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비올] 메타포

메타포 下

by 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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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생각이 많아 보이네. 생각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네?”

“너 생각할 때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것쯤은 알고 있거든?”

“역시 작가라 그런지 관찰력이 좋네요.”

“감탄할 때가 아닐 텐데. 어쨌든 그냥 퇴사해.”

“퇴, 퇴사는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요?!”

비올라는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에델바이스는 힘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둘 사이에는 이해하지 못할 간극이 존재했다.

“쨍알쨍알 시끄럽네.“

“비올라?”

“아, 이제 할 말 끝났으니 나가.”

비올라는 에델바이스를 쫓아냈다. 에델바이스는 허망하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옥색 문패에 금색의 판으로 정성스레 적힌 305라는 숫자. 에델바이스는 벙찐 채로 그 숫자를 바라봤다.

*

새빨간 해가 빌딩 끄트머리에 매달리듯 올라왔다. 이제 제법 밤이 길어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날이 쌀쌀맞아졌다. 에델바이스는 외투를 챙겨 들고 출근했다. 출근해서는 어제처럼 계속 뉴스만 봤다. 이번에는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10월 26일 오전 7시 20분쯤 **호수공원 저수지에서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호수공원이라면 비올라와 좋지 않은 만남을 가진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순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회사 직원들의 시선이 에델바이스에게로 일제히 꽂혔다. 에델바이스는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게 진짜일까? 진짜라면……

퇴근해서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하루 종일 멍한 상태였다. 에델바이스는 침대에 앉아서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생각에 잠긴다. 진짜면 어떡하지? 난 정말로 범죄에… 현실감 떨어지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다시 출근이 목전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침대 위에 사지를 뒤둥근 채로 멍하니 누웠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에 강렬하게 휩싸였다. 겉옷을 챙겨입고 거듭 길거리로 나왔다. 정처 없이 지저분한 도시의 변두리를 걸었다. 해도 미처 다 눈을 뜨지 못한 시각이었다. 거리는 그윽했다.

아니, 경찰에 신고를 하자. 에델바이스는 문득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하필 제비꽃 두 송이가 뚜렷하게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에델바이스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에델바이스가 도착한 곳은 305라고 적힌 그곳이었다. 초인종을 한 번 눌렀다.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도망가 버린 거야? 날 이렇게 만들어두고? 그런 생각이 들자, 에델바이스는 다급해져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기척이 없자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이름을 불렀다.

“비올라. 비올라…!”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에델바이스의 주먹이 서서히 펴지며 문에서 미끄러지듯 툭 떨어졌다. 목구멍에서 이물감이 느껴졌으며,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 내고 싶었다.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그때 문이 열렸다. 비올라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하품을 했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에델바이스를 보고는 문틈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었다. 흥미롭다는 듯 에델바이스의 표정을 관찰하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머리에 꽂았다.

“뭔가 봤나 보네?”

난장판이 되었던 집은 그대로였다. 벽지와 카펫 바닥에는 포도주가 스며들어 있었고 유리 조각은 여전히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책상 주변은 더 너저분해졌고, 벽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은 늘어나 있었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이런저런 접시들로 혼잡한 식탁을 둔 채로 마주 보고 앉았다. 비올라는 와인잔을 기울여 와인을 따랐다. 와인병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865. 에델바이스는 그 숫자를 멍하니 보며 고르게 호흡하려 애썼다. 겨우 진정하고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비올라에게 질문했다.

“뭐, 뭐하고 계셨나요…?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이 시간에 일어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난 작업하다가 잠시 자고 있었어. 왜 찾아온 거야?”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선 고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으며, 책과 메모지는 정신없이 책상 위를 구르고 있었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의 표정을 읽고도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렇게 다급한지, 불안정해 보이는지… 정적이 감돌았다.

“비올라, 저는… 저는…….”

다시 정적. 간간 의자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에델바이스는 이 정적을 견딜 수 없었다.

