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이 나만 좋아해
유료

대화 해(3)

허심탄회 :품은 생각을 터놓고 말할 만큼 아무 거리낌이 없고 솔직함.

"하지말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거냐? 무시하는거냐?"

"너도 딱히 누구 말을 듣는편은 아니잖니?"

"수준 맞춰준다는거냐?"

"쿵짝이 잘 맞는다고 말하지."

"혼자 궁합도 보고있어? 점쟁이 노릇하다 푹 빠졌군."

"이전에도 점쟁이가 아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후... 그래. 내가 받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랑 붙어살기라도 할거냐?"

"글쎄. 사실 나도 처음이라서. 뭘해야할지 모르겠네. 10층계에서라니 더더욱."

"계획이 없을 때가 다 있군."

"드디어 삶을 누리게 되었지."

"참나."

그런데, 듣다보니 묘하단 말이지. 듣다보니도 아니다. 계속해서 윤소현의 감정선은 어긋난 방향이 있었다. 물론 스스로도 인정 할 만큼 비틀리고 미친 사람이라 감정이 비뚫게밖에 구성되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되고 개연성도 충분하다. 그런데말이야...

"언제부터지? 그리고 그거 정말 '나'라는 개인을 향한 감정 맞아?"

이거다. '백금군주'가 나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한 부분도 다 '스킬차단' 때문이었고, '묘리'가 '윤소현'의 변수가 된 계기도 '회귀'를 알게되고 원정대장 자리를 차지한 이후. 그리고 9층계를 넘은 뒤의 새로운 세상이다. 그러니까 윤소현이 계속해서 말하는 '새로운 것'이라는 '세상'은 단지 변수라서 그런게 아니냐는 질문이다. 모처럼 되새겨가며 설명하는 이유는, 윤소현 역시 뚜렷하게 구분 한 상태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생각에 빠진 걸 보니 크게 틀린 가정도 아니어보이고.

"...그게 의미있나?"

정정하지. 저 재수없는 눈은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 끝까지 재수없는 부분은 일관적일 모양이군.

"너 역시 '거미'를 꽤나 진심으로 잘 따르던 시절이 있었지. 그게 스승으로서의 존경이었는지 은인에 대한 존중이었는지 살기위해서 그냥 부하로서 충실해본 것이었던 상관없어. 당시에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게 중요한거지.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너는 여러번 나에게 '특별한' 누군가였고, 난 네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 동지애일지 동경일지 애정일지 중요치 않아. 난 그런 모든 감정을 모아서 하나의 형태로 결론내린거야. 대답은 지금 받을 수 있나?"

"하... 그래 진솔하고 구체적인 '고백' 잘 받았어. 근데 좀 초조한거같다? 이렇게 찾아온 계기가 또 있나?"

"확실히."

"이럴 땐 좀 한 번에 말해줄 수 있지 않아?"

"머릿속에 받아들이는 과정도 간격이 있어야 효과적인걸."

"아, 그래."

"난 기생종이 될 생각이 없다. 그리고 너 또한 그리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기생종이 되는건 간단하게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면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에서의 삶에 '권태'가 끼어들어선 안돼. 포기하고 주저앉는건 한 순간이니까."

"그 수단 중 하나가 나다?"

"관계야 말로 가장 큰 변화의 계기이고 지속성도 강하니까 말이야. 게다가 긴장감까지 유지한다면 적어도 지루한 사이는 안되지 않겠어?"

"내가 언제 죽이려들지 모른다는걸 알고도 찾아오셨다. 참 신뢰성넘치는 관계네."

"모든 극단적 감정은 방향만 바꾸면 반전되기 마련이니까."

"언제부턴지 말이 참 많아졌어."

"기회는 놓치지 않고 소중히 잡는 편이거든."

"그래. 어차피 거절은 선택지에 없었네?"

"없는건 아니지."

"나를 상대로 도장깨기같은건 받을생각 없어."

"유감이야."

"...호의적 관계이고싶은거 맞냐?"

간헐적 도발이 치고 올 때 마다 발끈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래도 적응하거나 인내하는건 성미에 맞지않았다. 게다가 위협을 느끼지도 약올리며 즐기지도 않고 밍밍한 반응을 보면 맥빠져서 덤빌 생각도 안든다.

"용건 끝났으면 가보지그래?"

"첫 날 부터 바람맞히는건가?"

"바람만 맞고싶으면."

슬슬 인내심이 끝났다는걸 눈치챘는지 윤소현은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고백을 받아준건가? 이게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아마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본인도 처음이라고 했으니. 대충 예상은 된다. 처음엔 그런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테고 이후로는 어차피 다 사라질 관계 의미없었겠지. 해방 될 때 까지는. 여전히 해방은 못 해냈지만.

