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전선] 혈계전선 X 트라이건 1

그 다이너에는 수호천사가 산다.

그 수호천사님은 상시거주 무전취식중

 2024년 1월 디페스타 혈계전선 쁘띠존 : 라이브라 한국지부 홍보팀에 참여하여 무료 배포했던 혈계전선 X 트라이건 크로스오버 트라전선 글회지입니다!

장르 : 혈계전선 X 트라이건 크로스오버

관계 및 CP : 혈계전선 올캐릭 + 트라이건 밧울밧

POV : 레오

※울프우드가 표준어를 사용합니다.※

※한글 정발본 번역을 기준으로 합니다. 미셸라, 밧슈 더 스턴피드 등 고유명사※



#Soundtrack

  • A Way Out (Blood Blockade Battlefront OST) - Taisei Iwasaki

  • Sugar Song To Bitter Step - UNISON SQUARE GARDEN


헬로, 미셸라. 잘 지내고 있니?

오빠는 잘 지내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이계와 현세가 교차하는 이 도시 헬사렘즈 로트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꽤 오래되었네.

시골뜨기 같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HL 사람이 다 되었지 뭐야, 하하.

…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장소와, 사람들과, 사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글쎄 이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말이야…….



“젠장!”

“재프 씨!”

재프 렌프로가 흰 잔상을 남기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레오의 몸에 단단한 팔이 휘감김과 동시에 두류혈법 카구츠치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혈향과 부서진 도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스팔트, 먼지 냄새가 콧속에 가득 찼다. 잠시 중력을 잃은 몸이 붕 떠올랐다… 레오와 재프는 그대로 공중을 날아 건물 잔해 더미에 처박혔다.

“쿨럭, 으아…!” 

부서진 파편 속에서, 레오는 요란스레 기침을 뱉어내고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이 도시에 온 지도, 라이브라의 일원이 되어 현장을 구른 지도 꽤 되었다지만,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거리에 패대기쳐지는 건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았다. 온몸이 충격으로 얼얼하고 손과 얼굴에 크고 작은 찰과상이 생기는 일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도 아니고 말이다.  

“콜록…! 재프 씨, 괜찮아요? 독이…!”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진 레오는 재프가 아니었다면 벌써 오장육부가 흩어지고도 남았을 테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빌어먹을 선배가 그를 지켜내 주었으니. 괴생명체가 도로에 부딪히며 발생한 에너지의 반동으로 튕겨나가던 레오를 감쌌던 재프는, 그의 밑에 깔린 채로 건물 잔해에 늘어져 있었다. 흰 머리칼과 옷이 꼬질해지고 콘크리트 조각이 긁고 지나간 뺨과 이마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혈법을 사용하여 재프 본인이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충격을 완화했다는 걸 알지만, 갈색 피부에 난 상처를 보니 레오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잘만 입을 나불대는 걸 보니까 아무 문제 없으신 것 같은데.”

괜히 퉁명스러운 말이 레오에게서 툭 튀어 나갔다.

“어이, 음모 머리. 너 맨홀 뚜껑에 맞아보고 싶지 않냐? 앙? 첫경험 좀 하게 해줘?”

“음, 아뇨. 제가 왜요?”

어쩌면 이렇게 상스러운 인간이 다 있는지. 열이 뻗친 레오는 팔꿈치로 밑에 있는 남자의 명치 부근을 지그시 눌러버렸다.

“아, 아. 비켜, 비… 비켜비켜비켜이망할음모-! 아파! 아프다고!”

“두 분 괜찮으십니까?!” 

그들 곁에 반투명하고 미끈한 청록색 피부를 가진 반어인이 가볍게 착지했다. 제드는 활공을 위해 펼쳐냈던 양 팔 물갈퀴를 접으며 레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찌푸려진 눈꺼풀 없는 어안 위로 한 쌍의 촉각이 미세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레오는 제드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저는 멀쩡해요! 보시다시피……” 레오는 재프(“난 안 괜찮아!”)를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이제 숫제 자리에 누워 시가를 뻑뻑 피워대는 중이었다. “제드 씨도 괜찮으신 것 같네요.”

“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멈춰 서 있기보단 표적 뒤를 쫓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 앞에서 표적이 도시를 박살 내고 있었다. 뒤에서는 두 사람의 실랑이 - “야, 어류. 나도 일으켜줘 봐.” “당신은 손이 없습니까, 발이 없습니까? 척추가 완전히 바스러져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인 겁니까?” - 가 들려왔다. 레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이브라는 타락왕 페무토가 실험으로 만들어 낸 거대 괴생명체를 쫓는 중이었다. 레오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타락왕에 질려버렸다. 이번 달에만 해도 몇 번째란 말이냐… 이 생명체는 15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체에 인간의 팔 네 개, 다리 네 개가 달렸으며, 눈이 없어 시력은 없는 대신 주둥이에서 뻗어 나온 긴 촉수들로 촉각을 이용하여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촉수로 주위를 정신없이 더듬는 행태가 HL의 빽빽한 빌딩 숲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가끔 소리를 내지르는 이유는 초음파를 이용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나 역시 높은 유리창 건물로 좁아터진 HL에서는 초음파가 멋대로 사방에 반사될 터이니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인지, 표적인 괴생명체는 방향도 잡지 못하고 아주 지그재그로 다니며 가는 길목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게다가 네 개의 다리와 팔로 팔족보행하며 추진력을 받아 움직이기에, 덩치에 비해서 빠르기도 무지하게 빨랐다. 괴생명체의 몸체 위쪽에는 말미잘 같은 짧고 작은 촉수들이 빽빽이 나 있었는데, 위에서 공격하려 접근하던 재프와 제드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독성을 가진 것 같다 상황을 보고하면서 급하게 물러났더란다. 밑에서 대기하던 레오는 인이어 무전으로 들리는 둘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을 팔았다가, 도로에 멋대로 몸을 주차하는 말미잘 촉수 초상과학체에 깔려 토마토 페이스트가 될 뻔했다. 그렇게 표적을 놓쳤고…. 지금 이렇게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레오가 널브러져 있는 재프에게 한 소리 하려는 찰나 옆에 선 제드의 촉각이 위협을 감지한 듯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제드가 고개를 돌린 쪽에서부터 점점 커지는 익숙한 배기음이 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바이크가 콘크리트 더미 뒤에서 튀어나왔다.

