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밤사이에 우린

240313

by 핀리
39
0
0

시침이 5라는 숫자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시각이었다. 새삼 해가 길어졌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날씨는 쌀쌀맞고 찬 바람이 불지만, 햇빛만큼은 따뜻했다. 나른해지고 게을러지기 딱 좋은 시간이다. 비올라는 6교시 수학시간부터 계속 내리 잤기 때문에 종례도 못 들었다. 에델바이스는 여태껏 자고 있는 비올라를 흔들어 깨웠다. 비올라는 몸이 불규칙적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 깼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짜증을 부렸다.

“…뭐야, 깨우지 말라니까.”

“비올라, 여기서 계속 잘 생각은 아니죠?”

“뭐?”

비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교실에는 비올라와 에델바이스 두 명뿐이었다. 교실은 이미 학생들이 빠져나간 뒤라 한적하고 조용했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에게 음악실 열쇠를 보여주었다.

“벌써 종례했어요. 이미 다들 집에 갔다고요. 저희는 오전 합주 시간에 소란을 피운 것 때문에 음악실 청소를 해야하고요.”

“그건 그때 카터 그 자식이…!”

“저한테 그러셔 봤자 소용 없어요. 저도 비올라 때문에 말려든 거니까…”

“뭐라고?”

“아뇨. 얼른 가자고요.”

청소쯤이야 빨리하고 집으로 가도 되지만, 어쩐지 에델바이스는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을 일찍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피아노 건반도 눌러보고 미적거렸다. 비올라 또한 괜스레 서두르지 않고 에델바이스의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숨이 끊길듯 가녀려지는가 하면 힘차게 건반을 때렸다. 황홀경에 가까운 연주가 끊나고 나면 에델바이스는 멍하니 비올라를 바라봤다.

“뭘 보냐? 이제 기숙사로 가자.”

“앗, 네. 알겠어요.”

노을이 기울어져 세상을 붉게 물들일 즈음에 둘은 기숙사로 향했다. 비올라가 피아노를 정리하고 에델바이스가 커튼을 치고… 그리고 복도로 나오면 아주 고요했다. 아마 학교엔 비올라와 에델바이스, 몇몇의 학생과 선생님들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비올라가 음악실의 문을 잠그고 있을 때 에델바이스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알아챘다. 에델바이스는 형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비올라.”

“어, 그러던가.”

어라? 전화가 안 됐다. 핸드폰을 살펴보니 통화권 이탈이라고 떴다. 핸드폰이 그새 고장날 리는 없고…… 에델바이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에게 말을 걸었다. 전화가 안 된다고. 비올라는 한가로이 복도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들고 햇빛에 투과시키고 있었다. 에델바이스가 말을 걸자 대답하며 돌아봤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봤고 비올라는 에델바이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저게 뭐지? 복도 끝에서 무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온몸에 초록 잎을 두른 듯한… 그것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필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올라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에델바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델바이스가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그것은 비올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올라는 가까스로 그것에게서 몸을 피했다. 얼른 도망쳐야 했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를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 끝까지 달려서 그 후에는? 안 잠긴 교실이 있나?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1층 로비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중앙 현관에는 아까 마주쳤던 것들과 유사하게 생긴 것들이 느릿느릿 걸어다니고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때 비올라가 소리쳤다.

“여기!”

 

다행히 안 잠긴 교실이 하나 있었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그곳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겨우 숨을 골랐다. 20평 남짓한 공간에는 쉬이 진정되지 않는 숨소리만 들어찼다. 한참을 숨을 몰아쉬었을까? 사이렌이 울렸다. 한참이고 울리는 사이렌. 그들은 소리에 홀린 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창 너머로는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복도 밖에서 사락거리는 잎사귀 소리가 멎어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맞물렸다. 그러다 에델바이스가 풀썩 주저앉았다.

