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계전선

[혈계전선/크라스팁]위성의 이면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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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팁] 위성의 이면

by. 솔방울새

*식인소재, 사설부대에 대한 설정 날조

크라우스는 스티븐을 아는가?

이에 답하자면 우선 앎의 깊이와 범위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스티븐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성격으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지부터 생각해서 성향, 사상, 습관까지 포함될 수 있다. 때로는 그의 전반적인 삶이나 은밀한 비밀까지도. 긴 시간을 함께한대도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 모두를 안다 해도 주변 환경과, 당사자의 관계성에 따라 개인이 알 수 있는 개인은 그저 수많은 면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인이 된 이후에도, 크라우스는 스티븐을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스티븐 A. 스타페이즈가 어떤 인물인가를 물었을 때, 그를 가리켜 사람들이 내려놓는 평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함께하면 그 누구보다 든든하니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또는 '수틀리면 언제든 우리의 목을 조를 섬뜩한 자다.' 일찍이 그를 신뢰하고 있던 크라우스는 특히 감정 섞인 험담에 가까운 후자의 의견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야만 했는데, 인류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그가 함부로 위험한 인물을 믿어선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혀 위로 험담을 굴리는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라인헤르츠 가는 남을 깎아내리는 소리 따위에 어떤 가치도 두지 말라 가르쳤고, 크라우스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이 한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 그런 크라우스를 아는 듯이 스티븐은 제 뒤편에서 오가는 말들에 대해 어떠한 해명도이나 자기변호도 하지 않았으며, 크라우스 역시 파고들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신뢰 관계에 어떠한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는 관계가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우스, 고민이라도 있나?"

그의 두툼하고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간지러운 숨을 내쉬던 스티븐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나른함을 머금은 채 느리게 깜박인다. 건장한 두 남자가 뒤엉켜 열울 올렸던 침실의 공기는 여전히 뜨끈했다. 

"고민은 아니고. 자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네."

"나?" 

스티븐이 뒤척이자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대신 베고 있던 크라우스의 팔뚝을 간지럽게 스쳤다. 그의 머리는 땀에 젖으면 유독 곱슬기를 더해 이리저리 뻗치곤 했는데, 평소의 빈틈 없는 모습과 대비되는 그 모습이 유독 사랑스러워 보여 크라우스는 매번 무심코 손을 대었다. 오늘 밤도 다르지 않아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얇은 끄트머리를 큰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낮에 걸치고 있던 인공적인 향이 걷히고 남은 본연의 체향만이 풍겨왔다. 두 사람이 침대로 들어오기 전, 그 머리카락에는 낯선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늘 오후 스티븐의 일정에 라이브라의 주요 스폰서 중 하나와의 미팅이 있었음은 크라우스도 잘 알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미팅에서 따내어 온 막대한 지원금과 서포트 이상의 정보는 늘 그래왔듯 들을 수 없었다. 스티븐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완곡하게 돌리고 돌려 끝내 원하는 대답을 유도해내는 기술은 그의 능력이었지, 크라우스가 가진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방법도 없었다.

스티븐의 뒷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끌어당기자, 그는 낮게 웃으며 순순히 다가와 도드라진 송곳니 위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내려놓았다. 수시로 신경성 위통을 겪는 크라우스에게 그건 일종의 주문이었다. 책상 위 서류 더미 마냥 쌓인 고뇌와 갈등, 불안감 따위를 주욱 밀어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는 오롯이 스티븐만이 남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거야."

"아직도 나는 자네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단 생각이 들었네."

"...뭐야. 내 가장 은밀한 곳들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10분도 안 되어서 그런 소릴."

주문에 이어서는 자연스러운 말 돌리기였다. 송곳니 위에 두어 번 더 입을 맞춘 스티븐이 이번에는 크라우스의 하순을 장난스레 물었다 놓았다. 그는 매번 힘들어서 더는 못한단 말로 크라우스를 진정 시켜 놓고는, 정작 본인이 참지 못하고 다시 자극하곤 했다. 그만큼 연인의 인내심을 믿는 것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크라우스가 인내하고 인내하다 결국 굴복하여 두꺼운 손으로 허리를 움켜쥐는 순간이 그에게는 일종의 정복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욕정에 마냥 몸을 맡길 수 없었다.

