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이 나만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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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해 (2)

너네가 대화를 안해서 내가 판을 깔았다

*10층계에 오른 뒤로 캐릭터에 대한 개인적 해석이 많습니다. 거울방과 해피엔딩 묘리, 해방 이후 윤소현까지 참고했어요.

"만들어진 인격끼리 완벽하게 놀아나버렸네."

실컷 울고나더니 지만 홀가분한지 한가하게 소감이나 남긴다. '거미' 뿐 아니라 철혈군주로서의 가면도 내려놓고 퉁퉁 부은 눈으로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숨기지않고있다. 딱딱하고 고압적인 말투마저 걷어낸 백금군주는... 그냥 평범하게 젊은 여자같기도 했다.

"이제와서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자기소개를 할까?"

"뭐?"

진심이다. 농담도 뭣도 아닌 그냥 순수하게 자기소개를 하고싶다는 마음. 탑을 등정하기는 했지만 정복하지도 못했고 돌파한것도 아니다. 여기는 아직 탑이며, 스킬은 그대로 작동하고있으니 나는 알 수 밖에 없다. 나의 어이없다는 반응은 괘념치 않는 듯 제 할 말 만 마저하기 시작했다. 그래. 백금군주고 나발이고 저 지 혼자 생각하고 씨부리는 성격은 어디 안 가는거다.

"내 이름은 윤소현이야. 서울탑 출신이자 영원탑 출신이고."

"내가 놀아나야 하는거냐?"

나도모르게 피가 끓어 절로 노성이 담긴 투로 말했으나 역시나 가뿐히 무시하고 평이하게 답했다.

"놀아나다니. 드디어 탑의 영주와 사냥꾼, 그 모든 역할을 벗어나 완전한 개인이 되었는데. 탑이 물리적으로 놓아주지 않았을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데?"

"우리같은 소리..."

"어쩔 수 없어. 단 둘 만 남았고, 달리 떠날 곳도 없는걸?"

그러니까... 등정은 끝났다. 그러나 탑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는다는 선택지는 내가 막았다. 남은 선택지는 둘이서 살아남는거니 잘 지내보자라는건가? 편리한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놀아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뚜렷하게 다른 길이 있는건 아니다. 회귀로 도망칠 생각말라고 으름장 놓은 주제에 이걸 죽여말아 생각이 스쳤으나 관뒀다.

"됐다. 난 새삼 소개 할 거리도 없어."

그렇게 불꽃 앞을 떠났다. 10층계는 불꽃이 현실을 투영하는 영역, 윤소현이라고 주장하는 백금... 씨발, 윤소현과나는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지웠기 때문인지 굶어죽지 않았다. '별지기'라고 주장하던 기생지기무리도 사라지고 일부 생존자와 서울탑 출신 등정자 둘 만 남은 10층계의 풍경은 조잡했다. 강력한 의지로 현실의 모습을 고정하지도, 통일된 별세계를 상상하지도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무계획하게 상상하는 미래에 대한 투영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겠나.

더이상 영주가 아니라던 윤소현이 머무는 자리는 서울탑과 비슷한 풍경으로 채워졌다. 대신 기생종의 위협없이 평화롭게 도시를 구성하는 풍경이. 인근에 머문자들이 제법 마음에 들어한 모양인지 그 풍경이 일그러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부 인원의 불안감을 투영한건지 소매치기따위의 사소한 사건이 벌어질 뿐. 나라고 다르지않았다. 이전 '거미'의 영역이었던 골목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살풍경스럽지만 견고했다. 작은 싸움에도 종잇장처럼 부서지던 연약한 판자촌 풍경이 상상력이라는 힘을 덮고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기위해 견고해졌으니까. 헛웃음이 났다. 지긋지긋한 구렁텅이 주제에 무의식 안에 단단히 자리잡았다니. 이래서 성장환경이 중요하다는건가. 뭐, 그건 그거고. 나머지 구역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서울탑과 골목 풍경에 불만족한 생존자들이 일부 떨어져나가 모이거나 또 흩어져 조잡한 세계를 얼기설기 쌓아 자리잡은 몇몇 구역을 제외하고는 무채색의 벌판이었으니까. 마치 조명이 비추는 땅과 그렇지 않은 땅 같은 꼬락서니였다. 단지, 9층계 이하 세계의 '지하'같이 위험한 그늘이 되는건 아니었다. 계단 꼭대기의 불꽃이 직접 비추는 땅이 죽음의 어둠으로 물들진 않으니까. 그치만 또 모르지.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충분히 가능해질지.