“K.K 씨다!”

끼기긱, 촤아악-. K.K의 멋들어진 바이크가 화려한 드리프트와 함께 멈춰 섰다.

“뭐 하는 거야? 레오찌, 제드찌! 저게 북쪽으로 이동 중인데 뒤쫓지 않고! 재프찌 거기서 썩 못 일어나?”

“앗, 넵! 저….” K.K의 호통에 재프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자리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옷을 요란스레 털어 댔다. “죄송합니다, 누님!”

레오의 말에는 꼼짝도 안 했을 인간이 전격의 혈탄격투기를 사용하는 라이브라 핵심 멤버에게는 납작 엎드리는 꼴이, 정말 강약약강의 정신을 가진 남자다웠다.

“난 먼저 갈 테니까, 너희도 어서 오도록 해! 스카페이스에게 한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얌마, 너희들도 빠릿하게 움직이지 않고 뭐하냐? 이런 굼뜬 자식들.”

“바로 책임을 저와 레오 군에게 전가하는 태도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저희 사형은.”

“하. 하….”

재프는 그들의 뒷담이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는 그나마 성한 상태로 남아있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골목 벽에는 재프의 스쿠터 람브레타가 피로 만들어진 밧줄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와. 스파이더맨 같아요.”

“그런가요? 제가 스파이더맨은 보질 않았어서요.”

“아, 제드 씨! 마블 영화는 21세기 현대인에게는 교양이나 마찬가지인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스파이더맨은 소니가 판권을 가지고 있긴 한데요. 아니, 이게 아니라. 언제 같이 봐요! 저 DVD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스파이더맨은 이웃들을 도와주러 가기 전에 거미줄을 이용해서 본인 가방을 저런 식으로 벽에 붙여놓는다구요. 재프 씨와 비교하기에는 피터 파커가 너무너무, 몇천 배는 아깝지만요….”

제드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레오의 설명에 집중해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얼굴이었다. 레오는 자신이 신나서 너무 떠들었나 뻘쭘해졌다. 그러는 동안 재프는 람브레타를 끌고 다가왔다.

“야, 물고기! 너는 인마, 니 보드도 안 챙겨가고 뭐 하냐.”

제드는 재프가 던지는 보드를 받아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제드는 도로에 스케이트보드를 던져 놓음과 동시에 킥의 테일 쪽을 발로 밟아 세웠다.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럽고도 그답게 절제된, 언제나처럼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쳇. 레오, 어서 타!”

“예! 알겠습니다!”

레오도 재프 뒷자리의 지정석에 올라탔다.


쓰레기 더미가 반, 정신없이 도망가는 사람과 이계인이 반의반, 시체가 반의반인 거리를 스쿠터와 스케이드보드가 덜덜거리며 질주했다.

[여기는 체인. 목표물이 7 애비뉴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현재는 웨스트 26 스트리트. 곧 25 스트리트로 진입합니다.]

“뭐???!!”

“으악! 뭐예요?!”

“하필 왜 7 애비뉴 남쪽이야? 설마 21 스트리트까지 갈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재프는 체인의 보고에 칼이 바로 목 아래에 겨눠져 있는 사람처럼 꽥꽥댔다. 그의 바로 등 뒤에 있던 레오는 깜짝 놀라 심장이 발끝을 뚫고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오, 마침 잘됐군!] 

인이어 너머로 라이브라의 2인자인, 스티븐 A. 스타페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한시름 덜었다는 투였다. 

[그대로 21 스트리트로 몰고 가면 되겠어! 가까운 멤버 누군가 ‘그 다이너’에 먼저 도착해 협력을 구해주게. GPS에 따르면 지금 가장 그곳에 근접한 멤버가……]

“아까 누님이 죽이는 바이크를 몰고 가셨습니다!”

[GPS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아직도 모르나? 재프, 제드, 레오, 너희 셋! 허튼소리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옙….”

“젠장, 알겠다고요! 갑니다, 가!”

[GPS도 거짓말을 할 수도 있네. 가령 기기를 다른 곳에 놓고 이동했다던가…]

[...크라우스, 방금 농담한 건가…?]

