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

[혈계전선/크라스팁]Endless Game

삶은 체스와 달라서, 체크메이트 후에도 게임은 계속 된다.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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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팁] Endless Game

by. 솔방울새

※사망 소재 주의

In life, unlike chess, the game continues after checkmate.

(삶은 체스와 달라서, 체크메이트 후에도 게임은 계속 된다.)

-Isaac Asimov

어떠한 감상을 느낄 여유까진 없었다. 

그래서 스티븐은 치우려던 체스판을 잠시 노려보면서도 불필요한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함께 체스를 둔 날은 일주일 전이었다. 크라우스의 나이트에 스티븐의 킹이 붙잡혔던 그 판세 그대로 모든 말이 방치되어있었다. 그날 오후,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있었다. 갑작스러웠고, 지금까지 그들이 치러 온 그 어떤 전투보다도 격렬하고 치열한 싸움이었다. 영겁과도 같았던 지옥이 끝을 맞이했을 때 레오나르도의 왼쪽 안구와 뇌는 의안의 과열로 거의 익어있었고, 제드는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었으며, K.K는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최전선에서 폭풍처럼 날뛰던 재프는 기어이 반쯤 잘려 나간 팔뚝을 이계의 기술로 봉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븐은 그날, 자신의 킹을 체스판에서 한 번, 붕괴된 도심의 잔해 위에서 또 한 번 잃었다.

흔히들 책략가는 체스를 두는 사람에 빗대어지곤 한다. 끊임없이 상대의 수를 읽고 대응하는 과정만은 비슷할지도 몰랐지만, 그런 것 치고 스티븐은 체스로 그들의 보스를 속 시원히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실제 전장에서 작전을 수립하는 건 대부분 스티븐의 영역이었는데도 그랬다. 생각해보면 이 미지로 가득한 안개 속 도시는 작고 사소한 계획에조차 단 한 순간도 협조적이지 않았으므로. 인계의 체스와 닮은 면을 찾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판을 읽을 만하면 뒤틀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지나치게 많은 요소가 얽혀있어 당장 효용성 있는 수를 판단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수일 밤낮을 새워 수립한 계획이 얼토당토않은 변수로 인해 휴짓조각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인류 존속의 최전방인 이 땅에서 스티븐은 늘 절벽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들의 품에는 세계의 균형이 안겨 있는데, 등 뒤는 나락이요, 눈앞은 복잡하게 얽힌 수만 수억 개의 세력이었다. 저 중에 누가 먼저 손을 뻗어 어깨를 떠밀지도 알 수 없었다. 인계의 어떤 게임도 이렇게까지 규칙 없고 징글맞진 않을 터였다. 

'이계의 프로스페어라면 또 모를까.'

허탈하게 생각하며 스티븐은 그는 짚고 있던 목발을 소파에 기대어 놓았다. 그도 절대 퇴원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큰 전투의 뒤처리를 위한 서류는 이 순간에도 산처럼 쌓이고 있단 사실이 의사의 만류를 뿌리칠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스티븐은 그새 얇은 먼지가 내려앉은 자신의 화이트 킹을 들어 올리고 빛 잃은 시선을 빈자리에 대신 떨구었다. 킹을 몰아넣고 체크메이트를 이룬 블랙 비숍이 코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날, 화이트 퀸이 나이트에 막혀 오지 못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체크메이트일세, 스티븐.」

그렇게 패배를 선고하던 낮은 음성이 이토록 길게 남을 줄은 몰랐다. 분명 평소와 같은 수줍은 미소도 곁들여졌을 텐데, 함께 떠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티븐은 킹을 잃고 패배했다. 스티븐의 오판은 크라우스의 죽음을 야기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숨통을 틀어막은 감정을 절망이나 슬픔 같은 과분한 단어로 형언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죽음은 거짓 같았고, 생존은 질 나쁜 농담 같았다. 

스티븐은 화이트 킹을 움켜쥔 손등으로 체스판 위를 쓸어버렸다. 테이블 아래 받쳐놓았던 상자 위로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쏟아져 내렸다. 해 질 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손아귀의 크리스탈 체스말 안에서 산란했다. 체스든 프로스페어든 이토록 눈부셨던 킹은 더 이상 판에 존재하지 않았다.

