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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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나타나고 많은 것이 달라진 것처럼, 탑은 사라지고 나서도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태양이 나타났고 회로 대부분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하늘과 회로와 스킬이 없는 일상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40년에 가까운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구시대의 청년들은 중년,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날 때부터 탑과 함께 한 아이들은 청년이 되었다. 구시대를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알던 환경과 확연하게 달라진 환경이 낯설었고, 탑과 함께 한 사람들은 환한 낮의 개념과 태양의 존재가 낯설었다. 태양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몇몇 누군가의 막연한 희망과 현실은 달랐다.
그러나 탑이 나타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탑이 사라졌을 때 살아남았다. 멸망한 세상에 절망하며 적응했던 그들은 이제는 살아난 세상에 기뻐하며 적응했다. 한정되어 있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은 적응하고 바꾸어 가며 살아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초가 다가왔다.
“등산?”
“그래. 예전에는 새해가 밝으면 산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기도 했지.”
윤소현은 김형우 대신 옆에 선 하늬를 바라봤다. 하늬는 그 시선을 피하다 설명했다.
“알다시피 처음으로 맞는 새해잖습니까. 우리처럼 구시대 사람들은 해돋이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다 같이 산을 오르자는 말입니까?”
“꼭 다 같이는 아니고 갈 사람만. 그렇지만 갈 수 있다면 다 함께 갔으면 좋겠군.”
마지막은 김형우의 말이었다. 김형우는 말을 내뱉고는 멋쩍어졌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젊었던 그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탑이 나타나기 전에는 갓 스물을 겨우 넘긴, 지금은 쓰지 않는 옛날 말로는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청년이었다. 등산보다는 게임이 좋고, 가족보다는 친구가 더 좋을 시기였기도 했다. 해돋이를 보든 카운트다운을 세든 12시를 기다리는 순간만 설렜고 이후에는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게 되면 그리워진다. 소중히 여길 수 있으니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기회는 흔치 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찾아왔다. 모두가 함께 되찾았다. 그러니 김형우는 소중한 것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윤소현은 해돋이를 보는 구시대의 문화는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사람들을 모으죠.”
윤소현은 이제 영주가 아니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파급력이 강했다. 백호민은 수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당황했다.
“누나, 이 사람들은…….”
“새해를 맞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지.”
백호민은 옹기종기 모여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쩐지 5층계를 등반할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때와 다르게 지금 모인 사람들은 기대감과 설렘으로 고양되어 있었다.
백호민은 자신을 부르는 윤소현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윤소현은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자리는 저기란다.”
모두가 산을 올라가 해돋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산들은 멀기도 하거니와 극심한 추위로 지반이 얼어붙어 위험했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담기에는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서 윤소현이 제안한 대안은 카운트다운이었다. 구시대처럼 화려한 불꽃놀이도, 전광판도, 음악도 없지만, 모두가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모이지 않은, 혹은 모일 수 없는 사람들도 집에서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백호민과 윤소현은 공터가 잘 보이는 높은 계단에 앉았다. 공터에는 언제 갖다 놓았는지 모를 커다란 시계가 있었지만, 시계마저도 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호민아, 어떻지?”
“……예쁘시네요.”
“네 말이 맞다. 진귀한 경험이지 않니?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 말이다.”
윤소현은 공터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저기 모인 수많은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가 아는 사람들도, 그가 모르는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다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처음 보는 세상이겠지.”
그에게는 앞으로도 모든 것이 처음일 것이다. 지금은 생소하고 설레지만, 앞으로는 이것들이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을 즐기고 싶었다. 윤소현은 백호민의 손을 잡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10, 9, 8…….
사람들이 동시에 외치기 시작했다. 윤소현은 백호민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부딪혔다.
6, 5, 4…….
입술이 떨어졌다.
2, 1!
“호민아, 새해 복 많이 받으렴.”
"누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동시에 속삭인 두 사람은 멍해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해는 환호와 웃음으로 시작했다.
원래 쓰고 싶었던 것: 해돋이 등산 가자는 거묵과 꼰대라고 놀리는 하늬와 아직 덜 의젓해서 힘들다고 불평하는 열가락지와 이것도 즐겁다고 말하는 백금군주와 그런 백금군주를 업은 백호민 등등
나온 것: 지금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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