표적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던 K.K나 다른 라이브라 멤버와 다르게, 아직 남쪽에서 미적대고 있던 레오 쪽이 21 스트리트에 가까웠다. 가기 싫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울어대던 재프는 람브레타의 속도를 높였다. 갑작스러운 가속에 뒤로 넘어갈 뻔한 레오는 뒷좌석 손잡이를 더 꽉 붙잡았다.

[우리는 최대한 저 사고뭉치 녀석의 발을 묶어두도록 할 테니! 이크, 다니엘 로 경감.]

스티븐의 무전 배경에서 사이렌 소리와 ‘HLPD다!’하는 고함이 들렸다. HLPD 방탄 경찰차의 앰프 스피커 기계 회로를 한번 거쳐서 들리는 듯한, 잡음이 낀 둔탁한 외침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경감님도 참~. 우리도 쓸만한 정보가 거의 없다니까…. 그거참 까칠하시네-.]

[경감님. 저희도 2시간 전에 받은 조직원의 경보로 출동한 겁니다. 최대한 힘 써 뒤쫓고 있습니다. 협력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목표물을 7 애비뉴 21 스트리트 쪽에….]

크라우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무전이 뚝 끊어졌다. 레오 앞에서 재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얄짤없이 가야만 하는구만.”

“그러면. 땡땡이치려고 하셨나요?”

재프의 투덜거림에 제드가 대꾸했다. 정말로 땡땡이치면 좋을 텐데. 레오는 다이앤 다이너의 수제 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떠올렸다. 건강하지 못하게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지만, 맛은 확실히 보장된…. 고된 임무로 에너지가 다한 건지, 음식을 상상하자마자 배가 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괴물 저지가 먼저였다.

“그것보다, 재프 씨. 반응이 왜 그래요?” 

“보나 마나 그 거리에 또 원한 산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재프 씨는 적이 워낙 많아서. 헬사렘즈 로트 시민의 약 70퍼센트 정도를 적으로 두지 않았던가요?”

“대놓고 앞담이냐? 이것들이 하늘 같은 선배에게!”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본인의 그 성품을 탓하시지요.”

“그보다, 7 애비뉴 21 스트리트라고요?” 레오의 머릿속에서 구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지도와 현재 헬사렘즈 로트의 지도가 펼쳐졌다. “뉴첼시인헬 구역이네요.”

구 맨해튼 첼시 구역이었던 현재의 뉴첼시인헬 구역은 대붕락이 일어나기 이전 대대적인 고가도로 개발로 만들어진 하이라인이나 리틀 아일랜드, 허드슨 야드가 있는 지역으로, 레오가 뉴욕에 방문하게 되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밤낮 가리지 않고 사건이 터지는 HL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영 나지 않았고, 게다가 희한하게도 이 구역은 미드타운이나 헬렘(구 할렘), 로어 이스트 사이드와 같은 HL의 다른 구역에 비해 심각한 사건이 벌어지는 빈도 자체가 적어 업무차 방문할 기회도 적었다. 들리는 농담에 의하면 레인보우 사랑의 힘으로 폭력과 파괴를 막아낸다나 뭐라나.

“여하튼 안돼! 정말 안돼! 내 프리덤 매그넘이 떨어질 거란 말이야!”

“아니, 농담하지 마시라고요!”

“진짜라고!”

“농담이 아니라 진짜라고? 도대체 당신 그곳은 왜 이렇게 수난을 겪는 겁니까!”

레오가 빽 내지르는 소리에 재프는 뭐라 투덜거렸다. 아마 입술을 쭉 내밀고 불퉁해 있을 테다. 정말 어린 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란 말야.”

“예? 뭐라고 하셨어요, 재프 씨?”

“아, 몰라! 거기 사장하고 좀 안 좋은 채무 관계가 있다고!”

“선택지가 없습니다.” 도로 위 콘크리트 조각을 피하기 위해 멀어졌다가 다시 그들 곁에 돌아온 제드가 말했다. “이제 곧 21 스트리트예요.”

“Fxxk!!”


7 애비뉴 21 스트리트 사거리에 가까워지자, 거리에 자리 잡은 다이너가 보였다. 꽤 넓고 커 보이는 때 탄 흰색 이 층짜리 건물에, 살림집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작은 건물이 옥상에 올라가 있는 모양새였다. LGBTQ+ 프랜들리 구역답게 입구에서부터 인도 쪽에 세워둔 막대기까지 무지개 가랜드가 걸려 있었고, 한쪽 창문에는 LOVE & PEACE라는, 동그란 분홍색 네온사인이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레오 일행 뒤쪽으로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거대 괴생명체가 다가왔다. 주변 행인들은 앞다투어 문제의 ‘그 다이너’로 들어가기 바빴다. 일 층도 마찬가지거니와 이층까지 사람들과 이계인들로 우글대는 실루엣이 창 안으로 비쳐 보였다. 

“이런, 썩을.”

재프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람브레타를 세웠다. 간판에 검은색으로 다이너 이름이 선명히 쓰여있었다. Blank Ticket Diner.... 

그리고 가게 입구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여-. 재프 렌프로!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으윽, 울프우드 씨.”