“저기… 비올라… 무슨 말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비올라는 계속 입을 다물고 와인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에델바이스가 마치 이곳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비올라,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에델바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올라에게로 향했다. 비올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지웠다. 무심한 보랏빛 눈으로 에델바이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뭐라고 아무 말이나…”

“봤지?”

“네?”

“뭘 보고 왔는지나 말해.”

“그냥… 뉴스를 좀 봤어요.”

비올라는 아무 말 없이 의자를 까딱거릴 뿐이었다. 그런 무관심한 태도가 에델바이스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올라… 시키는 대로 말했잖아요….”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앞에 서서 그의 한쪽 어깨를 붙잡았다. 비올라는 살짝 놀라는 듯하다가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발은 내리고 다리를 꼰 채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에델바이스를 올려다봤다.

“제가 당신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에델바이스가 비올라의 양어깨를 잡았고, 비올라는 식탁에 팔을 걸친 채 검지 끝으로 두드렸다. 그 소리에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해하지 못할 거 알려주기도 싫다고. 네가 날 감히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조차 건방져서 짜증나니까.”

에델바이스는 그의 손을 가져가 입가에 대었다. 비올라는 당황하여 손을 빼내려 했지만, 에델바이스가 손을 빼내지 못하도록 꼭 잡았다.

“자, 잠깐.”

“감히… 감히 당신을 이해하려 들지 않을게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알려주세요.”

비올라의 손등에 에델바이스의 코끝이 닿았다. 타인의 숨결이 비올라의 맥박 위에 깃들었다. 그것도 잠시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재빠르게 빼내고 말했다.

“…넌 생각을 하지 마. 그냥 알겠다고 대답해.”

“네, 알겠어요.”

**

그 후로 에델바이스는 비올라가 시키는 일을 몇 가지 처리했다. 물론 비올라의 말대로 회사도 그만두었다. 에델바이스는 하루의 대부분을 비올라의 집에서 머물다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젠 비올라의 집이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아졌고, 반대로 에델바이스의 집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와 간혹 충동적인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취하고 싶을 때 취했으며, 맥박을 느끼고 싶을 땐 맥박을 느꼈다. 도시의 어스름은 항상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한가롭다 못해 권태감마저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비올라가 침대에 일어나 글을 적을 때에 에델바이스는 그의 침대에 누워 한가로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이 증발한 종이 위의 희미한 얼룩 자국이 있었다.

삶의 덧없음. 그것은 영원한 휴식을 갈망하게끔 하였다. 인간이란 무릇 그렇듯 언젠가 소멸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숙명이다. 축복으로 함축되는 지나친 생의 환희는 단지 억압으로 쇄신될 뿐이다. 유기체 특유의 느낌과 밀도를 잃은 것은 실존적 무력감에 놓이게 된다. 그저 공허에 사로잡혀 요람 속에 갇히는 것이다. 에델바이스는 그 씁쓸한 소실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비올라가 소리쳤다.

“됐어!”

에델바이스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에게 노트북을 내밀었다가 금방 곧 빼앗았다.

“아니, 아니지. 인쇄되면 보여줄게.”

“네? 글 완성하신 건가요?”

“응, 너 나랑 출판사 좀 다녀와야겠다.”

***

십일월의 하늘빛은 깊고 경이로웠다. 에델바이스에게 비올라의 집을 제외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출판사에 가서는 에델바이스가 충실히 비올라 알피나 역을 소화하며 원고에 관한 계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비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 에델바이스에게 서류 뭉치 같은 것을 내밀었다. 에델바이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내 글이야. 원고 뽑을 때 한 부 더 뽑았어. 너 보여주려고…”

“아, 감사해요.”

“나 없을 때 읽어!”

“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그대로 각자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비올라가 피곤하니 곁에 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네가 싫은 건 아니라는 사족까지 붙이며 최대한 누그럽게 말했다. 에델바이스는 살짝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에델바이스는 집으로 돌아가 비올라의 원고를 읽어치우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침잠하는 오랜 여정의 끝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에델바이스의 마음에 깊게 박혔다.