"데이트를 하지."

"...보통 이렇게 난데없이 등장해서 선언으로 시작하는거였냐?"

이틀만에 등장해서 냅다 본론부터 질러버리는 모습에 어이없어 핀잔을 주니 잠깐 생각하는 모습이다. 아주 잠깐.

"...약속을 잡고 다시올까?"

"...됐다. 가자. 뭐 할지는 생각하고 왔겠지?"

"물론."

웃기는. 아마 또 '나도 처음이다.'라며 이런저런 궁리하다 온거겠지. 골목의 암살자가 정보수집이나 감시를 위해 연인행세하고 다니는 쯤이야 흔한 일이었다는걸 모를리 없을텐데 멋대로 나역시 경험없는 취급이다. 마음이 동하지않으면 세지 않는다는 생각인가? ...의외로 가능성있군.

안어울리게 천진한 생각을 했을 데이트 상대는 나름 즐겁다는 걸음으로 인솔하기 시작했다. 손을 잡겠냐는 제안에 거절할까 잠깐 뜸들였지만 마음대로 하게 뒀다. 그렇게 손을 잡고 척척 걸어가더니... 그렇게 걸었다. 골목을 벗어나 새서울-서울탑이 아니니까 새서울이랜다. 나는 골목에 새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까지 걷더니, 도시규모는 아니어도 몇 천 명이 흩어져사는 땅을 걸어서 다 돌 정도는 충분히 걸었다. 덕분에 아주 구석구석까지 새서울의 지금을 샅샅히 알았다. 진짜로 그냥 보여주고싶었던건 아니겠지?

"이게 데이트 계획이었냐?"

"음. 이렇게까지 걸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시찰 내지 정탐으로밖에 안 보였다."

"음. 습관이란게 무서운 모양이야."

"평소에도 다녔냐? 쓸데없는 주목이, 아. 그래."

왕년 거미셨다 이거지. 연금공방 마법사인 영주가 암살자 수장도 겸했다. 누가 그런짓을 누가 하며 또 그게 말이 되느냐 하겠지만 여기 진짜가 있다. 회귀하는 삶이면 가능한가보지. 하여튼 무작정 걷기만 하는 데이트는 여기까지였다. 그렇다고 걸음이 그쳤다는건 아니지만.

"1층계와 맛이 다른가?"

"약간은. 그동안 안 먹어봤냐? 꽤 돌아다닌 듯 말하더니."

"외출이 꼭 섭식을 동반하지는 않지."

"그래 잘났다."

좀 더 걷다가 노점에서 꼬치구이를 먹었다. 외출해서 뭘 먹었다 안 먹었다 하는 대답이 아니어서 진실구분은 무의미했다. 또 말장난이 시작될거같아 따져묻지 않기로했다. 꼬치를 다 먹고 착실히 쓰레기통에 넣은 윤소현은 내 반응에 웃어보였다.

"웃어? 재밌나?"

"재밌지 않을리가. 데이트 하고있지않아? 다른 이들도 아니고 이 둘이서."

복잡한 사연을 가진 짝이라는게 그렇게 재밌어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 뭐, 적대하는 관계도 아니고 많이 좋아해라. 싶은 마음에 대충 반응하며 다시 발을 떼었다. 내가 던진 꼬치는 윤소현이 먹었던 꼬치에 밖혔다. 노점 주인은 다소 불만인 눈치였다. 관심없지만.

"뭘 할 생각이지?"

"계획이 부족하다."

"설마 그냥 걷다보면 뭐가 있겠지 하고 무작정 걸은건 아니겠지?"

'그' 윤소현이다. 아무리 백금군주니 서울탑 영주니 다 때려쳤대도 그럴리가. 이렇게까지 걸을 생각이 아니었다고 했으니 분명 다음 계획이 뭔가 있었을거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건지 몇 가지 주전부리와 음료를 먹으며 시간때운 후 도착한 곳은 외진곳의 한 건물이었다. 손기척 하나 없이 그냥 열고 들어가니 안에있던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모였다. 그리고 눈이 커지나 싶었다가 금방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심기를 거스르는 요동에 바로 경고부터 날렸다.

"시끄러워. 법석 피우지마."

대충 벽 쪽에 있던 몇 명의 머리 위, 머리카락이 조금 잘릴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밖힌 송곳으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촌장자리 넘겨주고 왔다더니?"

"아무래도 설득이 충분하지 못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어느쪽?"

"아직 정확히 정하지 않았어. 선수친거야."