강한 악센트의 영어를 쓰는, 울프우드라 불린 남자는 스티븐과 얼추 비슷한 신장에 슬림하면서도 상당히 덩치가 커 보이는 자로, 무시하지 못할 강한 기개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심플한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베이지색 앞치마를 둘러 무해해 보이는 직원 복장이지만, 팔뚝까지 걷어 올린 셔츠 아래 잘 짜인 전완근이 있었다. 이 사람 엄청난 단련을 했구나, 또는 -HL에 어느 정도 짬이 생긴 레오의 눈에는- 이 사람 진짜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자였다. 잘못 건드리면 저 손아귀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분위기를 풍긴달까. 하긴, 헬사렘즈 로트에서 장사하며 먹고 살려면 보통 성미로는 불가능하리라. 남자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꼬리는 휘어져 웃는 상이었지만,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근방 1m 정도의 기온이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에 똑똑히 말하지 않았나?”

남자는 앞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아주 매끄럽고 빠른 동작으로 피스톨 권총을 꺼내 장전했다. 총구는 재프의 고간에 겨눠졌다.

“히익!”

“다시 눈앞에 나타나면, 내 아주 니놈 거시기를 떼어 버리겠다 했단 말이지.”

“아유, 사장님! 제가 잘못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간드러진 목소리로 아부하던 재프는 다리 사이를 가리고 어기적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레오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쭉 밀었다. 

“잠시만요, 지금 저를 방패 삼으려는 거예요?”

레오는 밀리지 않으려 발뒤꿈치에 힘을 실어 온 몸을 뒤로 밀었다. 어깨에 얹힌 재프의 손을 떼어내려 발버둥 쳐 보았지만, 어설픈 투닥거림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아, 좀! 이 선배를 위해서 막아 줘라. 내가 고자가 되어버리면 어떡하냐고. 그럼 무슨 낙으로 살라는 얘기야?”

“아니, 그럼 저는 총에 맞아도 괜찮고요? 이 사람이 경우가 없어도 너무 심하네!”

“레오 군과 헬사렘즈 로트의 평화를 위해 당신 거기를 희생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걸요.”

“야, 어류. 너 미쳤어?”

“삶의 낙을 얻는 길에는 단발성 쾌감을 얻는 방법 외에도 많은 길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생식기를 잃는다고 쾌감을 얻을 길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허….”

틀린 말은 아니지. 레오는 재프를 올려다봤다. 그는 제대로 얼이 빠져 턱이 잔뜩 늘어나 있었다. 쌤통이었다. 제드는 아주 진지한 어투와 전문적인 용어로 그의 사형을 골려주는 데 도가 터 있었다. 그런 그와 도발에 쉽게 넘어가 흥분하는 재프의 화학 작용을 지켜보는 건 레오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어중간하게 둘 사이에 껴 있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할 말을 못 찾으시네요.” 레오가 말했다.

“ 놈을 혼내줘야 하는데, 너무 급작스러운 어퍼컷이었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앞에 서 있던 다이너 사장 울프우드였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더니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신입이야?”

울프우드는 이 사이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재프를 총으로 위협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유해진 태도였다.

“아, 레오나르도 워치입니다.”

“제드 오브라이언입니다.”

울프우드는 담배에서 입을 때고 씨익 웃었다. 

“이런, 섭섭하네 그래. 후배가 둘이나 들어왔는데 소개는 해줬어야지.”

“인간아, 거시기 떼어버린다매? 내가 어떻게 댁을 찾아옵니까?”

울프우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옆에서 재프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는 이 둘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검은 머리의 다이너 사장과 흰 머리칼의 SS(Silver Shit) 선배가 서로를 분쇄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희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울프우드 씨께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끼친 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에 흠씬 혼쭐을 내놓으셔도 저희는 상관없으니까요….”

“아, 그거.” 울프우드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담배를 낀 손으로 재프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말이야. 이 녀석이 우리 가게 직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굴길래, 접근 금지 으름장을 놓은 거지.” 

“역시 그랬군요.”

레오는 재프를 흘겨봤다. 제드도 가늘게 뜬 어안으로 재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지는 아랫도리에 충실한 재프가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에 지금 이 난리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로렌은 내가 다른 가게를 알아봐 줘서 여기엔 없거든. 그럼 괜찮으려나. 뭐, 무엇보다 너희 양반들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울프우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는 양손으로 허리께를 짚고 뒤를 돌아봤다. 가게에는 여전히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노파심에 여쭤보는 겁니다만. 이 가게의 위치와 상징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로부터요.”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위쪽을 쳐다보았다. 무지개색 삼각형 가랜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셀로판지 같은 코팅된 종이로 만들어진 것인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혹시 상대의 성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구신 건 아니겠죠?”

제드는 싸늘한 눈빛으로 재프를 바라봤다. 예스의 y자라도 튀어나온다면 바로 목을 썰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재프는 눈을 치떴다.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재프는 진짜로 서운하다는 기색이었다. “이 도시는 구 뉴욕이야. 상대의 성적 지향성을 존중하는 건 기본 중 기본이지. 나 같은 연애 고수에게는 더욱 그렇고. 로렌은 본인이 바이라고 했어! 그러면 나도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당신 입에서 ‘상대를 존중한다’와 같은 말이 나온다는 게 그다지 믿기지 않는군요.” 제드가 말했다.