****

에델바이스는 그다음 날도 어김없이 비올라의 집을 찾아 나섰다. 비올라의 집은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나를 두고…?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에델바이스는 이 좁은 집에서 비올라의 이름을 불렀다. 의미가 없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비, 비올라… 비올라!”

“왜, 뭐?”

비올라는 막 귀가한 참인 듯했다. 에델바이스는 허겁지겁 비올라에게로 달려갔다.

“비올라, 저…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요?”

“일일히 보고해야 되냐? 그냥 좀 살 게 있어서 나갔다 왔다. 왜.”

비올라는 귀찮다는 듯 에델바이스를 옆으로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올라.”

에델바이스는 서늘한 표정을 뭉개고 평소처럼 잔잔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저 짐가방은 뭐죠?”

“아, 여행이나 갈까 해서. 너도 따라올 거냐?”

“저도 가도 되나요?”

“그래, 도망이나 가자.”

비올라는 장난스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제가 운전해야 하나요, 비올라?”

“그래. 그야 나는 면허가 없으니까.”

“그, 그럼 이 차는…”

“내 차야! 운전이나 해.”

“네, 네에….”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잘 닦인 도로를 달리니 숨통이 탁 트였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이 살짝 열린 차창으로 들어왔다. 문득 비올라가 말을 꺼냈다.

“너, 바다는 본 적 있냐?”

“아, 아뇨…. 하하하, 처음이에요.”

“어떻게 처음일 수가…”

“아니, 저는 계속 추운 내륙에 살았어서…”

“아~ 그렇냐?”

전혀 관심 없다는 말투였다. 비올라는 곧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를 고쳐 앉고 글라스박스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잡동사니 안에서 찾아낸 것은 적포도주 한 명이었다. 에델바이스는 그의 행동을 운전하며 흘긋 훔쳐보았다. 비올라는 그것을 열어 한 모금 마시더니 곧 표정이 이지러졌다. 으… 짧은 투정을 내뱉고는 차창을 시원하게 열어 포도주를 흘려보냈다. 도로에는 핏자국처럼 그들의 궤도가 남았을 것이다.

“저기… 비올라, 항상 궁금했는데요. 왜 와인을 창밖에 버리나요? 방금도 그렇고…”

“메타포.”

“메타포요?”

“넌 글 썼다는 애가 그것도 모르냐?”

“아, 아뇨. 알아요. 메타포…. 본뜻은 숨기고 비유 표현만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래, 잘 아네. 아는 애가 왜 얼타고 그러냐? 대지에 바치는 헌주 같은 거지.”

“음… 어렵네요.”

“그래, 그냥 생각을 하지 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잘 닦인 고속도로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굽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모래 언덕과 함께 윤슬을 양분 삼아 피어난 붉고 동그란 꽃이 보였다. 가히 황홀한 풍경이었다.

“이쯤에서 세워. 다 왔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발대로 차를 멈추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그들은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바다는 저녁노을에 어둡게 번들거렸고, 파도는 대기를 할퀴며 아우성이었다.

바닷가에 있는 비올라 소유의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가니 파도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에델바이스는 짐을 내려두고 오두막 내부를 둘러보았다.

“꽤 관리가 잘 되어있네요!”

“되게 의외라는 듯이 말하네.”

“하하하, 그렇게 들렸나요?”

“잠깐 바다 좀 보고 들어오자. 해 지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네, 좋아요!”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해는 이마만 들이밀고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수평선으로 다가갈수록 고요한 바닷물에 금방 넋을 빼앗겼다. 비올라는 혼자서 걸어가다가 따라오지 않는 에델바이스를 보고 불렀다. 그제야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와 속도를 같이 하여 바닷가로 걸어갔다. 이젠 잿빛에 가까운 햇볕이 파도에 닿을 때면 흩어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도는 모래 위에 쌓인 얄팍한 안개마저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제법 멋지지?”

“네… 정말로요. 이런 풍경은 어디서도 못 볼 거예요.”

