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불꽃 (1)

해방일 기념 연성

- 외전 별이 빛나는 밤 이후 5년 뒤

- 백백 부부 2세 등 날조 설정 다수

단하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주 징글징글하게도 오래 봐 온 녀석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 이 상황을 해명하라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노려보고 있는 녀석,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웃고 있는 녀석, 차분하지만 놀란 것은 매한가지인지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녀석. 단하나는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길,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말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10년 전, 탑이 무너지고 세상은 태양을 되찾았다. 그날을 해방일이라고 명하며 서울시국의 사람들은 매년 큰 축제를 벌였다. 외부 존재들의 도움으로 단하나를 비롯한 백호민들이 유일하게 현실을 느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외부 존재들의 도움을 받은 다섯 번째 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니! 왜 안 돌아가지냐고!”

“단하나! 너 또 무슨 짓 했냐?”

“여, 영원히 못 돌아가면 어쩌죠?”

“여기서 계속 살면 되죵. 좋은 거 아니에요?”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불사자리를 타박한 무제는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리며 쥐어뜯는 단하나의 팔을 내리고 단하나를 진정시키며 단하나에게 달려들려는 묘리를 붙잡았다.

“진정 좀 하십시오! 대마법사님의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따지고 보면 애초에 한 사람은 왕관을 지키기로 했는데 잠시라면 괜찮을 거라며 다 같이 내려오자고 한 건 저 새끼잖아!”

“오, 맞는 말이네용.”

“뭐? 좋다고 가장 먼저 내려간 건 너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네용.”

“누가 저 새끼 입 좀 다물게 해라!”

무제는 불사자리를 제압했고, 작약은 단하나와 묘리를 말리기 바빴다. 그들이 서 있는 길 한복판, 해방일이 지나 날이 밝았는데도 여전히 성좌들의 코스프레를 한 채 큰 소란을 벌이는 모습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치안대장 이신혜를 비롯한 치안대원 장민영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그리고 홍련이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불사자리는 이신혜와 장민영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땅바닥에 엎드려 팔을 꺾이고 있는 모습이 꼴사나웠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이신혜가 미간을 좁히고 그들에게 다가가자, 다른 백호민들도 싸우던 것을 멈추고 이신혜를 바라봤다. 풀려난 불사자리는 바닥에서 일어나 흙먼지를 툴툴 털고 양 손바닥을 내보였다.

“하하! 1년 만입니다, 대장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일단…… 소란스러우니 정리부터 하지. 장민영.”

“네, 대장님.”

장민영이 소동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돌려보냈고, 이신혜는 불사자리를 비롯한 성좌들을 길가로 데려갔다. 언성을 높이며 서로의 탓을 하던 단하나와 묘리도, 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작약도, 불사자리를 제압하고 두 사람을 말리던 무제도 당황해하는 얼굴로 이신혜의 말을 얌전히 따랐다. 오직 불사자리만이 해맑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이신혜에게 훈계를 듣고 자유의 몸이 된 성좌들은 사람이 없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대책을 생각했다. 성좌들의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둘러 모여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지만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이나 생각하라고!”

“여기에서는 스킬도 못 쓰는데 어떻게 해!”

“두 분, 다시 소동을 일으키면 곤란해질 테니 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맞아용. 그리고 햇빛도 따뜻하고 좋은데 꼭 돌아가야 할까요?”

“저 새끼 입 좀 다물게 하라니까!”

“성대를 일시적으로 못 쓰게 만들 수 있는 포션이 있긴 한데…… 돌아갈 수 없으니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어요.”

“……조용히 하겠습니다.”

단하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떡해야 하냐고……. 만약 왕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끝장이다. 왕관이 자유롭게 풀려난다면 당장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세상이 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지만, 단하나는 자신에게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왕관이 자유를 되찾아 곧바로 이 세상을 망가뜨린다면 단하나는…….

한바탕 성을 내다가 굳어진 단하나의 표정을 본 다른 성좌들이 조용히 눈치를 봤다. 묘리도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한숨만 쉬었다. 이럴 거면 진작 승천할 걸 그랬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속으로 생각하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사실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한 방법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 그러나 성좌들 중 누구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규칙을 어겨 강제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섯 명의 백호민들이 왕관을 지키고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왕관에게 문제가 생겼을 것이 분명하니 외부 존재들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머리에 닿는 찬란하고 따뜻한 햇빛을, 피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호흡하고 식음하는 감각을 더는 느낄 수 없다. 무엇보다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복잡한 얼굴로 앉은 다섯 명은 침묵했다. 누군가가 그 말을 꺼낸다면 다른 성좌들은 곧바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백호민은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하다. 과거의 백호민들의 욕망은 ‘해피엔딩’으로 해소되고, 불꽃으로 연소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하는 한 욕망은 계속 생겨난다. 그러니 다 같이 내려가자는 말을 하고, 다들 그에 동의하며 현세로 내려온 것이겠지.