"스티븐, 물론 자네가 알아서 하리라 믿네만. 내일부터...."

"자네가 내일부터 없으니 내가 무리하면 안 된다고?"

스티븐의 말마따나 앞으로 2주간은 라이브라의 '극한의 14일' 이었다. 크라우스가 HL을 떠나 전 세계를 돌며 라이브라 활동에 대한 회담, 교섭, 협정 체결 등등을 한 번에 해치워야 하는. 그러니 짐승 같은 체력의 크라우스는 그렇다 쳐도 스티븐을 무리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바쁜 사람이 크라우스의 빈자리까지 채워야 하니, 환계병동의 Dr. 에스테베스처럼 본인을 복제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모자랐다. 

괜찮아, 정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속삭인 스티븐은 눈 깜짝할 사이 몸을 일으켜 크라우스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자 틈 없이 단련된 강인한 육체가 드러났다. 여전히 습기를 머금어 번들거리는 나신이, 그 위를 넓게 기는 붉은 문신이 자극적으로 시야를 어지럽혔다.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기엔 차고도 넘쳤다. 아까 전만 해도 더는 손끝도 까딱 못 하겠다며 눈가를 촉촉이 적시더니 이젠 숨 좀 돌렸다고 이렇게 도발을 해온단 말인가. 머리 양옆에 손을 짚고 상체를 숙여오는 스티븐을 올려다보며, 더는 견디기 어려워진 크라우스의 눈가가 가녀리게 떨려왔다.

"2주 치 당겨서 할까, 크라우스."

나른하게 떨어진 한 마디를 끝으로 두 사람의 몸이 뒤집혔다. 


"몸조심하고 잘 다녀와, 크라우스. 필요한 자료 더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고."

"알겠네."

"뭐든 문제 생기면 미련하게 끌어안고 있지 말고 연락하고."

"그렇게 하겠네."

"이쪽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외부에서의 일에 집중해. 재작년처럼 위험할 것 같다고 도중에 돌아오겠다 하면 안 돼. 오히려 내가 곤란해진다고."

이번에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었으나, 크라우스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답하자 스티븐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길베르트와 K.K마저 함께 자리를 비우는 이상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비밀결사는 온전히 스티븐의 손에 맡겨져야만 한다. 매번 부관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애정어린 걱정 사이서 갈등할 것이 분명한데, 결국 그를 굳게 믿어주는 한결같은 면마저 애정을 부풀게 했다. 스티븐은 이대로 성큼 다가가 입을 맞추고 싶어졌지만, 아쉽게도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길베르트와  K.K는 마침 라이브라 내에서 그들의 교제 관계를 아는 둘 뿐인 인물이나, 그렇다고 해서 신경쓰지 않을 순 없다.

"스카페이스, 짜증 나게 웃지 마."

"너무하네.. 왜 또 나한테만."

K.K의 하나뿐인 눈이 못마땅하다는 듯 스티븐을 길게 흘겨봤다. 어서 가자는 그녀의 재촉에도 머뭇거리며 쉬이 계단을 오르지 않던 크라우스가 결국 다시 스티븐에게 말을 걸었다.

"스티븐. 뜬금없는 말인지도 모르겠네만."

"응?"

"나의 부족한 면들을 늘 채워주고, 지탱해 주는 자네에게 항상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네." 

"...갑자기? 아니, 고마워. 하지만 나야말로 항상 자네에게 기대고 있는 걸 크라우스."

스티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갑작스레 진지한 분위기로 끌려 들어왔다 싶었는데, 이어지는 크라우스의 말은 더했다.

"우리의 생에 다음이 있다면,"

"잠, 잠깐만. 뭐야, 뭔데? 왜 여기서 갑자기 무슨 플래그를 세우려는 거야..?!" 

"그때엔 내가 스티븐 자네의 곁에 서서 보필하겠네."