“연애 고수라니. 자기 객관화가 더 필요해 보이네요. 어쨌든 그 가능성이 0.5 퍼센트 정도로 수렴하는데도 귀찮게 굴었다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대꾸하자마자 레오는 재프에게 헤드락이 걸렸다. 레오는 캑캑거리며 버둥댔다.

“하하하!”

“뭐, 뭡니까. 그 웃음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는 울프우드에 재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응했다. 그는 레오를 휘감았던 팔의 힘을 풀었다. 울프우드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전보다 더 신나 보여서 말이야. 또래 남자애들이 새로 들어와서 그런 건가?”

“오?” 레오는 재프의 계속되는 괴롭힘으로 짜증이 나 있던 상태였다. 그런 그가 재프의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전에는 신나지 않으셨구나~ 그렇구나~ 외로우셨던 거죠? 저희가 있는 지금이 훨씬 좋죠, 그렇죠? 아야!”

재프가 레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레오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재프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도로에서 강한 진동이 전해져 오는 바람에 정신이 팔렸다. 발과 다리가 찌릿거리며 울리더니 진동이 점점 커져 몸 전체를 둥둥 울렸다.

[재프, 레오나르도, 제드. 합류 지점인가?]

“예. 크라우스 씨. 지금 대기 중입니다.”

크라우스의 무전에 제드가 살짝 뒤로 돌아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좋네. 여기는 약 3분 후 도달하네.]

[잠깐만! 브로디, 해머어어!]

평소와 같이 크라우스의 차분한 브리핑 너머로 스티븐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하하! 그쪽으로 바로 보낼게!]

엄청나게 밝은 목소리의 주인은 혈식장갑을 능력으로 쓰며, 델도로 브로디의 숙주인 도그 해머였다. 초 이상 범죄자 보호 구속시설인 팬도럼에서 시한 보석을 허가받아 출소한 모양이었다.

[그만둬, 이 바보들아아아…!]

스티븐의 절규가 무색하게, 브로디와 해머가 냅다 집어 던진 초거대 괴생명체는 공중을 날아와 ‘Blank Ticket Diner’와 1km 남짓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파편들이 마구 튀었다. 그 생명체는 촉수가 얼음으로 얼려져 있었으며, 몸체 곳곳이 잡아 뜯어지고 구멍이 뚫려있었다. 다른 라이브라 멤버들의 작품이리라. 

“여기로 보내면, 저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죠? 울프우드 씨…?”

이제 그 괴물은 비척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도로 아스팔트에 발톱이 박혀 으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드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다이너 식당이지 않습니까. 저런 거대한 생명체를 무슨 수로 방어한다는 말입니까?”

“참, 나. 너희들 헬사렘즈 로트에 산 지 꽤 되지 않았냐?” 재프는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잘 기억해 둬. HL… 아니,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고. 거 설명 좀 해주쇼, 울프우드 씨.”

“그게 말이지. 내 가게는 말이야.” 

울프우드라 불린 남자는 여유롭게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옆에서 촉수 괴생명체가 뛰어올랐다.

“재프 씨.”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다급한 제드의 외침에 이어 괴생명체의 그림자가 위에 드리워졌다. 바로 떨어질 것이다. 이곳에. 그런데도 다이너 사장과 재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오는 재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목구멍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 레오는 금색도 은색도 아닌, 올리브색이 섞인 오묘한 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재프는 때때로 지어 보이던 결연한 표정을, 임무를 함께 할 때, 생사의 기로에 마주쳤을 때, 답지 않게 선배로서 명령을 내릴 때 지어 보이던 그 표정을 지었다. 너무 자주, 오랜 시간 동안 붙어있던 탓일까, 레오는 재프의 얼굴이 선명히 읽혔다. 똑똑히 보라고. 능력을 써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후-. 다이너 사장은 머금었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레오는 [신들의 의안]을 떴다.

“수호천사가 지켜주고 있으니까.”

콰광-! 남자가 씩 웃으며 말함과 동시에 거대 괴생명체가 엄청난 충격파를 만들어 내며 그들 위로 내려앉았다. 레오는 제드가 혈법으로 피를 넓게 펼쳐 막아보려고 하는 모습, 소동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서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는 재프와 울프우드라는 남자의 모습, 옆으로 지나가는 충격파에 휩쓸릴까 재프의 재킷을 붙잡은 손을 더욱 세게 쥐는 레오 자신의 손의 모습을, [신들의 의안]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보았다. ‘옆으로 지나쳐가는’ 충격파. 그게 핵심이었다. 레오의 의안에는 다이너의 옥상 부근에서부터 건물을 돔 형태로 덮고 일대 도로와, 울프우드, 그리고 그들에게까지 뻗어져 있는 빛이 보였다. 하얀색으로 굉장히 밝게 빛나는….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할 기현상이었다. 그 빛이 방패막으로 작용하여 충격파를 완화하며 옆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주변 거리가 부서지긴 했지만, 분산된 힘으로 피해가 최소화된 듯했다. 물론 그들과 가게, 가게 안 사람들도 멀쩡했다.

그때 무언가가 하늘에서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레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냈다. 깃털이었다. 깃대에 보송한 솜털이 달리고 위로 탄력있는 깃이 나 있는, 아름답게 반짝이는 새하얀 깃털이었다. 

