마.

"설마 우리 애들도?!"

"너클짐 트레이너들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그들에게도 도움을 좀 받았어."

그제야 용길이가 울던 게 떠올랐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서 운 게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인 한편, 이 상황을 알고서 그렇게 보냈다는 배신감이 밀려오며 억지로 비우려고 했던 머리가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좋은 날이라느니 웃으라느니 어째서 나님이 이 말도 안 되는 프러포즈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단델때문에 괜히 나님의 SNS만 불타게 생겼어! 어쩌면 내일 신문 1면은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멍청한 표정이 나가는 거 아닌가-까지 생각하던 금랑은 그제야 팽팽하던 실이 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대답은?"

괜찮지 않을까? 얼굴이며 가슴이며 인품까지 완벽한 남자인데. 가라르에서 안기고 싶은 남자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인물에게 고백도 아닌 프러포즈를 받은 거라고. 지금 배틀타워를 생각하면 금전적인 문제도 괜찮을 거 같고. 게다가 단델이랑 결혼하면 배틀이 아니더라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단델이 옆에 있어서 배고팠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단델이 옆에 있으면 가라르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겠지! 게다가 이런 대형 사고를 '사소한 이벤트'라고 하는 남자라고? 오히려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대답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

내일, 아니 당장 지금부터 가라르의 모든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이 금랑님이다! 숨을 참고 금랑의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경기때보다 더한 함성을 질렀다.

단델은 당연한 걸 들었다는 듯이 금랑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마치 재본 것처럼 딱 들어맞는 크기와 안쪽에 섬세하게 이니셜까지 박혀있는 반지는 누가 봐도 주문 제작한 값비싼 물건이었다. 단델이 쓸데없이 마지막 말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금랑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할뻔했다.

"원래는 너한테서 이번 챔피언 방어전에서 성공한 뒤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아서 좀 늦어버렸네."

다정하고 쓸쓸한 얼굴로 반지를 낀 금랑의 손을 쓰다듬는 단델을 보며 금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너 이 새끼…, 챔피언컵에서 나님한테 이기고 프러포즈하려고 했냐?"

* * *

"축하드립니다!"

너클짐으로 귀환하자마자 폭죽이 터졌다. 모두의 손에는 폭죽이나 케이크, 성의 없는 소리가 나는 장난감 악기 같은 게 들려 있었다. 금랑은 점점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통에 눈물이 찔끔 날 거 같았다.

"너희 어떻게 이런 일을 나님한테 한마디도 안 해줄 수가 있어?"

그걸 금랑이 감동했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흥분에 겨워서 본인들이 더 신나 하며 대답했다.

"금랑님 드디어 짝사랑 이뤄진 거 축하해요!"

"10년 동안 한사람만을 바라보던 마음이 이어지다니 정말 드라마 같아요!"

"저희가 언제나 남몰래 응원하고 있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와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틀렸다고 지적해줄 게 아니라 처음부터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다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선 금랑도 모르는 10년 동안의 짝사랑 대서사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서 이걸 지적하면 그럼 프러포즈는 왜 받아주었는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지므로 그냥 조용히 드라마 같은 짝사랑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인터뷰 들어오면 써먹어야지.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받아들였다.

"다른 애들은 그렇다 쳐도 동숙이 너는 언질이라도 해줬어야지."

"어느 쪽도 좋았으니까요."

"응?"

"금랑님이 마음고생하신 거 생각하니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평소 무뚝뚝하다고 생각한 동숙이 나님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었다니. 비록 단델때문에 마음고생한 적은 없지만. 마음이 찡해지려는 순간 동숙이 안경 너머의 눈이 죽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리고 차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단델님이 차이면 내일 가라르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텐데 볼만하잖아요?"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트레이너들이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래, 사소한 이벤트를 말리느라 동숙이 네가 고생이 참 많았구나. 단델에게 당분간 절대, 절대, 절대 너클짐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일러두어야겠다.'

* * * 

배틀타워가 자리 잡는 대로 식은 곧바로 올리기로 했다. 단델의 부탁으로 혼인신고는 먼저 올렸다. 

챔피언 방어전이 실패로 끝나고 단델은 예정된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으므로(실상 이때 프러포즈를 했다면 100퍼센트 거절이었겠지만.) 천천히 다시 공들여 계획을 짜려고 했으나 금랑에 대한 자살 오보에 가슴이 철렁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짐트레이너들을 들쑤셔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바쁘기로는 챔피언 시절 못지않아서 얼굴 보기가 힘들자 아예 금랑 집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금랑은 단델에 대한 이런 마음으로 결혼해도 되는가에 대한 뒤늦은 고민을 해보기도 했지만 키스도 섹스도 나쁘긴커녕 오히려 좋아서 일말의 죄책감마저 날려버렸다. 게다가 얼굴 보기가 힘든 남편이라 그런지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까지 드는 게 아닌가. 

"금랑, 미안해. 갑자기 일이..."

"응? 아니 괜찮아. 어쩔 수 없지. 조심히 다녀와."

"저녁엔 꼭 일찍 들어올게."

"그래, 나님이 거다이맥스 카레 해줄 테니까 일찍 들어와."

어휴, 누구 남편인지 돈을 잘 벌어오네. 아주 좋아. 단델이 벌어오는 돈의 아주 많은 부분은 서로의 포켓몬에게 아주 유용하게 잘 쓰이고 있어서 금랑은 만족스러웠다. 

일전엔 둘이 맞춰서 휴가를 냈더니 하루도 못지나고 급한 일이 생겨서 단델만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단델이 통째로 빌린 식당에서 식사하고, 크고 비싸고 좋은 호텔에서 금랑 혼자 밤을 지새운 게 얼마 전이라 단델은 이런 상황만 되면 금랑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든 맛있고 비싸 보이는 식사 사진과 야경이 끝내주게 좋은 호텔 셀카를 올렸더니 반응이 아주 뜨거웠기에 금랑이 쓸쓸할 틈이 없었단 걸 단델은 몰랐다.

금랑은 여전히 SNS 반응을 체크한다. 악플은 옛날에 비해 수위도 낮고 많이 줄었다. 상대가 단델인데 척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유령계정으로부터 디엠이 오기는 한다. 너 따위는 금방 질려할 거라던가 이혼하라면서 저주의 메시지를 담아 보내는 게 아닌가. 그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단델이랑 헤어져도 그건 그거대로 유명해지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뜨겁게 타버릴 거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점이나 어젯밤에도 다정하게 뽀뽀하며 애무해주던 단델을 떠올리니 도저히 헤어질 거란 상상이 안 들어서 금랑은 조용히 차단 버튼을 눌렀다.

단델이 없는 틈을 타 꾸물꾸물 금랑의 침대로 모여드는 포켓몬들을 보며 금랑은 긴 팔로 포켓몬들을 안아주었다.

"밥 먹고 같이 낮잠이나 잘까?"

단델이 없으면 없는 대로 포켓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금랑은 포켓몬들 밥을 먼저 챙겨주고 자신의 식사도 간단히 차렸다. 저녁을 거하게 먹을 생각이니 조금 가볍게 먹고 낮잠을 잘 속셈이었다. 그리고 단델이 사다 준 가라르에서 인기가 많아 줄을 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간식을 생각하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쁘게 사진을 찍고 단델이 준거라고 올릴 생각이었다.

"배부르다."

그치? 

그 물음에 대답하듯 금랑의 앞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미끄메라가 고개를 내밀듯 몸을 쭉 폈다가 오므리면서 마저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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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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