활주로를 스치는 바람이 순간 잠잠해진 것 같았다. 입을 조금 벌린 채 말없이 서 있던 스티븐이 손을 들어 올리고, 제 앞머리를 마구 헤집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했더니. 그를 똑바로 응시해 오는 녹빛의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완전한 진심만을 담아 정면에서 부딪혀 오고 있었다. 그가 그런 눈빛에 약하다는 걸 크라우스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쯤 되면 모른대도 반칙이다.

"내가 어떤 길을 갈 줄 알고?"

"자네라면 나보다 요령 있는 방식으로 옳은 길을 찾겠지."

"나를 과신하는구나."

너무할 정도의 즉답이었나. 크라우스의 시선이 안타깝게 떨구어졌다. 송곳니 사냥꾼 시절, 스티븐을 과신한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 온 크라우스겠지만, 그 본인에게 듣는 건 또 다른 얘기일 것이다. 눈가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에게 스티븐은 맥없이 웃어 보였다. 바로 근처에서 스나이퍼의 시선이 따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네가 함께해준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크라우스"

실례인 줄은 알지만 더 참기 힘들었다.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그대로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크라우스에게 바짝 다가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치 좋은 K.K는 자연스레 시선을 거두고 딴청을 피웠다. 

'네 결혼식 때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으니 이정돈 봐 달라고, K.K.'

 입맞춤은 짧았으나, 그만큼 애틋한 맛이 있어 좋았다. 지난밤에 충분히 달라붙어 있기도 했고. 아쉬움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서곤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니 어서 다녀와서 다시 함께 있어 줘."

비행기에 몸을 싣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몇 마디가 더 오갔다. K.K와 길베르트를 향해서도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자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란 듯 휴대폰이 울렸다. 인사를 마친 스티븐은 전화를 받으며 먼저 몸을 돌렸다. 이번 '극한의 14일'은 캐널 어비스 역에 지하철을 잡아먹는 거대 지네가 출몰했다는 비상 연락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라이브라 결성 초창기에 그런 대화가 오간 적 있다.

"자네는 누군가를 보조하기엔 너무 빛나는 사람이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런 자네가 중심에 섰다면 이보다 틈 없이 완벽한 비밀결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하네."

 크라우스를 보스로 스티븐이 부관 역을 자처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길베르트, K.K, 재프 랜프로, 패트릭 등이 모여 막 손발을 맞추던 시기였다. 그리고 스티븐에게는 조금 멋쩍은 소리지만, 부관이 된 그에 대해 크라우스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송곳니 사냥꾼으로서는 스티븐이 선배였으니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해와 납득은 별개였다.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은데, 크라우스. 라이브라의 멤버들은 내가 아닌 자네의 의지, 정의, 또는 힘에 이끌려서 모였어. 알다시피 나조차도."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그런 능력은 내겐 없어. 그러니 보스는 반드시 자네여야만 해. 그렇게 못 박듯 선언했다. 해가 비추는 양지가 있고, 그림자가 지는 음지가 있다면 그는 이미 후자의 영역에 깊게 몸을 담군 사람이었다. 도리어 녹음을 닮은 눈동자와 마주할 때마다 스티븐은 막을 길 없는 빛에 어두운 속내까지 꿰뚫리는 기분이곤 했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한 인간의 영혼이 진정으로 패배할 일은 결코 없다고 했던가. 

"크라우스, 내가 빛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건 순전히 자네의 빛을 받아 품었기 때문이야."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은 세상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스티븐의 빛은 크라우스라고. 


헬사렘즈 롯. 통칭 HL.

3년 전, 하룻밤 만에 안개 너머로 숨겨진 구 뉴욕은 이계와 연결되어 붕괴, 재구축 되었다. 이후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온갖 물질과 기술, 이치와 능력이 판치는 지옥 같은 도시로  각종 흉악 범죄자, 테러리스트, 거대기업, 종교단체, 마피아, 각국의 첩보 기관 등이 암약하며 향후 천 년의 패권을 다투고 있다. 이런 마경에서 인간의 죽음은 어떤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니 새벽 3시경, 뒷골목에서 벌어진 이 일방적 살육을 진심으로 신경 쓰는 인물이 이 도시에서 스티븐 A. 스타페이즈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건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순전히 이 죽음을 깔끔히 은폐하기 위함에 불과했지만. 