“우와, 이건.”

단순히 빛으로 이루어진 방어 장치라 생각했지만, 무수한 줄기로 뻗어져 있는 여러 쌍의 날개였다. 마치 격하게 움직이는 식물 덩굴처럼 쉴 새 없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천사인가…?” 

“거, 라이브라 청년. 지금 뭘 보는 건가?” 

“헉.”

검은 남자가 피스톨 권총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레오의 허벅지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남자의 의뭉스럽지만 허허스러운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빨을 드러낸 거대하고 사나운 늑대 같은 짐승이 레오를 물고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 흉흉한 기운만이 풍겼다. 레오의 등골 아래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좌악 올라오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가 본 ‘천사인지 뭔지 모를 존재’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저 사람의 중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斗㐬血法. 刃身之 4, 紅蓮骨喰.]

두류 혈투술의 대검이 레오와 남자 사이를 막았다. 제드 또한 든든하게 뒤에 서서 레오의 어깨를 쥐었다. 남자의 기운이 가려지자, 레오는 참고 있었던 숨을 내뱉었다.

“형씨. 이 녀석이 싸움질 못 하고 전투에 영 도움은 안 된다 해도, 우리 라이브라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단 말이지. 보스가 아끼는 녀석이라고. 그렇게 막 총을 들이대도 될 것 같아? 당신들이 어떻게 여기 정착할 수 있었는지 잊었습니까?”

“너야말로 잊었나 본데, 우리는 거래를 한 거라고. 그때 나한테 죽기 직전까지 간 놈이 누구였더라.”

“이보쇼! 죽기 직전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쪽도 만만치 않았거든, 간당간당하기 짝이 없었지!”

재프는 대검을 바닥에 재차 찧으며 성을 냈다. 울프우드의 비웃는 말에 완전히 넘어간 듯했다. 그보다, 이 두 사람이 과거에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고? 재프를 상대로 그 정도 피지컬을 낼 수 있는 인간형(초거대 사이즈 외의 대부분 이계인도 포함) 상대는 레오가 아는 바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었다. 재프에게도 나름대로 상식이 있어서 가게 주인 상대로는 깽판을 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아, 그럼 ‘형편없는 넝마 짝’으로 정정하자고.”

“으아아악! 더 이상 못 참아!”

“뭐 하는 겁니까! 제발 진정하세요! 방금 저 분께 도움을 받아놓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싸우려 달려드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재프는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펄쩍펄쩍 뛰더니, 홍련골식 대검을 뒤로 꺾어 잡으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제드가 재프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리려 했다.

“어라,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머리 좀 컸나? 막 기어오르네. 오냐. 오랜만에 몸 한번 풀어보자!”

무용지물이었다. 울프우드도 함께 몸을 낮추고 전투태세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씨발 그래! 그 존나 크고 거대한 무기도 들고 와보라고!”

호기롭게 외친 재프는 발을 뗐다. 레오는 혹시라도 자신이 말릴 수 있는 가능성을 잡기 위해 재프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강한 힘이 그들을 밀어냈다. 레오는 넘어져 옆으로 두 바퀴쯤 굴렀고, 제드는 그의 곁에서 혈투술로 만들어낸 창을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재프는 언제 앞으로 굴러간 것인지 야외 테이블 의자에 걸쳐져 하반신만 내어놓고 있었다. 울프우드도 마찬가지로 넘어져 있었는데, 그는 테이블과 의자 더미에 박혀 있었다. 

“야!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울프우드는 팔을 휘저으며 허공에 성을 냈다. 레오가 옆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그들이 쫓던 표적이 빛나는 날개들에 칭칭 감겨 고정되어 있었다.

[Escudo del Cero Absoluto!] 

에스메랄다식 혈동도의 얼음이 괴생명체 뒤에서 돋아났다. 쩡-! 얼음 위를 누군가가 강하게 밟는 소리가 청명히 울려펴졌다. 

[Brain Grid Blood Battle Style, Pattern 111.]

레오는 고개를 위로 젖혔다. 너무 뒤로 젖힌 나머지 근육이 뭉쳐 뒷목에 담이 생길 것 같았다. 레오의 눈앞으로 우아하며 완벽한 공격 자세로 공중에 떠 있는 붉고 거대한 인간의 광경이 펼쳐졌다. 그들의, 라이브라의 리더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 그는 너클을 낀 왼손과 왼팔을 뒤로 당겼다. 크라우스는 거대 괴물 위에 착지하며 정확히 조준한 왼손을 뻗었다.

[Kreuzvernichterlanze!]

거대한 혈십자가가 꽃혀들어갔다. 그러나 혈십자가는 거대생명체를 뚫지는 못했다. 환한 빛이-아니, 날개가- 그 생명체를 감싸고 있었다. 레오 곁에 있던 제드가 숨을 들이키고, 혈투술을 사용한 당사자인 크라우스의 눈이 크게 뜨이는 모습을 보니 일반인에게도 빛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레오에게는 생명체를 덮는 날개와, 날개에서 뻗어 나온 가는 깃들이 그것의 두부(頭部) 표피를 뚫고 들어가는 장면이 보였다는 게 다른 점이지만.

