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비올] 메타포

메타포 上

by 핀리
81
0
0

살인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잡지사의 에디터. 글 쓰는 사람에겐 적당한 벌이에 꽤 안정적인 직장이다. 잡지사는 광고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고를 얼마나 잘 따내느냐, 얼마나 화제성 있는 기사를 쓰느냐. 그것이 곧 실적이다. 여러 직군의 사람들과 부딪혀 가며 일해야 하고 날마다 원고와 씨름해야 한다.

에디터는 어떻게 보면 한 현장의 감독이다. 의견을 조율하고 여러 사람들을 이어주며 소통해야 한다. 편집장과 좋은 관계를 쌓아야 원고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다. 유명 잡지사는 아는 사람을 알음알음 고용하기 때문에 취직하기 힘들다. 중견 정도의 잡지사에서 공채를 뽑는 편이다. 에델바이스 밀런은 그런 평범한 어느 잡지사의 에디터로 근무 중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들어서는 영 일이 없는 그런 평범한 잡지사.

에델바이스는 업무 시간에 자주 독서를 했다. 레퍼런스를 찾는다는 핑계로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글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델바이스에게는 어느새 그런 의미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지루한 업무 시간을 달래줄 하나의 오락거리가 필요한 것이었다. 에델바이스는 한 작가를 골라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을 즐겼다. 유명 작가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까지. 이번에 읽는 책의 제목은 『희미한 밤사이에』다. 주인공의 허무한 자전적 이야기를 그려낸 줄 알았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퀴어소설임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찝찝하고 하찮은 결말은 바뀌지 않지만. 에델바이스는 따분한 소설책을 덮었다. 그럼에도 읽을거리가 필요했기에 같은 작가의 작품을 읽고 또 읽었다. 시집부터 공상과학소설까지. 다양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다. 서정적인 문체와는 안 어울린다 싶었지만. 그리고 2년 후 어느 날이었다.

“너, 이 작가 소설 아니?”

“네…?”

고개를 돌리니 평소 에델바이스와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소설 한 권을 들고 서 있었다. 거무칙칙한 가죽 표지의 책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책을 받아서 들며 말했다.

“이거 제본 값이 좀 들었겠는데요.”

“얘, 그런 감상 말고. 너는 어쩜…”

“하하하… 그런가요…. 작가가……”

책등의 가죽에는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된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비올라 알피나. 에델바이스는 바늘 자국을 매만지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선배를 바라보며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들어본 적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매일같이 앉아서 글은 안 쓰고 책 읽고 있더만…! 이 작가 요새 유명한 작가야. 추리 소설로 완전 유명해~ 책도 한정판으로 내서 절판된 것도 많고… 아무튼 에디터가 그렇게 유행 못 따라가면 안 된다?”

“그, 그렇죠…. 그런데 이 작가는 왜요?”

“내가 단독 인터뷰 따냈거든.”

선배는 브이를 만들어 자신의 얼굴 옆에 붙였다.

“그런데~ 시간이 안 맞아서. 내가 인터뷰 못 나가게 됐거든? 그래서… 너한테 넘겨주려고. 너니까 넘겨주는 거야? 그 책은 한 번 읽어봐.”

“감사해요. 정말… 마침 편집장님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는데…”

에델바이스는 편집장의 자리를 힐끔거렸다. 언제나 긴 플라스틱 자로 어깨를 안마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항상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있는 인상 좋지 않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였다. 에델바이스는 다시 선배를 바라보고 또 감사 인사를 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는 선배에게 받은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가죽 제본이라… 마치 성경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 주에 인터뷰니까 질문들을 추려놔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올라 알피나의 정보가 필요했다. 에델바이스는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가 어떤 장르를 집필했는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목록을 봤을 때 에델바이스는 떠올려낼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아주 지루하게 읽었던 소설의 작가니까. 『희미한 밤사이에』. 분명 그때 읽었던 소설의 제목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추리 소설의 귀재, 비올라 알피나…>, <추리 소설계의 신성! 비올라 알피나, 그는 누구인가?> 비슷한 수식어의 기사들이 한가득이었다. 바이럴 광고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작가의 생년월일이나 얼굴도 알 수 없었다. 알려진 정보는 오직 이름뿐. 이 이름도 실명인지 가명인지 아직까지도 공방이 분분했다. 흐릿한 정보 사이에서 에델바이스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집으로 달려가 책꽂이를 뒤적거리고 싶었다. 일단은 그 감정을 꾹 참고 사무실에 눌러앉아 있을 뿐이다.