「스티븐, 내게는 자네가 필요하네.」

「전장에서 죽기를 각오한 몸이니 괴물들과의 싸움에 얼마든지 날 불러도 좋아. 하지만 세계의 균형을 지킨다는 사명은 무게가 달라.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일이기도 하네. 내가 아는 한 그 무게에 눌리지 않을 사람은 인계와 이계를 통틀어 몇 되지 않고., 그 첫 번째가 자네라고 생각해 묻는 것이네. 부디 함께해줄 수 없겠나?」

나는 자네처럼 강하지 않아. 차마 자신을 향하는 진솔한 눈빛을 향해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들고 있던 커피잔 위로 시선을 내려놓고, 잠시 침묵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부터 인류 존속을 위한 최전선에 스스로 뛰어든 몸이었다. 그 결심과 의지에 변함이 없는 만큼, 세계를 뒤집은 이변에 맞추어 새로운 방향성을 잡을 필요성은 당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 길을 눈앞의 남자가 열어주어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내 파트너는 자네가 아니면 안 되네.」

흔들림 없이 빛나는 녹안이 자신을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목줄도 목숨줄도 오로지 그에게 매인 것처럼 늘 그 앞에서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 대답이 남은 평생을 지배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알겠어. 자네의 곁에는 앞으로도 늘 내가 있을 거야.」

몇 년 전의 그 한 마디가 라이브라의 시작이었다. 크라우스는 그렇게 스티븐을 붙들어 놓았다. 곁에 있기를 약속했던 스티븐의 대답은 마주 앉은 크라우스의 찻잔에서 나던 홍차의 향과 들고 있던 머그의 커피 향이 뒤섞여 함께 기억으로 녹아들었다. 스티븐은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 당시 그는 크라우스가 더는 닿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았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동료, 친우, 연인 등의 단어를 엮어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크라우스는 자신의 본질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호수였으며, 향할 방향을 비춰주는 북극성이었으며, 절대적인 정의를 저울질해 주는 그만의 천칭이었다. 이후로도 스티븐은 매일 아침저녁 커피나 홍차의 향을 맡을 때마다 그 순간과 결의를 되새겼다. 벌써 3년일까, 겨우 3년일까. 그렇게 뿌리를 뻗어내렸다.

그러니 크라우스는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유언 한마디 없이 이렇게 갑작스레 그들을 떠나서는 안 됐다. 스티븐은 빛으로 향하는 길을 닦을 능력이 있었으나, 스스로 빛이 있을 곳을 찾아 가리킬 자신이 없었다. 크라우스를 잃은 세계에 서서 막연히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자신은 비린내 나는 비밀들에 둘러싸인 음습한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다. 세간의 법과 정의는 라이브라 마저 처단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결정을 내릴 때였다. 스티븐은 라이브라를 놓음으로써 그들의 어둠을 가져가기로 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배는 황망하게 바다를 헤매일 뿐이므로.

말을 꺼내자마자 나온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오와 제드는 무겁게 침묵했고, 체인은 본론에 들어가자마자 입술을 짓씹으며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재프와 K.K는 분노했다.

"웃기지 마, 스카페이스. 그딴소리는 농담이라도 용납 못 해."

"충분히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네. 지금 상황에서 라이브라는 존속할 수 없어."

"아니, 잠만, 잠깐만요. 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라이브라가 고작 보스를 잃은 일로 이렇게 어영부영 해체될 수준이었슴까?"

K.K를 향하던 스티븐의 시선이 저를 향해오자 재프는 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 고작이란 게 절대 그런 뜻이 아니고. 보스의 빈 자리가 엄청나게 크고, 다들 충격받았고, 괴롭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끝내잔 얘기가 나오냔 말이잖아요. 그것도 스타페이즈 씨가......"

"내게 리더를 제안하려는 거라면 안 돼."

"라이브라에 대한 스타페이즈 씨의 애정이 고작 이 정도였슴까?"

"무작정 끝내자고 한 적 없네, 재프. 내가 없더라도 자네들이 하기에 따라 라이브라의 역할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어."

스티븐은 자신이 생각해 둔 방안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라이브라의 모두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주인을 잃은 길베르트는 라인헤르츠 가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리에 없었으니 그를 제외한 주요 구성원 대부분이었다. 특히 재프와 K.K는 스티븐이 크라우스를 대신하여 이끌어주면 되지 않느냐며 적극 반발했으나, 가능한 한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안배하겠다며 단호히 자르는 스티븐의 말에는 끝내 재프도 고개를 숙였다. 라이브라와 관련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스타페이즈는 이미 자신을 갈아가며 너무나 많은 헌신을 쏟아부었다. 지난 몇 년간 단 하루의 휴식도 마다하고 가진 모든 것을 라이브라에, 그리고 리더인 크라우스에 바쳐 온 남자였다. 누구도 감히 나서서 그런 삶을 계속하라 강요할 수는 없었고, 행한다 한 들 크라우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스티븐이 몸을 돌려 나온 뒤, 복도까지 따라 온 K.K만이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내뱉었다.