혈십자가는 다시 피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크라우스도 땅에 발을 디뎠다. 생명체를 감싸고 꿈틀거리던 날개는 물러나 가게 쪽으로 후퇴했다. ‘그것’은 이제 초거대 괴물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성인의 팔뚝만 한 크기의 이계 존재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다리는 8개가 달리고, 촉수가 등 뒤에 망토처럼 드리워져 있는, 날카로운 작은 이빨이 원형으로 달린 괴기한 모습이었지만, 크기가 무식하게 컸던 전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크억! 재프가 비명을 내질렀다. 체인이 그를 매트 삼아 착지한 것이다. 체인이 그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재프는 흐물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K.K가 바이크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으며, 스티븐과 브로디&해머 또한 크라우스 곁에 나타났다.

“어라.” 새로운 목소리가 난장판에 끼어들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많네.”

금발 머리를 바짝 세우고 오렌지색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나타났다. 울프우드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이 사람도 직원인가? 레오가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남자는 레오를 지나쳐 바싹 말라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이계 생명체에게로 다가갔고, 양손을 무릎 위에 지지하고 몸을 굽혔다.

“아이고…. 가엾기도 해라.”

금발 남자는 스스럼없이 그것을 안아 들었다. 그것은 힘없는 소리를 내며 남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레오는 그 생명체의 작은 팔 몇 개가 남자의 옷을 부여잡는 모습을 보았다. 기시감이 들었다. 레오는 자신이 안아 지키려 했던 핏덩이가 떠올랐다. 그의 가슴이 조여들며 아파왔다.

“밧슈. 걔를 어쩔 셈인 거냐?”

어느새 다가온 울프우드가 밧슈라 불린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밧슈는 아프다며 오두방정을 떨었지만, 품속의 생명체를 놓치지 않았다.

“글쎄.” 밧슈는 촉수를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것처럼, 고로롱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갈 보금자리도 없을 텐데, 우리가 맡을까.”

“뭐?” 울프우드가 밧슈를 다시 주먹으로 내리쳤다. “너, 인마. 그 ‘우리’에 내 의사는 포함되지 않았잖아. 장난해?”

“스턴피드 씨.” 스티븐이 끼어들어 말했다. “이러면 저희 입장이 난감하게 됩니다. 저희가 ‘처리’할 수 있게 넘겨주시죠.”

정말 그때와 비슷해. 레오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무력감이 손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옴을 느꼈다.

“근방 수 개의 스트리트를 오가며 기물 파손과 수백의 사상자를 낸 존재이오. 밧슈 더 스턴피드 공, 협조를 부탁하는 바이오.”

크라우스가 밧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덩치에 기가 눌릴 만도 한데, 밧슈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또 페무토 짓이지?”

“그렇소.”

“이 녀석에게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 애의 세포들은 일주일도 버틸 수 없을 거야. 당신들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마지막은 내가 거두게 해줘.”

“...귀공과 내가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럴 때 우리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오.”

크라우스의 말에 밧슈의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울프우드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신음을 내뱉었다. 스티븐은 ‘HLPD를 볼 면목이….’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레오는 자신의 고집으로 지키고 싶었으나 능력 부족으로 끝내 지키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났다. 나는 부족했지만, 저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크라우스 씨! 저…. 어쩌면 저 분에게 맡기는 게 좋은 방법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생명체에게 죄가 있는가? 없는가? 레오는 모른다. 그가 쉬이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떨리는 숨을 내쉬는 존재를 보니 연민이 솟아났다. 이 연민을 죽여야 하는데, 레오는 도저히 그러할 수 없었다…. 레오는 크라우스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크라우스는 사려 깊은 눈을 레오에게 맞추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 쪽을 향한 밧슈의 선글라스에서 빙글, 빛이 한번 반짝였다.

“밧슈 더 스턴피드 공. 그럼 부탁하오.”

크라우스가 밧슈에게 손을 내밀었다. 밧슈도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일단 괜찮은 거겠지? 레오는 손의 떨림을 멈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레오의 머리 위로 팔이 턱하고 얹어졌다. 

“아~ 이제 임무 종료한 겁니까? 그런 겁니까? 배고픈데 뭐 좀 먹고 가면 안 됩니까? 울프우드 씨?”

팔의 주인은 재프였다. 레오는 위에서 들려오는 심드렁한 목소리에 긴장이 쭉 빠졌다.

“저 소란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리긴 할 텐데. 그래도 다들 저녁이나 드시고 가시죠.” 울프우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재프를 가리켰다. “넌 안돼. 원숭이.”

“아니, 밧슈 씨. 당신 파트너 좀 보세요! 맨날 날 쫓아내서 밧슈 씨를 보러 올 수도 없게 하잖아!”

“그러네, 가게 출입 금지당한 지 1년 7개월 13일 하고도 3시간 정도 지났나?”

“...밧슈 씨. 가끔 댁이 진짜 무서운 거 압니까? 제 본능이 막 경고하던데.”

레오는 재프의 우스꽝스러운 태도에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헛기침하며 참아냈다. 임무 종료와 후처리를 지시하는 스티븐의 외침을 배경으로, 라이브라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또 한 건 해결했군요. 레오 군, 괜찮습니까?”

인간과 다른 제드의 표정은 감정을 읽기 쉽지 않았지만, 레오는 그가 걱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HL에서 겪는 일들이 괴로워도, 레오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버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다.