*

에델바이스는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옷을 채 갈아입기도 전에 책꽂이 앞에 서서 책들을 뒤적거렸다. 그 끝에 그의 첫 작품을 찾을 수 있었다. 『희미한 밤사이에』. 에델바이스는 당장 그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그때의 감상이 다시 떠올랐다. 단조로운 문체에 텁텁한 이야기…. 허무하고 찝찝한 결말…. 그제야 에델바이스는 비올라 알피나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그를 기억해 낸 뒤 마침내 그의 신작을 펼쳐 보았다.

“그 문체는 이 이야기를 위해 있었던 거구나….”

그런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리 글을 읽었다.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는 가히 기발한 사건의 연속이라 칭할 수 있었다. 놀라운 서술 트릭과 완급 조절. 에델바이스는 밤을 꼬박 새워 그 소설을 다 읽었고, 책을 덮고 나서 보이는 이름을 주문을 외우듯 되뇌었다. 비올라 알피나…. 에델바이스는 어느새 그의 글에 푹 빠져 있었다. 어쩌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비올라 알피나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모두들 그의 소설에 열광하며 자연스레 그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터뷰도 거절한 채로 대중들의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사이에 그와의 단독 인터뷰를 매거진에 올리게 된 것이다. 에델바이스는 어쩐지 그 인터뷰가 부담되기 시작했다.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 때 에델바이스의 머리 위로 서류철 하나가 툭 올려졌다.

“너무 고민하는 것 같길래 예제 좀 찾아왔다.”

“아, 그런가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항상 신세만 지내요.”

“그럼, 인터뷰 잘 따내는 거밖에 없어. 알아? 최대한 자극적으로 사람들이 잘 볼 것 같은 제목이나 글 말이야. 아무튼, 너도 알아서 하겠지.”

선배는 손을 털털 털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머리에 올려졌던 서류철을 확인해 본다. 빡빡히 적힌 질문 사이에는 짓궂은 농담이아거나 사적인 질문이 절반이었다. 아무리 화제성이 중요하다지만, 인터뷰이에게 이런 질 낮은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해…. 에델바이스는 그런 초라한 결론에 도달했다. 비올라의 인터뷰어가 되었다는 것도, 사적인 질문이 가득한 질문지도,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에델바이스는 일주일 내내 고민하며 고른 질문들을 추려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음료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다시 질문을 읽어보았다. 전체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생각… 작가로서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전부였다. 이러다 편집장한테 깨지는 건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에델바이스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소리에 놀라서 에델바이스를 바라보았다. 에델바이스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싱겁게 웃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하하……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단독 인터뷰인 게 의미 있는 거니까… 질문쯤이야….”

어느새 커피가 식어버렸다. 뜨거웠던 커피는 차갑게 식어 에델바이스의 체온보다 더 낮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다 인터뷰가 펑크나는 건 아닐까, 에델바이스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다리를 떨고 있을 때 좌우간 시선을 빼앗겼다. 정리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카락, 서늘한 제비꽃 같은 눈동자.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손을 빼곡히 채운 반지들. 에델바이스는 순간 그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재래와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에델바이스는 주춤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그가 비올라 알피나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와 에델바이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에델바이스는 몸을 한껏 굽히며 그의 악수 요청에 응했다. 그가 자신의 몫인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면 인터뷰는 시작된다.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공격적인 질문이나 사적인 질문은 모조리 빼고 단순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에델바이스의 잡지사에서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의례적인 질문은 5개 정도면 충분했다. 약속한 인터뷰 시간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에델바이스는 회사 측에서 원하는 질문, 단 하나도 던지지 못했다. 결국 에델바이스는 마지막 질문에서 저질렀다.

“첫 번째 작품인 그 소설 있죠…. 주인공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데 경험담일까요?”

비올라의 표정이 구겨진다. 에델바이스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비올라는 그게 진짜겠냐는 듯 말했다. 소설일 뿐이라고. 자신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설에 집어넣는 비굴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약간 화를 내면서 말이다. 에델바이스는 멋쩍게 웃으며 타자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그의 말을 가다듬었다.