"여기에 있어. 지금까지처럼 인류에 몸 바쳐 살란 말이 아니야. 속 시커먼 남자 같으니, 정리하고 나간다고 후련하게 살 것 같으면 당장 떠나라고 손수건이나 흔들어 줬어. 하지만 아닐 거잖아. 혼자 조용히 죽어가기라도 할 셈이야?"

하나뿐인 눈에서 넘친 물기가 어느새 뺨을 적신 채였다.

"당장 그게 아니라면, 당신, 따로 하려는 일이 있다는 거잖아. 우리가 뭐라도 거들 수 있게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스카페이스.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려운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침묵하는 스티븐의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린 K.K는 떨리는 한숨과 함께 언제든 연락하란 말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이후, 고맙게도 K.K는 남은 이들의 주축이 되어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 준 모양이었다. 재프, 제드, K.K, 브로디&해머를 포함해 송곳니 사냥 본부에서 크라우스와 스티븐을 따라 나왔던 멤버의 절반가량은 다시 본부에 속하게 되었다. 스티븐이 라이브라의 이인자로서 마지막으로 주도한 협상 끝에 라이브라는 본부 산하의 HL 주둔 특수조직으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교적 활동에 자율성을 보장받되, 통솔자들의 주요 지시에는 따라야만 한다는 제약을 얻었다. 송곳니 사냥 통솔부의 중심에는 스티븐과 줄이 닿아있는 인물이 꽤 많았으므로 주요 지시들은 혈계의 권속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안에 한한다는 조건까지 포함해 걸어놓을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뻔뻔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평소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들이 하나씩 실현되어 갔다. 

'혈투신의 둘 뿐인 제자가 모두 이쪽에 있다는 점이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지.'

블러드 브리드를 봉인할 방법을 잃어 진명을 읽어도 쓸 곳이 없게 된 레오나, 끝까지 본부에 속하기를 거부한 이들은 필요시에 요청을 받아 지원하는 식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가진 모든 능력과 인맥을 동원해 스티븐은 천칭의 앞날을 닦아놓았다. 거기까지가 라이브라의 스티븐 A. 스타페이즈로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후에는 사설 부대를 동원해 미래의 위협들까지 싹을 자르고, 씨앗을 태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부채감에서 기인한 작업이었으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불온세력들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눈치 좋은 이들은 무언가를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원치 않았고, 크라우스가 있었다면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을 피바람이 보란 듯이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파란이 몇 달째 몰아치는 한가운데, 스티븐은 노년의 신사와 마주 앉아 무릎 위에 손깍지를 끼었다. 머리 곳곳이 희끗하게 세어있는 그는 이계와 인계를 오가며 의약품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재벌로, 라이브라의 가장 오랜 스폰서 중 하나였다. 오랜 교류가 있었던 데다 개인적으로도 공을 들인 관계라 비교적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편에 속했다. 빳빳하고 질 좋은 양복을 차려입은 채 찻잔을 기울이는 그는 평범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으나 체스 말을 집어 든 다른 손만은 이계의 것처럼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일부러 준비했는데 손도 안 대는군. 분명 커피를 즐기지 않았던가?"

"이런, 기껏 준비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의사가 입원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카페인을 끊으라더군요."

"그럼 홍차도?"

스티븐은 말없이 미소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상대는 자신의 비숍을 움직인 뒤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시선을 맞춰왔지만, 곧 탐색하는 기색을 거두었다.

"그 사이에 취향이 많이 바뀌었군, 자네."

"의사의 조언을 들었을 뿐입니다."

"거울이나 보고 혀를 놀리게. 향만 맡고도 구역질을 참는 듯한 얼굴이야."

"....하하."

거리낌 없이 지적하는 말에 그는 눈꼬리를 내리며 웃곤 검은 나이트를 움직였다.