처음 보는 바다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면 끝이 없는 것 같아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금방 초라해졌다. 에델바이스는 한참을 비올라 옆에 웅크리고 앉아 파도가 부서지는 모양새를 관찰했다. 날이 추워지며 바닷물이 유난히 어두워지고, 파도가 부서질 때 생기는 포말은 더 창백해졌다. 또 출렁거리는 파도는 지구의 혓바닥 같았다. 파도 소리가 꼭 지구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게 어떨 때는 편안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외롭게 들리기도 했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 꼭 영원 속에 잠긴 것 같았다.

“이제 날이 쌀쌀하네. 이만 들어가자. 바다는 내일 봐도 돼.”

“네, 알겠어요.”

에델바이스는 쭈그렸던 몸을 폈다. 그리고 다시금 비올라와 나란히 걸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

LP판은 삐그덕거리며 턴테이블 위에서 발레하듯 회전했다. 느린 재즈에 약간의 소음이 섞인 채 흘러나왔다. 피아노 선율이 따스한 오두막 안을 메꾸었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와인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창으로 쏟아지는 잠잠한 달빛에 와인잔이 빛났고 그들의 몸마저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에 들이쳤다. 저녁 식사 후의 나른함과 취기로 자세가 풀어졌다. 느슨한 태도로. 지금은 뭐라도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비올라는 항상 저 멀리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거, 칭찬?”

“하하하, 네. 칭찬이라면 칭찬이겠죠…. 비올라는 항상 먼 곳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비올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에델바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탁자 위에 늘어진 와인병이 정적 속에 천천히 쓰러졌다. 오두막의 창문은 바닷바람에 휘청거렸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면서 실내는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천장 위로 달빛의 음영이 일렁거렸다. 곧 흔들리던 창문의 움직임이 멎었다. 먹먹한 파도 소리와 함께 허공의 숨소리가 들렸다. 에델바이스는 불현듯 흩어지는 와디와 같은 감정의 균열을 겪었다. 죄를 관통하는 단죄와 같은 불안감. 편히 쉬고 있을 때면 갑자기 자꾸 떠올랐다. 편안함은 불안감 사이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비올라… 진짜 여기로 도망 온 건가요?”

“글쎄… 넌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생각을 말해봤자 이해할 수 있겠어? 우리 사이에 이해란 게 필요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우린 남인걸. ”

에델바이스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기울여졌다. 큰소리가 나며 의자가 바닥과 부딪혔다. 비올라는 그 소리에 놀라 몸을 잘게 떨었다. 에델바이스가 식탁을 빙 돌아 비올라에게로 다가갔다. 비올라 또한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준비가 되었어요, 비올라.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남이라고 할 지라도… 저는 그간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당신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거든요.”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맞아. 앞으로도 쭉 그럴 테고.”

정말 타인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에델바이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오묘한 소리가 낮게, 매섭게 울려 퍼졌다. 비올라는 그를 보고 당황했다.

“하하하, 타인이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뇨, 이해하지 못하죠. 당신이 옳아요, 비올라. 하지만… 우린 타인이란 단어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해요. 당신이 평범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했듯이요.”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에게 더욱더 다가갔다. 비올라는 그에 따라 자연스레 뒷걸음질 쳤다. 비올라의 등이 벽에 부딪히고 둘 사이의 거리는 한 뼘 채 안 되게 되었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뒤에 있는 벽에 팔뚝을 대었다. 에델바이스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눈동자로 비올라를 바라봤다. 비올라는 그것에 막연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만나고 저는 오히려 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감히 당신을 이해하려 들어도 될까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네… 저는 미치지 않았으니까요.”

이젠 둘 사이의 공간이 한 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끝없이 깊고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서로의 입안을 끊임없이 비우고 채웠다. 마치 신중하게 와인을 따르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몇 번의 움직임 끝에 에델바이스를 살짝 밀쳐냈다. 고개를 숙인 뒤 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닦았다. 다시 벌어진 서로의 틈은 거친 호흡으로 채웠다.

“야, 너는…!“

“비올라, 날 봐요.”