「(웃음) 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은 소설로 적지 않아요. 그러니 제 소설은 소설일 뿐이죠. 자전적이지 않아요.」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비올라에게 질문한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요즘은 계속 추리 소설을 출간하시더라고요. 추리 소설을 주로 집필하는 것에 어떤 이유라도 있나요?”

“당연히 작품은 다 읽고 인터뷰하는 거겠죠?”

비올라가 에델바이스에게 질문했고 에델바이스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자로서 어떻게 읽었는데요?”

“아마… 첫 소설부터 쭉… 사건 서술만 반복하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문체가 특징이었죠….”

에델바이스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진실을 말했다. 그러자 비올라가 목소리를 높이며 제대로 잘 읽었다며 에델바이스를 칭찬했다.

“잘 읽었네! 난 그런 문체를 가지고 있고, 그게 추리소설로 빛을 발한 것뿐이…죠.”

“저는 작가님의 시집도 흥미롭게 읽었거든요. 형식을 파괴하여 시각적으로도 시를 즐길 수 있게 하셨잖아요?”

비올라는 입안으로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확실히 흥미를 가진 채로 에델바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집까지 읽은 사람은 또 처음 보네….”

비올라는 굳이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작가가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내어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그 답변을 끝으로 정해진 인터뷰 시간이 끝났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를 역까지 데려다주고 편집을 위해 다시 회사로 향했다. 어쩐지 기가 쏙 빨린 기분이었다. 축 처진 어깨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에델바이스는 인터뷰를 잡지에 잘 올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

걱정과 달리 에델바이스는 무사히 인터뷰를 실었다. 무사히 올리기만 했을까? 성공적이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판매 부수는 올리기 힘들다고. 에델바이스는 다 비올라 작가님 화제성 덕분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편집장은 잡지사 설립 후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한 것을 기념하여 회식을 선포했다. 에델바이스는 퇴근 후 쩔쩔매며 회사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

에델바이스는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로 귀가했다. 편집장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니 빠지면 섭섭하다고 과할 만큼 와인을 권했기 때문이다. 에델바이스는 지독한 기억을 상기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두운 길목에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에델바이스는 재빠르게 상대에게 사과했지만, 그는 에델바이스를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에델바이스 또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 발에 채는 것이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그것을 주워 그에게 전해줬다.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점멸하는 어두운 가로등 아래.

축축 젖어 드는 손.

잠시간의 적막과 고요.

신문지로 아무렇게나 싼 무언가.

정처 없이 떠도는 음지만이 선명해지는 시간.

그곳에서 배어 나오는 정체 모를 액체.

피? 에델바이스는 놀라서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가 갑자기 에델바이스에게 다가온 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에델바이스의 앞머리를 들추었다. 에델바이스가 당황해서 몸이 뻣뻣하게 굳은 찰나, 그는 입을 열었다.

“꽤 괜찮은 얼굴이네. 찾던 얼굴이야.”

이마에 얹어진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섬찟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모자에 의해 그림자 져 보이지 않았다. 에델바이스가 조심스레 몸을 뒤로 빼려 하자 그가 에델바이스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저쪽 골목에서 적막을 깨는 소란이 들려왔다. 비트가 크게 울리는 힙합 노래와 함께 낄낄거리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에델바이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란 것을.

에델바이스는 우선 그를 이끌고 더 좁고 깊은 골목으로 향했다. 일단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에델바이스는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손에 꼭 쥐었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시끄러운 붐뱁 비트가 멎어들 때 즈음, 에델바이스는 그를 바라봤다. 그제야 그림자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달빛을 부서트리는 서늘한 제비꽃 같은 눈동자.

작가님…? 에델바이스는 그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인상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니까. 압도적인 존재에 신비로움마저 느꼈을지도 모른다. 언어적인 표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저 눈동자. 비올라 알피나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 피에 젖은 익숙한 모양새의 물체는 무엇일까? 에델바이스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익숙한 무게와 모양. 나이프가 분명했다. 에델바이스는 신문지에 싸여진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낸 후 다시 그를 바라봤다.

“알아챘어? 곤란한데.”

“이게 지금… 무슨……”

“우린 지금 공범이 된 거야.”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에델바이스에게 푹 눌러 씌어주었다.

“한 배를 탄 거라고.”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