사실이었다. 매일 아침 라이브라의 사무실에 짙은 향을 퍼트리던 홍차와 커피는 이제 스티븐에게 독이 되었다. 마시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고, 냄새만 느껴도 속이 뒤집혀 참고 견딜 수조차 없었다. 그것들이 동반하는 지난 수년의 기억들은 그를 끔찍하게 만들었다. 기억은 더없이 달았으나 그것을 음미한 뒤가 괴로웠다. 머리를 비우려 잠을 청하면 꿈은 한 술을 더 뜨곤 했기에, 스티븐은 대신 각성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암페타민은 끈덕진 잠을 몰아내는 데에도 뛰어났다. 비록 비강 혈관에 미치는 영향으로 코점막과 후각이 다소 망가져 버리긴 했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그마저도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입과 코를 틀어막으며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지 않은가.

"큰일이기는 했지. 그날 이후로 얼마간은 버티다 이후 한참을 아무 소식도 없길래 그대로 자네들이 와해 될 거라고 생각했네. 구심점이던 리더를 잃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여겼고."

"죄송합니다."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그래서, 이제서야 찾아온 이유가 무언가? 라이브라를 다시 일으킬 자금이 필요한 거라면...."

"아뇨, 라이브라는 송곳니 사냥 본부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은 지극히 개인적인 제 용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미스터 반즈."

"흡수? 이해가 안 되는군. 아무리 크라우스가..."

"그 얘기는 혹시 이후 여유가 있을 때 계속해도 될런지요."

짧지 않은 고민 끝에 화이트 폰이 이동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짧게 숨을 몰아쉬고 스티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보스가 가져오던 정보들의 출처, 제게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온 본론에 반즈 회장은 들어 올리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돈 아를르엘 에루카 풀그루슈. 심증만 몇 년을 끌어안고 있다 최근에야 사설 부대를 움직여 알아낸 정보였다. 영향력만으로 따지면 신성 존재에도 비견된다는 그에게 크라우스가 지속적으로 접촉해왔단 사실을 확인했을 때 스티븐은 헛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출처 불명의 고급 정보를 가져오던 건 라이브라의 보스도, 부관이었던 그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침범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그들은 서로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그럴만한 성품이 아니었으며, 스티븐은 그런 크라우스를 존중해 선을 지켰다. 그러니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영영 들추지 않았을 사실이었다.

'목숨을 건 프로스페어라니.'

숨길만도 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티븐은 극구 말렸을 짓이다.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다른 수를 찾아볼 테니 자네는 그러지 말라고, 자네가 가진 목숨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분노했을 것이다. '내가 그럴 걸 알았으면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지만 이제는 의미 없어진 뒤였다. 크라우스는, 그가 자신을 그리 중히 여기는 걸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았어야 했다.

"아무나 알현할 수 없는 존재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 아는 사람의 소개가 필요하다는 것도."

"자네가 가는 건 자살일세. 체스 그랜드 마스터도 패배하고 목숨만 간신히 건져 왔다더군."

"미스터 울첸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다소 일방적인 대화이기는 했지만. 크라우스가 주었다는 조언은 상당히 유용할 것이 분명했다. 스티븐은 룩을 움직였다.

"그런데도 가겠다면 그럴 만한 이유는 있겠지. 다만...."

본즈 회장은 눈썹 사이를 조금 모으며 체스판 위를 내려다보았다. 스티븐은 커피 대신 내어진 허브차로 목을 축이며 그를 응시했다.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했지만 심란한 감정을 읽기란 어렵지 않았다. 가서 개죽음을 당할 실력이라면 그는 절대 만남을 알선해주지 않을 것이다. 크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체스와 프로스페어 애호가인 회장은 미팅이 있을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크라우스와 체스를 두곤 했다. 그러나 스티븐과 수를 겨룬 적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 자네는 체스를 적당히 즐기는 수준이라 들었었네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즐기는 수준의 체스를 자네는 매일같이 크라우스와 두었겠군그래."

본즈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려던 자신의 말을 놓았다. 그는 이 대국의 결말을 이미 알아버린 이상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스스로 낙심하느라 그는 크라우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몸을 뻣뻣하게 굳힌 스티븐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3일 내로 연락주겠네."

"감사합니다."

짧은 감사와 인사를 마친 스티븐은 다음을 기약하며 몸을 일으켰다. 호화로운 저택 밖으로 나서자 등 뒤에 있던 건물은 신기루처럼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태홍에게 문자를 한 통 보낸 뒤, 차를 끌고 익숙한 번화가로 향했다.