에델바이스는 비올라가 계속 그래왔듯이 말을 잘랐다. 그리고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의 말을 무시했다. 에델바이스는 예상했다는 듯 그의 턱을 움켜쥐어 자신을 마주 보도록 하였다. 다시금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에델바이스는 그의 목덜미를 손으로 받쳤다. 비올라는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서서히 힘을 풀었다. 타인의 가장 내밀한 핏기 어린 살덩이가 맞닿는 이질적인 감각. 날카롭게 숨을 삼키는 소리나 질척한 심장 고동이 흉곽을 뚫고 나올 듯 울렸다. 그 순간 비올라가 에델바이스의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색의 핏빛을 물들인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 정정하자면 비올라는 에델바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눌러 닦았다. 비올라는 손등으로 문질러 에델바이스의 피를 닦으며 그의 품속에 갇혀 숨을 헐떡였다.

“하하하하….”

별안간 에델바이스는 웃었다. 아니, 그건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눈 속에서 고함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뭐냐…?”

“하하하… 그런 게 왜 궁금해요, 비올라? 당신이 절 선택했잖아요.”

비올라는 그 말을 듣고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타인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거였어요, 비올라.”

“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비올라는 에델바이스를 밀치고 오두막을 나섰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갔다. 이슬이 뿌연 안개가 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안개가 스멀거리는 대지 위로는 애처롭게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력에 따라 은빛 실처럼 허공으로 쏟아지는 비. 그 비가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모래언덕을 다 녹여버릴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파도는 어떻게 출렁여야 하는가. 그들의 관계처럼 막연한 물음이었다.

비올라는 비를 맞아내며 파도 앞에 서 있었다. 에델바이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흠칫 떨며 뒤돌아봤다. 고집스러운 녹빛 눈동자가 비올라를 쫓고 있었다.

“넌 부끄럽지도 않냐? 그런 짓을 하고 서도…”

“그런 짓이라뇨? 그저 타인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이었을 뿐이에요. 비올라, 저는…”

“닥쳐! 듣고 싶지 않…”

“비올라!”

윽박질린 달빛은 파도를 부수며 고요를 남겼다. 남고 남아 밀려 내리는 고요 끝에는 파도 소리만이 있었다.

“…당신에겐 타인이 벽을 허물고 들어오는 것조차 두려운 건가요?”

“봐…. 넌 날 이해하지 못하잖아.”

비올라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실망, 서운함, 슬픔, 필히 그것을 덮으려는 듯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에델바이스는 아까 전처럼 비올라에게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에 따라 비올라는 또다시 자연스레 뒷걸음질 쳤다. 비올라의 발목이 물보라에 젖어 든다. 비올라는 주춤거리며 자신의 뒤를 확인했다. 물과 뭍이 구분되지 않았다. 칠흑으로부터 오는 아득한 공포. 순간 그는 발밑으로 깊고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사납고 빠르게 흐르는 물이 굽이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아뇨. 우리는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요. 그때부터요….”

한 차례 큰 파도가 쳤다. 그 파도가 모든 소란을 집어삼켰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마침내 밀려오는 물과 고요를 밟고 섰다. 비올라는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낙조에 휘청이며 뒤로 넘어졌다. 에델바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비올라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 꿇고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본 바닷물을 투명하고 달빛에도 쉬이 빛났다.

“당신은 제 시간 속에 앉아 있었어요… 제 영혼을 망신창이로 만들고… 그럼, 당신의 시간 속에는 제가 있었을까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쩌면……”

얼마나 수두룩한 아둔함을 지나야, 작나 사무치는 암흑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헤아리게 될까.

*******

어둠은 빠르게 흘러간다. 곧 창백하게 얼어붙은 새벽이 온다. 둥글게 말려가는 파도에 둘은 점점 깊은 곳으로 휩쓸려 갔다.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에서 서로를 마주한 그들 사이에는 들숨과 날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 그들의 시간에는 그 누구도 다녀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치 구증처럼.

끝없이 파도를 몰고 오는 짭짤한 바람. 그 바람을 맞으며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자국은 곧 속절없이 포말 속에 묻혀 다정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밀려오는 어둠 속으로 잠겨갔다. 막연하게 침잠하는 오랜 여정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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