“완벽히 괜찮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제드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그는 레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럼 전 사후 정리하러 가보겠습니다. 늦으면 또 늦었다고 사형이 난리를 칠 테니까요.”

“야, 어류-.”

보셨죠? 라고 말하는 듯 제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재프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 울피. 진짜 오랜만이야. 한 달 만인가?”

“K.K. 마크랑 케인은 잘 지내요? 유키토시 씨는요? 가족들과 좀 더 자주 오고 그래요.”

“그럴까? 2주에 한 번은 올까 봐. 우리 잘생긴 울피 얼굴을 더 자주 봐야 하는데~.”

“어. 이거, 유키토시 씨가 질투하는 거 아닌지 몰라.”

“에이. 어때! 다들 임자가 있는데!”

반대편 테이블에서 K.K와 울프우드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일단락된 현장에서 벗어나 ‘Blank Ticket Diner’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 총을 겨눈 게 미안하다며 울프우드가 레오에게 초콜릿케이크를 건네기도 했고,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뻗어 있던 밧슈를 울프우드가 무를 뽑듯 뽑아 드는 소동도 있었다. 지금은 공격을 피하고자 가게 안으로 모였던 인파가 빠져나가 비교적 한산했다. 

“가게 안은 금연 구역입니다~.”

밧슈가 테이블 위에 -엄청난 양의- 나폴리탄 스파게티와 볶음밥, 샐러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레오 앞자리에 앉아 시가를 꺼내 불을 붙이려던 재프는 밧슈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좀 봐줘요, 밧슈 씨.”

“시가까지 피우면, 울프우드가 진짜로 쫓아낼걸?”

“아, 진짜.”

재프는 투덜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 타일에 의자 다리가 거칠게 긁혔다. 재프는 레오 옆에 앉아있던 제드의 손을 혈사로 감더니 끌어당겼다. 제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레오와 재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물고기, 너도 따라와.”

“예? 제가 왜요?”

“잠만 말고 따라와라. 이 하늘 같은 선배가 청승맞게 혼자 시가나 피우게 놔둘 셈이야?”

“예? 제가 무슨 상관이에요. 질척대지 마시죠.”

재프는 제드를 질질 끌고 나갔다. 도어벨이 딸랑이고, 문이 닫혔다. 재프의 자리는 밧슈가 차지했다.

“저래 봬도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른 녀석이라니까. 안 그래?”

“네? 재프 씨요?”

레오는 창밖을 바라봤다. 재프는 야외 테이블 의자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었고, 제드는 팔짱을 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재프는 레오와 밧슈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레오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그래. 감탄스러울 정도로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녀석이야. 게다가 크라우스나 스티븐 다음으로 나, 아니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니까. 우리 의도는 금방 알아차리지.”

밧슈의 어려 보이는 얼굴에 친밀한 듯 떨어지는 상사들의 호칭이 낯설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

테이블에 팔을 대고 얼굴을 괴는 밧슈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어깨에는 그가 살려놓은 생명체가 앉아서 꾸벅대며 졸고 있었다.

“밧슈 더 스턴피드라고 해. 저쪽은 내 파트너, 니콜라스 D. 울프우드.”

“이름을 여쭤본 게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레오는 침을 삼켰다. 무릎 위에서 말아 쥔 주먹 사이로 바지의 천이 구겨지고, 손바닥에 손톱이 박혔다.

“밧슈 씨는 강하신 거죠. 지키고자 하는 자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요. 저는, 저는. 도망만 치는 비겁자에 지키려던 아이들도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 밧슈는 맞잡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레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도 밧슈 씨처럼 강해지면, 그러면 되는 걸까요?”

레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오. 난 네가 나처럼 되진 않았으면 좋겠어. 난 더욱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거든.” 밧슈는 깍지를 낀 손의 엄지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나도 도망만 친 비겁자였지. 선택을 내리기 보류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걸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선택도 많지만, 글쎄.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보이는 길이 그 길밖에 없었던 적도 많은 것 같아.”

“밧슈 씨….”

“하하! 이런. 변명하는 것 같네. 음, 하지만 레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많거든.” 밧슈는 맞은편 테이블 쪽을 건너 봤다가 다시 레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보다 가장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도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밧슈는 레오에게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동그란 오렌지색 선글라스 너머로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아래에 레오에게는 어렵고,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이 모든 걸 알게 될 운명의 장난일까. 레오는 본능적으로 [신들의 의안]을 발동시켰다. 레오가 가진 [신들의 의안]이 보여주는 밧슈의 오라는 일반적인 인간들과 달랐다. 제드의 오라나, 이계인들, 블러드 브리드와도 달랐다. 다이너를 지켜주었던 그 빛과 똑같았다. 찡긋, 밧슈는 레오에게 윙크를 보냈다. 


미셸라. 세상에는 정말로 수호천사가 있었던 거야. 

세간에서 신들도 버려버린, 흡사 지옥과 뒤엉킨 모양새라고 악평이 자자한 이 헬사렘즈 로트에,

새카맣고 이상한 사장이 운영하는 사거리 이층 다이너 하나를 지키는.

To Be Continued…?


닫는 노래는 당연하게도 Sugar Song To Bitter 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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