콰앙-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서서 휴일을 맞아 행인들로 가득한 길거리를 보고 있자니 몇 블록 너머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HL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수준의 폭발이니 시선을 끄는 것도 잠깐일 것이었다. 그 정도면 사설 부대가 목적을 완수하기에 충분했다.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운전석의 창문을 조금 내리자 모자를 눌러 쓴 마른 남자가 말없이 작은 서류뭉치를 건네왔다. 폭발로 인해 매캐한 연기가 그 틈으로 흘러들어왔다.

"가르감비노 일가는 정리됐습니다. 우르즈자단 패밀리는 마약고가 폭발했으니 당분간은 재정난으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거노트 스미스 쪽에 흘릴까요?"

"수고했어. 발로&홀러 운수의 움직임을 봐선 이미 눈치챈 것 같으니 그럴 필요는 없겠군."

"그럼 게토헤이츠 쪽 작업 계속하겠습니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을 올리자 태홍은 짧게 인사하고 인파에 섞여들었다. 밖에서 들어온 공기에는 사람 타는 악취도 섞여 있을 것이나, 둔해진 스티븐의 후각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엑셀을 밟자마자 들려온 두 번째 굉음은 더욱 소란스러워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사이렌 소리, 휴마들과 이계인들의 비명소리 따위도 잘 들리지 않았다. 스티븐은 무뎌짐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10분 내로 라이브라든 HLPD의 다니엘 로우든 어느 하나는 이곳에 도착할 테니 마주치기 전에 적당히 빠져나가 다음 일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이 도시에는 훨씬 큰 건들이 차고 넘쳐서, 간접적으로 약간의 영향만 미쳐도 얼마든지 필요한 수준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도, 굳이 껄끄러운 그를 찾아오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가 되도록.

차라리 그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면 좋았으련만, 헬사렘즈 롯은 늘 그래왔듯 거대한 혼란 속에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전히 미지로 가득한 두 세계 사이의 도시. 수없이 많은 생사의 갈림들 속에서 죽은 사람이 하나 살아 돌아오는 정도의 혼란은 충분히 용납할만한 것처럼 느껴졌다.

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이틀 뒤였다. 돈 아를르엘과의 대국을 위해 경계점 근처로 향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뒤엉키는 도로를 따라 달린 끝에 스티븐은 형태가 뒤틀려 끝을 알 수 없는 웅장한 건물에 들어설 수 있었다. 거대한 천을 둔덕 같은 몸에 뒤덮고 하얀 유골을 닮은 얼굴과 손만을 내민 채 이계의 프로스페어 애호가는 그를 환영한다 말했다. 이공간으로 들어서는 문을 넘어, 프로스페어 테이블만이 남은 황야에 자리를 잡고 지평선에 시선을 두었다. 오래전 혈계의 권속을 잡기 위해 크라우스와 함께 파견되었던 사막이 떠올랐다. 어쩐지 이곳에서만은 그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눌러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 그러면. 자네의 바람도 한 번 들어보세나."

"크라우스 폰 라인헤르츠를 되살릴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죽음 이전과 같은 완전한 상태로."

"설마 했건만. 내 벗의 친우라더니 역시나 예민한 요구만 들고 오는군."

이계인의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스티븐은 그가 웃고 있음을 느꼈다. 크라우스를 벗이라 부르는 것이 가증스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 바람은 게임 72시간의 가치가 있네."

그의 경우에는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몰라도, 울첸코 체스 그랜드마스터의 시간이 19시간이었음을 떠올리며 스티븐은 물었다.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돈 아를르엘의 앙상한 손이 대답처럼 테이블의 버튼을 누르자 말들이 세팅되었다.

"방법을 알려주는 것만은 가능하네만, 실현하는 것은 오로지 자네의 몫일 것이네. 72시간을 버텨도, 무승부를 이끌어내도 자네의 승리일세."

"좋습니다."

'....체크메이트를 잊고 싸우라고.'