지익-. 소리를 내며 구둣발이 아스팔트 바닥에 문질러졌다. 움직임을 따라 겨울이 기어간 듯 서늘한 얼음이 남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가 선 골목은 냉기와 피비린내, 심장까지 얼어붙어 동상처럼 못 박힌 인영들만이 남아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존재라고는 혈동도의 사용자와 그 앞 엎드려 바닥을 기던 자세 그대로 사지가 얼어붙은 남자 하나였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더는 동족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변이된 모습으로 바르작대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 동료라고 함께 현장에서 구르던 익숙한 얼굴인데, 이따위 몰골이 된 것을 보자니 입안이 썼다. 그보다는 역겨움이 더 컸지만.

"경계점에서 잡았던 놈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말을 걸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뿌옇게 흩어졌다. 이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공간에 사람이 나타났다.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그가 고개를 숙이고 간결하게 보고를 올렸다.

"접선 루트와 유통 라인, 자금 출처까지 필요한 정보는 모두 빼냈습니다."

"꼬리는 잡았군. 우리 쪽에서 접촉하면 얼마나 걸릴 것 같지?"

필요한 단서를 모두 손에 넣었다면 일이 편해진다. 스티븐은 혈동도를 사용해 마지막으로 남은 배신자의 목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그의 일그러진 형체가 쪼그라들기 시작하더니, 그 위를 뒤덮고 있던 얼음들이 조각나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심장은 얼어붙어 제자리에 정지한 그대로 그는 인간이었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먼저 처리된 패거리들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스티븐은 공포에 질린 얼굴 그대로 절명한 옛 동료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인자크의 말에 의하면 내일 점심까지면 됩니다."

"규모와 세력 범위도 재확인해야겠군."

"그 도련님이 없으니 서면으로 전달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지, 점심에 잠깐 사무실에서 나올 수 있으니까."

감 좋은 K.K는 크라우스를 따라갔고, 역시나 소름 끼치는 감을 가진 재프는 어제의 테러저지 임무에서 부상을 입고 잠시 입원한 상태다. 그 둘만 없다면 크게 부담될 건 없었다. 

말하자면, 크라우스가 없는 14일은 스티븐에게 있어서 조직 내 배신자 색출의 기회였다. 오늘로 11일 차. 보스가 자리를 비웠으니 기회라 생각했을 머저리들은 도리어 그의 존재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었음을 몰랐겠지. 라이브라의 이인자는 그들의 리더처럼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잡아낸 배신자들은 제법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머릿수가 있어 며칠 전부터 미리 임무 중인 것으로 처리해두었다. 스케일 적당한 다른 사건을 찾아 해당 임무 중 실종이나 사망 처리로 넘겨두면 그만이다. 정 사건이 없으면 번거롭더라도 직접 일으키는 방법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것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평소처럼 하기에는...."

"하던 대로 처리해. 조금 변질되기야 했지만...보아하니 이젠 인간에 가까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혈액은 채취하는 게 좋겠지."

현장을 정리하고 흔적을 지우는 것이야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사설 부대가 알아서 할 터. 스티븐은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새벽 5시, 냉동 트럭 한 대가 어떠한 방해도 없이 이계로 넘어갔다.  


며칠 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크라우스는 근 14일간 보지 못했던 라이브라 동료들의 면면을 살폈다. 스티븐은 늘 그들과 함께해 왔는데, 왜 새삼 이런 주젯거리가 대화의 중심에 놓였는지 모를 일이다. 시작된 계기는 크라우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대신하여 라이브라를 지휘했던 스티븐에 대해 레오가 감탄하는 소리를 내면서였다.

"스티븐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다재다능이라고 해야 하나. 전투와 서류 업무뿐만 아니라 하시는 일도 많잖아요. 어디에 누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배치하신다는 느낌이고."