 

“어쩌면 좋죠, 비올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비올라는 대충 대꾸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내부를 보아하니 여긴 보건실이었다. 보건 선생님이 업무를 처리하는 책상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 옆에는 의료용 카트가 있었다. 책상 뒤편으로 찬장이 있고 정수기와 개수대, 냉장고도 보였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를 보는 척 마는 척하고 보건실 안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상을 살펴보면 컴퓨터 한 대와 작은 서랍이 있었다. 서랍에는 반창고나 종합감기약, 두통약같이 학생들이 자주 받아 가는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컴퓨터를 작동하면 작동은 잘 됐다. 전기가 끊긴 건 아니었다. 다만, 인터넷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어느새 에델바이스가 옆에 와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뭐야?”

“저… 제가 도울 게 없을까요?”

“거기 주저앉아 있던가 그것쯤은 알아서 해!”

“네, 네에…”

비올라는 괜히 화내는 걸 그만 두고 의료용 카트를 살펴보았다. 거즈나 붕대, 소독에 사용하는 알코올솜, 포비드 요오드 용액, 과산화수소수… 각종 연고들과 파스도 보였다. 핀셋과 의료용 가위와 테이프 같은 용품도 있었다. 가장 아래 칸에는 구급상자도 있다. 얼떨결에 들어온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수확이었다. 찬장에는 약품과 비품을 정리해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찬장에는 트로피가 전시되어 있었다. 비올라는 그것들은 아무런 감흥없이 바라봤다. 저런 건 전시하는 이유가 뭐람.

“비올라, 개수대로 물도 나와요. 수도가 끊긴 건 아닌가 봐요.”

“그렇냐?”

 “네! 옆에는 미니 냉장고도 있는데 딸기랑 오렌지 주스가 있어요.”

에델바이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소개했다. 비올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앗, 딸기는 어쩐지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할 것 같네요. 지금 먹는 게 좋겠어요.”

“먹을 게 넘어가냐?”

 “일단 배가 차야 머리도 돌아간다고요. 이런 걸로도 배가 찰 지는 의문이지만… 이게 어디에요.”

에델바이스는 딸기를 개수대에서 씻어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비올라에게 앉으라고 손짓까지 하니 비올라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본 채로 앉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딸기를 나눠먹었다. 비올라는 턱을 괸 채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이 비척비척 운동장을 걷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배회하는 비이성의 실체들…. 그런데 묘하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완전 어두워졌네요. 불 켜고 올게요, 비올라.”

 

에델바이스가 일어나 전등 스위치로 향했다. 문명의 이기란 편리함을 선사해주기 마련이다. 순식간 주변이 환해졌다. 빛은 사람을 안심시키고는 했다. 그러나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던 에델바이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올라의 뒤로 난 창문에, 텅. 이질적인 소음으로 인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탁, 탁, 탁. 무언가 창문에 달라붙는 소리였다. 비올라는 느릿느릿 뒤돌아 보았다. 뒤를 돌아보면 그것들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미, 미친.”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서로 이리저리 엉켜서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군체 같았다. 에델바이스는 화들짝 놀라서 다시 전등을 껐고, 비올라는 재빨리 커튼을 쳤다. 그것들은 잎사귀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창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다가 곧 멎어가고 고요해졌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깨달았다. 그것들은 빛을 탐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또다시 거친 숨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죄, 죄송해요. 저는 이럴 줄…”

“됐어. 나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알겠냐, 그걸? 피곤하니까 잠이나 자야겠다.”

비올라는 침대로 향해 누웠다. 에델바이스는 어쩔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그를 따라 옆 침대에 누웠다. 비올라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에델바이스 또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생존이라는 것. 일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삶이란 것으로부터 괴리감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240313 1일째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일까…

식물? 식물인간? 좀비인가? 뭐라 정의하기 어렵다.

전화도 안 되고 인터넷도 안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일단 그것은… 소리에 민감하지 않은 것 같다. 다행인가?

그리고 발자국처럼 꽃을 남기고 가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안 되나 보다. 정보가 적다… 일단 여기 숨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나…

밤이 되니까 그것들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 같다.

복도에 꽃향기가 진동한다. 혹시 모르니 맡지 않는 편이 좋겠어.

지금 대충 살펴보기로는 그것이 한 다섯 마리 정도 보였다. 창밖으로는 더 많이…

(수도가 되니까 아직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