이기려 들지 말고 필사적으로 버틴다. 따지고 보면 스티븐 A. 스타페이즈에게는 가장 익숙한 전술이었다. 불멸의 블러드 브리드들을, 이어서 이계에서 온 미지의 위협들을 상대해 오면서 그는 체크메이트를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것들을 상대하면서 인류를 뛰어넘는 힘도, 지략도, 권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인류 중에서는 특출난 수준이었기에 등 돌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의 삶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누구라도 학을 떼고 도망갈 자리에서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스티븐은 어떻게든 주어진 것들을 지켜왔다. 목숨을 저울질하고, 죽지 않는 것들과의 전장에 뛰어들면서도 매번 위대한 시간 끌기라 자위하며 살아왔다. 크라우스를 만나기 전은 더했고, 만난 뒤에는 그나마 나아갈 길과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 지금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스티븐은 멈추지 않고 수를 두었다. 남들보다 낮은 체온을 가진 몸에마저 홧홧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할 즈음, 말을 움직이려 고개를 숙이자마자 코피가 터져 나왔다. 틈 없이 게임을 이어가면서도 눈앞의 괴물이 말을 걸어 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스티븐 A. 스타페이즈 군이라고 했나."

"...예."

"크라우스 군을 움직이던 인물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네만, 이런 식이 될 줄은 나도 몰랐군."

"움직이던 인물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의 부관이었습니다만."

돈 아를르엘은 입을 벌려 비웃었다. 거대한 뇌로 뒤덮인 그의 몸뚱이가 터질 듯이 출렁였다. 덩달아 자신의 뇌와 심장이 흔들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스티븐은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도 자네를 부관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군. 그 친구는 자네가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텐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안 그래도 발광할 것만 같은 상태이니 되도록 말을 시키지 말아 주었으면 싶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스티븐은 귀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우스 군이 다섯 번째로 그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자신을 없애달란 부탁으로 나와 대국을 둔 자를 살리기 위해 99시간을 버텨냈네."

"......"

99시간이라면 울첸코 체스 그랜드마스터와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를 곧장 놓아주지 않고 잡아두길 잘했다 싶어졌다.

"그 점을 지적하자 그 친구가 그러더군.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긍지를 버리는 행동을 취하곤 한다고."

말을 움직이던 스티븐의 손이 주춤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최근 행보는 크라우스 군과 함께할 때의 모든 긍지를 내버린 것처럼 보였네만. 되살려내 다시 함께하길 바라는 것 치곤 상당히 그를 실망시킬 방식이 아닌가. 인류를 위한다는 목적이 마침 일치했으며, 크라우스 군에게는 이를 이룰만한 힘이 있다 여겼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유용한 그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나?"

가까스로 수를 둔 뒤에 스티븐은 침을 삼키고, 마른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제정신이 아닌 채 둔 저 수가 판을 말리도록 하지 않을지도 불안한 상황인데, 크라우스를 담은 문장 하나하나까지 속을 쥐어짰다. 후끈하게 주변을 뒤덮은 열기에 온몸의 수분이 말라가는 듯했다.

"저는 약합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긍지를 내버릴 수 있는 인간이지요."

순간 현기증이 일어 테이블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어른거리는 시야 속에서 지금 앉은 이 자리에 먼저 앉아 세계를 위한 대국을 펼쳤던 남자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흔들렸다. 짐승 같은 생명력, 흉악한 고집쟁이. 그들의 리더. 스티븐은 그중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테이블 위로 코피를 쏟던 크라우스를 보았다. 저자가 환영계 주술로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저 혼자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긍지를 알려 줄 이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저와 같은 자에게도, 울첸코 같은 작자에게도 크라우스는 인류의 의지가 어디까지 닿는지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긍지를 내버린 자에게도 똑같은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였습니다. 희망에 닿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제가 설령 이용했더라도 같은 목적을 가진 이상 그는 기꺼이 자신을 맡겼을 것이라 믿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고개를 들자 뒤늦게야 스티븐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아니었다. 실핏줄이 죄 터져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손등으로 뺨을 훔치는 대신 그는 손을 앞으로 뻗어 말을 움직였다. 대화가 섞여들었다고 해서 이 게임이 멈추거나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돈 아를르엘은 고민도 없이 다음 수를 두었으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스티븐의 차례는 돌아왔다. 숨이 목 위까지 차올라 호흡이 턱턱 막혔다.

"자네가 추악한 방법으로 죽은 자신을 강제로 되살리더라도?"

"증오하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기적인 선택이로군. 후회하지 않을 것 같나? 자신을 완전히 내버리고 얻을 것이 무엇이지?"

"후회해도 상관없습니다. 인류는 크라우스를 다시 얻을 수 있을 테니."

"그토록 인류애 넘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네만."

"......."