크라우스와 분배하던 업무들을 지난 2주간 혼자 감당해 낸 당사자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과로에 절어서도 이곳저곳 전화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크라우스가 사무실에 딸린 수면실로 떠밀었던 것이다. 그 뒤에도 이불 속에서 반딧불이 마냥 액정을 빛내던 스티븐의 휴대폰은 기어이 압수당할 위기에 처해서야 베개 옆에 놓일 수 있었다.

"정보 수집과 운용에도 능해."

가끔은 저조차 물어오지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체인이 첨언했다. 인랑 첩보국 요원이 말한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더 논할 것도 없었다. 어제 막 퇴원한 참인 재프가 그제야 게임기를 내려놓곤 레오를 향해 붕대 감긴 팔을 휘적 흔들었다.

"난 가끔 무섭더라. 너 오기 전에 내가 같이 잠입 임무 한 적이 있었는데 말했나?"

"못 들었는데요."

"눈에 띄면 안 되고, 혈법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길래 난 진짜 얌전히 있었거든? 근데..."

"얌전? 댁이?"

"맞고 싶냐 음모 머리?! 아무튼 그랬는데, 웬 놈이 거슬리게 구니까 스타페이즈 씨가 테이블에 있던 크리스탈 재떨이로 사람 머리를 그냥 쳐 갈기더라니까? 그러곤 우산으로 이렇게-."

별안간 쭉 뻗어진 재프의 검지 손가락이 레오의 눈꺼풀 위를 누르자 가까이에 있던 체인이 다소 거칠게 쳐냈다. 신들의 의안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주의의 시선들이 쏘아져 재프는 손을 거두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게, 안구를 쑤셨다고."

재프의 문장이 꽤 살벌한 내용으로 끝맺어지자, 이번에는 몇몇 시선들이 눈치를 살피듯 크라우스를 향했다. 크라우스는 빈 찻잔을 다시 채워 준 길베르트에게 감사를 표하는 참이었다. 그 모습은 부관의 잔인한 손속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스티븐 씨가 그랬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당신이 그거에 놀랐다는 게 더 신기한데요."

뭐 인마? 난 그래도 좀 머뭇거리거든? 웃기지 마요, 댁이? 소란을 일으키며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다. 산만해지는 분위기를 가르고 제드가 차분하게 말을 정리했다.

"한 마디로 스티븐 씨는 결단력이 강하다는 얘기군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수많은 변수를 고려하시는 폭넓은 시야도 그렇고요."

다들 수긍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이브라의 부관으로서 그가 발휘하는 능력은 광범위하여 분야조차 가리지 않았다. 전투, 지휘, 정보 운용, 경영에 재무까지 손대고 있는 그는 스폰서들을 직접 대면하여 영업까지 하고 있었다. 범인들은 평생에 걸쳐 한 분야씩 파고들어야 할 텐데 스티븐은 그 모든 일에서 전문성을 보이고 있었으니.

"뭐어. 그 스카페이스가 속이 시커멓긴 하지만, 대단하다곤 생각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K.K마저도 짧게 인정했다. 스티븐과 그녀는 전투에서 손발이 잘 맞는 편이라 둘이 페어로 활약한 경험 역시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K.K는 늘 스티븐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기색을 내보이기도 했다. 

크라우스는 세심하고 다정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하지 않았으며, 신경을 기울이는 데에는 자연스레 관찰이 뒤따랐다. 그가 직접 보아 온 스티븐은 마주한 상대의 성격과 성향을 기민하게 파악하여 유리한 상성의 태도를 몸에 두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요소가 없다는 전제 하에 그는 필요하다면 상대가 누구든 호감을 얻어내곤 했다. 단순히 매력적인 얼굴과 목소리, 강인하게 단련된 몸과 능력만의 얘기가 아니다. 송곳니 사냥꾼 시절, 강자의 앞에서만 몸을 숙이던 어느 정보원 앞에서 스티븐이 누구보다 강인하고 고압적인 모습으로 주변을 휘어 잡던 현장에 크라우스는 있었다. 아첨을 좋아하는 상사 앞에서 스티븐은 몸을 낮추고 귀에 달달한 소리들을 늘어놓았고, 소탈한 성정의 간부에게 편안히 웃으며 다가가 친분을 쌓는 것을 보았다. 눈치가 빠르며 약자들에게 관대한 동료를 앞두었을 땐, 스티븐은 평소와 비교될 만큼 어수룩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이 역시 K.K와 스티븐에 대한 얘기다. 이제는 크라우스의 눈에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스티븐의 행동은 마치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이 어떻든, K.K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것이라 외치는 듯 했다. 그러니 무엇을 눈치 챘든, 무엇을 알게 되었든 묵인해 달라는 것처럼.