“야.”

그러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침묵을 깨뜨릴 사람은 묘리밖에 없었다. 미련이 많이 남은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해방일에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기를 얻은 묘리와는 달랐을 테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고, 묘리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아……. 월요한테 가보자.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당연하게도 모두가 동의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어느덧 서른이 된 백호민은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성좌들의 모습에 반가워하기보다 당황하기 바빴다. 해방일이 끝났는데도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심상세계와는 달리 살아있는 사람처럼 호흡하며! 백호민은 성좌들이 다 내려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안전보장국장 강하진이 백금탑주 윤소현에게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해서 전달했으니까. 소동의 중심이 단하나를 비롯한 성좌들의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말이다.

백호민의 주위 사람들은 백호민에게 도움을 줬던 성좌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매년 해방일마다 그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강하진이었다. 그는 해방일마다 성좌들이 내려온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당연하게도 전혀 믿지 않았지만, 매년 해방일이 될 때마다 찾아오는 백발 여자에게 시달리다보니 백호민을 추궁해 백발 여자가 성좌 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그가 강하진을 괴롭히는지는 도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백호민은 성좌들을 안으로 들였다. 계속 밖에 세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성좌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백백 부부의 집에는 두 사람의 물건만이 아니라 아기용품들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 백호민이? 그들도 백호민이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도 심상세계의 성좌가 되어 백호민의 삶을 지켜볼 때도 단 한 번도 가정을 꾸리고 아빠라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백호민에게 아이가 생기다니, 성좌들은 진심으로 기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성좌들의 표정에 백호민이 멋쩍게, 그러나 무척이나 행복한 듯이 미소 짓고는 속삭이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아, 그리고 조용히 해주세요. 누나랑 소민이 방금 잠들었거든요.”

어쩐지 피곤해 보이더라니. 성좌들은 떡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단하나가 턱이 빠졌는지 확인하며 작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그…… 흠! 축하한다. 진심이다, 호민아.”

“감사합니다, 단하나 님. 아이 얼굴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지만, 누나랑 같이 방에 있어서 지금은 못 보여드리겠네요.”

“각설하고,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다. 월요.”

묘리가 진중한 얼굴로 단하나와 월요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제야 단하나를 비롯한 성좌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백호민은 성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리는 말을 이었다.

“너 말고 우리의 정체를 아는 자가 더 있나?”

 

결론을 말하자면, 정체를 들켜서 복귀한다는 방법은 실패했다. 도중에 일어난 윤소현의 입에서 성좌들의 이명은 물론 백호민이라는 본명까지 나왔는데도 성좌들은 돌아갈 수 없었다. 성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에 빠지려다 백백 부부의 잠든 아이를 생각하며 겨우 다스렸다. 윤소현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외부 존재에게 이상이 생겼다면 주시은을 통해 전달할 테니 기다려보도록 하죠.”

“고마워요, 누나. 누나는 이제 들어가 보세요. 피곤하시잖아요.”

“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호민아, 주시은에게 연락이 오면 부르렴.”

“네, 누나.”

백호민은 윤소현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곧 나온 백호민은 성좌들 앞에 앉았다. 그러나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소민이, 깼어? 아, 누나는 조금 더 주무세요. 제가 우유 먹이고 다시 재울게요.”

“고맙구나, 호민아.”

“뭘요, 제가 할 일인걸요. 누나는 푹 쉬세요.”

방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와 아기가 칭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거실에 앉은 성좌들의 침묵. 성좌들은 자신들이 이질적인 존재 같았다. 그들이 내려올 수 있을 날이 21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해방일에만 허용되니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만약 외부 존재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마저 허용되지 않겠지.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소현 씨, 백호민. 지금 계십니까?”

주시은이었다.

무제가 문을 열어주었다. 집주인은 아니지만 집주인들은 아이를 보느라 바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주시은은 외부 존재의 일로 온 것이 확실한지 무제와 다른 성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주시은은 급하게 들이닥쳤다. 마침 다시 나온 윤소현이 주시은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역시 외부 존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러더군요.”

주시은은 까맣게 물든 한쪽 눈을 가리켰다. 주시은은 심각한 얼굴로 윤소현과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방에서 나오는 백호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성좌들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불꽃이 미쳤다고요.”


해방일 기념으로 쓴 글입니다. 다 쓰고 9월 29일에 한꺼번에 공개하려고 했는데 스스로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미리 한 편 올립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