며칠이나 지났는진 모르지만 대충 그런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불꽃을 대면하고 살아나온 단 둘의 등정자는 각자의 영역에서 알게모르게 영주 비스무리한 존재가 되었다. 철저히 개인이 되어 살아남겠다는 듯 굴었던 윤소현 역시 -주장에 따르면 회귀하면서 몇 번이고 반복한-지도자의 삶이 완전히 떨어져나가지 않은건지 따르겠다는 이들을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과 지위를 나누고싶지 않다는 듯 '촌장'이라고 자칭했다. 기껏해야 마을대표정도만 하겠다는 뜻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않았다. 골목에서 하연화와 거미다리를 이끌고, 반역하고, '백금군주'의 죽음 선포 후 원정대장으로 8층계를 넘는 기간동안 지도자 역할을 했으니까. 다만 나는 '호시절'과 비슷한 풍경을 그려내는 윤소현과 달리 꽤 강압적인 조직 분위기였다. 타인에게 이지를 맡기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파시즘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였다는 뜻이다. 그들은 나를 '수령'이라고 부르고싶어했다. 나는 이 손바닥만한 곳에서 무슨 거창한 헛소리를 하느냐 일축하고 '골목대장'이라고 부르게했다. 애들 장난같은 유치한 짓거리에 딱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처음엔 작은 반발이이나 싶었지만 무시하니 금방 정리됐다. 제멋대로 거창한 호칭 붙이려는 시도야 있었다. 내 앞에서 직접 언급하면 작살냈을 뿐이다. 어차피 모두가 자신을 '생존자'라고 굳게 믿는 이상 죽지 않으니 원래는 죽었을만한 폭력도 아무렇지않게 했다. 아무래도 그냥 평범한 폭력보다 잔인한 폭력이 효과적인 법. 내 방식의 최대 효율은 고통과 살인밖에 없으니까. 강제로 평화를 떠안는다해서 갑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

"'서울탑'은 어쩌고왔어?"

"'서울탑'이 아니야. 그랬으면 자리비우자마자 풍경이 이지러졌겠지."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인상쓰고 툴툴거리는 말투로 반박하는 이는 오랜만에 대면하는 윤소현이었다. 아, 그래. 모두가 합심하여 만든 풍경이라서 대표가 없어도 각자의 공통된 의지로 유지되는 마을이시다? 영주의 삶을 되새기게 하는 단어가 거슬린 모양이다. 놀리는 맛이 있겠어. 자주 써먹어야지.

"자주 써먹겠다는 표정 관두면 좋겠는데."

"내가 왜? 마을이장놀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반사적으로 그떡이는게 재수없다.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좋아. 나는 애초에 지배자감이 아니야. 그냥 평화롭게 살아남고싶었던 소시민일 뿐이지."

"퍽이나."

"'골목대장'께서는 만족하시나?"

"별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윤소현과 묘리-나는 묘리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호민으로 살겠다는 결정도 선언도 하지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묘리였다.-는 10층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뿔뿔이 마을 들 중 가장 큰 세력 둘을 차지하고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증명하듯 그간 등정에 성공한 이들이 꽤 합류했다. 그들도 처음엔 맞서려고했고, 불꽃을 대면하고, '미리내가 아니다.'는 대답에 미쳐날뛰었다. 그리고 이내 포기하고 순응하거나 다시 탑 아래로 가 영웅놀이를 하러 떠났다. 순응한자들은 너른 무채색 벌판을 채우는 점을 추가하거나 이미 있는 점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며 '서울촌장'도 '골목대장'도 호칭에 비해 큰 영역과 주민을 다스리는 이가 되었다. 이래서야 기생지기가 있던 10층계와 뭐가 다른건지. 심지어 10층계의 주민들은 노화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건지 현재가 유지된다는 믿음을 가진건지 늙지도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현상유지가 가능했다. 그야말로 수천년일지 수만년일지 모를 시간동안 순서를 기다린다며 시간만 질질 끌어댄 기생지기들과 완전히 같았다. 이런 상념을 들여다본다는 듯 가만히 눈을 마주쳐오던 윤소현이 그 생각을 끊어냈다.