"자네도 꽤나 재미있군. 무엇이 자네를 헌신하게 하고, 인류를 위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자네들의 리더에게 잔인한 이기심을 들이밀게 만드는 것인지 조금은 흥미로워."

스티븐은 처음으로 할 말을 잃었다. 눈과 코에서 흘려낸 핏물로 푸른 셔츠를 엉망으로 더럽힌 채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애써 이 자리에서 자신을 깊게 돌아보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다. 심리적으로 쥐어흔들려는 것이 저 괴물의 목적임을 알고도 넘어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차가운 냉정을 되찾는 것은 크라우스와 상반되는 그의 특기였다. 뇌까지 다 익어버릴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그는 구둣발로 땅을 두드렸다. 에스메랄다식 혈동도. 옷깃을 군데군데 더럽힌 본인의 피얼룩으로부터 얇은 살얼음이 그의 몸으로 번져갔다.

"큭, 하아..."

뼛속까지 스미는 서늘한 냉기는 혼미한 정신을 붙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혈법을 쓰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기에 돈 아를르엘은 지적하는 일 없이 그가 다음 수를 두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티븐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저도 잘 모르겠으니 이 게임이 끝나고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얀 손으로 다음 수를 이어가며 스티븐은 필사적인 발버둥을 계속했다. 점점 더 밀어붙여 오는 저 괴물을 상대로 감히 다시는 마주 앉지 못할 만큼 가진 전부를 쏟아부어야만 했다. 크라우스는 무슨 생각으로 저것을 몇 번이나 상대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그런 걸 떠올릴 여유 따위 없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결심하며 스티븐은 오로지 눈앞의 게임에 뛰어들었다.

72시간이 지났다.

이공간에서 나온 스티븐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해 태홍이 이끌고 온 사설 부대에게 업혀 가면서도 그는 각성상태에 빠져든 사람처럼 정신을 잃지 않았다.

"...태홍,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것들을 모두 준비해."

태홍이 건넨 생수로 간신히 입을 축이자마자 차로 향하며 스티븐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필사적으로 이어지는 모든 지시를 그의 수족들은 경청했다. 목적이 정해진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라이브라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돌아온 그의 리더까지 적으로 돌리게 되더라도.

가장 크게 분노하는 사람은 K.K일 것이다. 이따위 짓거리를 위해 라이브라를 나갔느냐며 누구보다 화내고 슬퍼할 것이 분명했다. 울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함께 한 시간이 짧은 제드와 레오는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실망하겠지만, 먼저 능동적으로 대처를 취해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라이브라가 막으려 들 것입니다. 이미 다녀오신 사이에 재프 렌프로가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그쪽은 내가 상대할 테니 준비를 계속해."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플랫 아이언 지구의 폭발 건 때문이겠지. 너희가 숨어 따라와 봤자 그 녀석은 감으로 다 알아챌 테니 혼자가 나아...."

슬슬 한계였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어 스티븐은 완전히 몸을 늘어뜨렸다. 재프의 경우에는 스티븐에게 가장 대놓고 불만을 표했으면서도 유일하게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충성스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가끔은 현 라이브라가 놓친 정보를 그를 통해 전해주기도 했다. 그는 스티븐이 아직도 라이브라를 위해 손을 거들어주고 있다 생각해 안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에도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크고 두꺼운 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를 안아 들었다. 깨어질 것처럼,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을 다루는 것처럼 부드럽게 스티븐의 몸을 차 뒷자석에 눕혀주었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차가운 물수건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뺨을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크라, 우스."

무심코 떠오른 이름을 입 밖으로 낸 뒤에야 그는 사설 부대들의 손길임을 떠올렸다. 감긴 눈으로부터 배어 나온 눈물이 곧장 흘러내려 물수건에 스며들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기억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은 돈 아를르엘의 물음이었다.

「무엇이 자네를 헌신하게 하고, 인류를 위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자네들의 리더에게 잔인한 이기심을 들이밀게 만드는 것인지 조금은 흥미로워.」

'아.'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나, 크라우스를 너무......'

좋아했구나, 경애했구나, 따랐구나, 사랑했구나. 어떤 표현도 막연할 뿐 이 감정을 정의내리기엔 턱없이 미약했다. 그가 아는 언어로는 표현할 도리가 없어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조차 없었다.

어떤 감정도 끝내지 못했기에 모든 것이 망가진 채로도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은 그를 이 세계에 되돌려놓아야만, 이 끝나지 않는 모든 게임을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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