그의 연인은 환경에 맞추어 제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과도 같았다.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라면 약하게 행동했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맞는 패를 쥐었다. 본성이 어느 쪽인지는 크라우스조차 알 수 없었다. 생명에 우선 순위를 매기며 고립된 생존자들의 구조를 냉정하게 포기하던 스티븐도, 죽어가는 동료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끝을 지켜주던 스티븐도, 희생 된 어린 아이의 차가운 손을 쥐고 비통함을 나누던 그도 모두 크라우스의 곁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송곳니 사냥꾼으로서의 동료이자 파트너였으며, 부관이기도, 이제는 연인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사실 저희가 이렇게 말해도 크라우스 씨 만큼 잘 아는 분은 없겠지만요."

레오의 말이 갑자기 이쪽으로 건네어져 와 크라우스는 잠시 생각에서 벗어났다.

"오래 알아 온 사이이기는 하네. 어릴 적부터."

"엇? 우와. 오래되셨겠다곤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요?"

"하지만 아는 것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지 않을 걸세."

집안끼리 아는 사이였다는 말은 스티븐이 없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라면 이런 주제를 달가워하지도 않을 테니.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더 말을 잇지 않자 다들 궁금해하는 기색들임에도 캐묻지는 않았다. 목숨을 내던져 괴물들과 싸우는 송곳니 사냥꾼 중 기구한 사연 하나 없는 위인은 없었으니. 그중에서도 스티븐은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편이라 유독 비밀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파트너로서 긴 시간 손발을 맞추어 온 크라우스조차 그렇게 느낄 정도니 다른 동료들은 어련할까. 더군다나 스티븐의 과거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정말로 크라우스조차 대부분을 몰랐다. 

그는 달의 뒷면과도 같은 스티븐의 면모를 굳이 파고들려 한 적 없었으나, 이는 절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없음을 의미하진 않았다. 지구의 주변을 돌면서도 달은 제 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선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스티븐이 스스로 보여주고자 하는 어느 한 면뿐으로, 그 너머를 관측할 수는 없었다. 굳이 파고들어 알고자 하면 방법은 없지 않다. 허나 행하지 못한다.

"무슨 대화들을 그렇게 나누고 있어?"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크라우스의 몸이 펄쩍 뛰었다. 어느 틈에 일어나 나왔는지 모를 스티븐이 평소와 같은 매력적인 미소를 걸친 채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크라우스는 본래의 궤도로 돌아와 공전했다. 문득 넓고 단단한 어깨에 작게 떨림이 일었다. 그건 강렬한 예감과도 같았다.

이계의 존재 돈 아를르엘 에루카 풀그루슈. 그 힘이 뻗어있는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신성 존재와도 비견되어 인간은 물론이고 감히 이계의 주민들조차 알현할 수 없는 존재. 동시에 프로스페어 게임을 광적으로 즐기는 애호가이기도 하다.

"F9의 시체 기사를 혼돈 진형으로."

"4의 배교도를 단계 7로 변형하겠소."

"선언. 전역의 속성은 '교활함', '과거'로 하겠네."

또한 크라우스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맞이했을 때 택하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과 시간을 걸고 하는 프로스페어. 얻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에 따라 플레이 시간이 결정되고, 그 시간이 다할 때까지  수십 개의 뇌를 가진 그를 상대로 도망치며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번 게임에서 요구된 시간은 100시간.

'반드시 버텨내야 한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6시간. 크라우스는 코끝을 타고 뚝 뚝 떨어지는 핏물을 무시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몇 주 전부터 HL에서 유전자 변이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불명. 이계인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흉측한 이형으로 변모한다. 모습이 바뀌어도 가지고 있던 이지는 또 그대로여서, 몇몇 이들이 자신의 형상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까지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그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망한 이들의 모든 시신은 어디론가 도난당하듯 사라져 버렸다. 