여기 있는건 윤소현의 추종자들이었고 차기 촌장으로 넘어간 데 동의하지 않는 자들, 즉 현 체제에 대한 반동모임이었다. 하여간 언제나 개인에 대한 숭배가 여러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친위대같은게 필요한건 독재자일 때 뿐이다. 현 10층계에선 딱히 집단을 통솔하여 몰아붙일 거대한 목표같은 것도 없으니 지금은 민폐밖에 안된다. 윤소현은 이들을 와해하러 온거다. 일부러 나까지 동반한건 차분히 설득할 의사로 온게 아니라는 뜻이겠지.

"뭐가 그리 급하지? 변화나 분란은 느긋할수록 좋은거 아니었냐?"

"급격한 갈등은 해소 후 무기력이나 집착을 만들기 좋아. 무한히 갈등하는 지옥이 되거나 기생지기 혹은 낙성좌가 넘쳐나는 꼴을 볼 수도 있어."

"적당한 갈등수준으로 통제 할 필요가 있다. 제 버릇 개주는덴 실패했군."

"그래서 실망했나?"

"내가 실망할게 있어보여?"

시답잖은 소리였지만 대충 의도나 분위기를 읽은 몇 명이 벌떡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닥에서 발을 떼는데엔 실패했다. 송곳이 발등 채 바닥에 밖히거나 바닥에서 솓은 백금 바늘이 발을 밤송이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지금부터 새서울에서 추방하겠다."

짧은 선언과 함께 백금화가 허공으로 튀었다. 여기서는 사형집행도 안했을테니 이제 마법을 맘껏 써재낄 수도 없을건데 굳이 사용한건 발언에 힘을 강화하는 목적일거다. 말 뿐인 선언과 집행자의 선언은 다르니까. 발과 바닥이 하나된 이들이 쑥 꺼지듯 사라졌다. 죽인건 아니다. 말 그대로 새서울 밖으로 던져질거다. 남은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나름 10층계에 다다른 실력자였단걸 과시하듯 유무형의 공격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숨을 푹 쉬고 딱 한마디만 남겨줬다. 일부러 짠 것 같아서 기분나쁘기도 하고 구태여 말을 쓸 필요도 없긴했지만. 사전에 맞추지 않은만큼 윤소현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평화적인 방법 모른다."

10층계의 특성상 강제로 내쫒는다는건 정말 어렵다. 게다가 집행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은만큼 '의지'의 영향력이 훨씬 작기도 하고. 그러나 의지를 따른다는건 정신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들은 서울촌장 윤소현의 추종자인 만큼 '추방'이라는 형태로 윤소현에게 거절받았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충격받았다. 게다가 물리적으로 제압된 이들의 의지를 꺾는건 더욱 쉬웠다. 반항하는 이들을 꺾는건 고통이다. 이쪽은 내 전문이지. 본인과 동료의 의지가 뒷받침해주면 죽지는 않는다지만 오히려 죽지않는다는건 더 고통받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의지의 충돌로 현실이 덮어쓰기되건 어쩌건 기억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아픔은 순간적이고어쩌고 간에 강력한 현실이다. 속도전과 고통. 이 둘을 걸고 나를 꺾을 자도, 내가 꺾지못할 자도 없다. 적어도 남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무지렁이 중에서는 말이지!

"정상에 이르를 줄 안다면 독립할 줄도 알아라 철부지들아!"

"흠. 두근두근 데이트가 되었으면 했는데."

"심박수만 늘면 다 두근두근이냐?"

순간 발끈해서 쥔 손에 송곳이 있었다.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대충 내던지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밌어?"

"재밌는 말장난이었다. 발끈했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내던지는 모습도 좋아."

"좋아는 무슨."

진심으로 좋아한다는게 반사적으로 읽혔다. 다른 방향으로 동요해서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 뻔 했지만 이번엔 참았다. 결국 추종자집단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전부 의지를 꺾고 떠나게 만들었다. '골목'을 향하는 이들도 보였지만 무시했다. 진탕이 되건말건 내 알바 아니야.

"다음 번 데이트는 골목에서 할까?"

"뭐 좋은 꼴 있다고."

"그래도 고향같은 모습이지 않아?"

"내가 고향같은걸 좋아할거라 생각해?"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른 구역으로 찾아가볼까?"

"가서 괜한 오해사지나 말고."

"그정도로 관심받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조심 할 생각도 없어."

"어쩔 수 없지."

존중한다는 듯 끄덕였다. 통제 할 생각도 안했다는 듯. 괜시리 재수없다는 생각이 들어 대충 흘기고는 일어났다. 오늘의 데이트는 여기까지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발을 채 떼기도 전에 윤소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묘리."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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