"변화가 필요해."

"그래서? 가장 큰 두 세력의 우두머리끼리 대화가 필요하다는거야?"

"정확해."

"평가하지마. 재수없어."

"그냥 맞다고 한건데."

"상처받은 표정하지마. 진짜 짜증나니까."

"죽일생각이야?"

"시험하는거냐?"

눈썹에 힘이 들어가자 윤소현이 양 손을 들었다. 그런식의 변화는 아니다는 의미로 받았다. 조금이라도 더 도발했으면 송곳을 던졌을거다. 선을 아니까 적당히 끊은거겠지.

"무슨 변화를 원해서 온건데. 가장 규모가 큰 두 촌락의 피튀기는 갈등이 아니고서야 평화적 교류나 규합을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가장 큰 덩어리 하나를 만들어봐야 급속도로 정체할 뿐인걸 뻔히 알잖아? 이미 두 덩어리, 그것도 서울탑의 번화가와 슬럼가를 똑 떼온 양 그대로인 덩어리끼리 모여봐야 크게 달라질 껀덕지도 없어."

"그야 당연하지. 난 그보다 개인적인 변화가 필요해서 왔어. 마을 단위야 틀이 잡힌 이상 알아서 유지하겠지. 두 마을 촌장과 대장이 아예 없어지지 않고서야. 사라진대도 다음, 그 다음, 또 그 다음의 누군가가 있을거고."

"이미 다 물려주고 왔다는 뜻이네."

"'골목'에는 없다는 듯 말하는데?"

"하... 그래. 내가 배워먹은 게 누구였는데. 그래서, 나와 관계를 바꾸고 싶다는건 뭔데."

"두 번 거절당하고 싶지 않으니 다음에 말해도 될까?"

"뭐?"

'백금군주'는 말을 하다 말더라도 핵심 용건은 다 전달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숨겼다. 너무 모든 걸 공유하면 제멋대로 판단하거나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아무리 윤소현은 그런 신비로운 지배자를 관뒀다고 한들 아예 말을 안할 뿐 아니라 심지어 여부를 묻는다고?

"너, 나한테 눈치본거냐?"

"그건 말하기 곤란한데."

"여기서 딱잘라 말하지 못하면 긍정인걸 알텐데."

"그렇게 되긴 하네."

"무슨 수작이야? 두 번 거절이라니. 자기소개 얘기냐?"

"..."

심지어 대답도 못한다 이거지. 이렇게 소심한 면모도 다 있는줄은 차마 몰랐었네. '백금군주'였을 땐 말이야. 모든 패를 다 보여준거나 마찬가지다. 윤소현은 더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숨길게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윤소현이 내게 바라는건 골목의 암살자, 원정대장, 골목대장 모든 지위를 버리고 온전히 '백호민' 개인으로서 인간적 관계를 가지고싶다... 라는 말이다.

"아주 남자한테 고백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네. 수줍은 사춘기 소녀 나셨어."

여기서 얼굴 벌개지지 말라고! 나도모르게 격해진 감정에 또 폭력을 휘두를 뻔했다. 지금은 그래선 안됐다. 응? 왜? 왜 지금은 폭력이 안되는거지? 분위기를 깨선 안돼서? 분위기를 지켜야하는 이유는 뭐지?

"야... 씨, 잠깐만."

"야라니, 갑자기 태세전환이 심한데."

"시끄러. '회귀' 씩이나 하신 분이니까 아예 어르신 대접이라도 해줄까봐? '거묵'보다 노인네인거 아니야?"

붉었던 피부가 싹 씼길정도로 정색하는게 꼰대가 따로 없어 떠올랐다. 나이도 서울탑에서 가장 많은 축이었지. 정확히는 사냥꾼 중엔 최고참이었으니까. 나도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려다가 끊긴게 유감스러워 한껏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거다. 그리고.