'스티븐이 1차 변이자의 혈액 샘플을 입수해 오긴 했지만.'

어디서 찾았는지는 끝내 함구하며 밝히지 않았으나, 덕분에 변이 속도를 억제하는 약물은 개발해 낼 수 있었다. 그 성과를 마지막으로 또다시 정체. 라이브라 멤버 모두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뛰었지만 끝내 단서는 찾지 못했다. 특히나 스티븐은 연이은 과로를 견디다 못해 혼절 직전까지 갔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쉴 생각 없이 일하려 들어 보다 못한 K.K가 침상에 묶어버리는 특단의 조치를 내려버렸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발생 경로와 원인, 발생지와 목적도 모두 오리무중인 상태다. 

"크라우스 군."

돈 아를르엘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말을 움직이던 손을 거두고 턱을 괴고 있었다. 크라우스는 테이블 위에 떨리는 손을 짚으며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저 이계인이 유희를 즐기던 중 말을 건 적은 많았지만, 이렇듯 손을 거두고 대화의 기색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이 게임이 끝나고 자네가 얻을 것은 어쩌면 절망뿐일 지도 모르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네만.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네. 이건 벗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세. 드물게 베푸는 나의 호의이기도 하고."

돈 아르르엘의 입이 벌어졌다. 아마도, 웃은 것 같았다.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 이번에 한해 특별히, 원한다면 조건을 변경해 줄 의향이 있네."

"어려운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노인장. 하지만 괜찮소."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한 즉답이었다. 핏물로 더럽혀진 코 아래를 손등으로 닦아낸 라이브라의 보스는 숨을 골랐다. 

"앞으로 26시간을 버텨낸다면, 약속한 모든 정보를 주시오."

번복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크라우스는 굳이 스티븐의 이면을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스티븐은 크라우스의 위성이 되고자 했다. 그는 애정하는 크라우스에게 자신의 어둡지 않은 면만을 보였다. 끝의 끝까지 몰려 다른 선택이 남지 않았을 때 등 뒤의 무고한 인명들을 포기하라 말할 순 있어도 딱 거기까지였다. 만일 둘 중 하나라도 마주하며 돌고 있는 자리를 이탈한다면, 그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끝으로 치달아 갈 수 있음을 알았다. 스티븐은 물론이고, 크라우스조차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비틀렸는지 알 수 없었다. 늘 걸어왔던 궤도 밖으로 떠밀려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라이브라의 보스가 가져온 정보들은 한바탕 헬사렘즈 롯을 뒤집은 이상 현상을 막기에 충분했다. 

변이를 일으키는 가스를 찾아내어 관련자 500명을 검거했으며, 사라진 시신들을 가져간 흑막까지 찾아내었다. 밝혀진 전말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랬다. 불법적 루트로 인육을 즐기던 어느 이계의 권위자는 얼마 전 특출나게 감미로운 맛을 느꼈다. 그간 맛보아 온 일반적인 인육과는 차원이 다른 풍미에 놀란 그는 성분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자신이 섭취한 것이 변이를 일으켰던 인간이었음을 알았다. 변이의 원인은 최근 이계인들 사이에서도 극히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던 특수한 가스. 이를 알게 된 이계인은 그 가스에 변이를 촉진하는 물질과 그 외 이것저것 위험한 성분들을 더한 뒤 수하들을 시켜 인간 세상에 퍼뜨린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변이를 일으킨 뒤 사망한 인간들의 시신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얘기다. 정보를 가져 온 크라우스를 주축으로 라이브라는 HLPD와 협력하여 3일만에 그 이계인을 사살하고, 희생자들의 시신 회수까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러나, 라이브라에 닥쳐 온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스티븐."

이 사건의 시작점이 된 변이 인육의 첫 유통자.

돈 아를르엘이 준 정보들이 가리키는 그 인물이 라이브라의 실권을 쥔 간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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