"뭐야."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상처받은 표정으로 눈시울까지. 왜 이러는건데!

확실한건 분위기를 깼다. 역린까지 제대로 건드려가면서. 그리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윤소현은 다시 서울탑 마을로 가 틀어밖힐거다. 아마 '세 번 째' 교류시도는 내가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지. 그래서야 내가 아직도 거미 수족이던 시절같잖아. 위아래를 나누던 관계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윤소현 역시 그런 위계와 역할을 버리고 개인으로서 관계를 재구축하려던 소기의 목적과 달라지면 만족하지 못할거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먼저 찾아오도록 마냥 기다릴 순 없고. ...기다린다고? 내가?

"무슨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림을 내뱉어버렸다. 그리고 윤소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의 반사적 반응이었지만 결코 말의 내용과 관계없이 내가 음성을 내뱉었기 때문에 든게 아니다. 명백히 '연애'라는 단어에 반응해서 들었다. 그리고 나역시 판단하고 해석함과 동시에 의식하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나까지 동요하는거지? 윤소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단걸 눈치채면서 괜히 긴장감까지 들기시작했다. 끌려간다는 생각에 반발심으로 몸을 휘두르기 직전상태가 되어 주먹을 꽉 쥐어내렸다.

"연애라면 문제인가?"

"무슨 뜻이야?"

"연애를 하면 문제냐는 거야."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탑을 등정할 수 없다는 말을 여러번 하긴했지만 지금은 광증으로 내뱉는 말은 아니야."

"그러니까, 윤소현이라고 자기소개 할 때 부터 나한테 고백을 하신거였다?"

"노골적으로 말하니 확실히 부끄러워지는데."

"그게 그렇게 딱 전환이 돼? 살인병기로 키웠다가, 멋대로 후계자 점찍고 죽으려 했다가, 등정을 했지만 끝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함께 머물게 되니까 갑자기 연인이 되자? 정황상 영원히 고립된 세계에서 머물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주 혼인을 하자고 하지그래?"

"그건 한 번에 진행하기 너무 아쉽네."

"연애랑 결혼을 나누는게 문제야!?"

"앞으로 얼마나 10층계에 머무를지 모르니 최대한 핵심 사건은 나눠놓아야지. 분배가 중요하다고?"

"그 와중에 그런걸 계산하고있냐는 말이야!"

"나는 여러번 살고있어. 매 삶을 다시 결정하고, 나누는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어."

"미친사람이라는 말을 길게도 하네."

"미친사람은 싫은가?"

"그럼 내가 너를 좋아하겠냐?"

"왜지? 너를 회심의 병기로 키워 나를 죽이게 유도했다가 비밀을 들키고 실패했을 뿐 아니라 나의 사후 후계자로 지목한걸 알아낸데다가 그대로 10층계까지 올라온 과정 때문에?"

"잘 아네!"

"아쉽게도 회귀자는 지난 사건은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을 진행해야만 해."

"그래서, 나한테 회귀자의 장단을 맞춰달라는거냐?"

"나는 지금 백금군주가 아니다. 너는 여전히 역천의 귀신인가?"

이자식, 중간부터 은근히 말투를 바꿨다. 냉정함을 위한 습관인가? 일부러 9층계 이하의 모습을 회상하게 만들려는 수작인가. 자신은 이렇게 딱딱 나누는게 가능하다는 과시인가?

"역천의 귀신은 무슨! 난 뒈진적도 없고 하늘 높이 솓은 탑의 등정도 끝났어. 더이상 중력을 거스를 능력도 없어서 여기 머물고있는 꼴이지."

"'묘리'로서?"

"그래. 넌 지금의 삶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윤소현을 딱 떼어내는게 가능할지몰라도 나는 묘리와 백호민을 쪼개지 못해. 몸도 많이 바뀌었다고."

"죽어서도 별로 세상에 남는 세계에서 성별이 대수인가."

"왜, 회귀하면 몸의 성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냐?"

"내가 기억하는 대상 중엔 묘리가 유일하다."

"아 그래. 거 참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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