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아멜리아 실비에] 영원히 멈춰버린 것

17.02.22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4,639자

※2017.02.22 작업 완료

 

 

 

영원히 멈춰버린 것

 

 

 

1.

 

나는 한동안 너를 만나지 못했다. 너와 연락도 되질 않았고, 언제나 네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연구부 쪽에서도 너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 그 시간을 지냈을까. 드디어 너와 만난 곳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었지. 오랜만에 만난 너는 어딘가 수척해보였다. 그리고 많이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차마 괜찮으냐고 묻지 못했다. 왜냐면 너라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너는 모두의 손을 잡고 싶어 했으니까. 나는 그런 행동은 가치 없는 일이라 여겼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너와 나는 같지 않으니까. 그러나 다만 네가 나와 같은 편으로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2.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다.”

나는 어쩌면 그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처음부터 스파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애써 부정해왔던 것일지도 모르지. 은연중에 네가 아니기를 바라며 너를 믿고 싶어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상황이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을 믿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네가 나를 ‘아멜리아’라고 불렀을 때의 그 놀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위화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위화감 외에도 무엇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이 무엇인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찜찜해했다. …적어도, 네게 무슨 일이 생겼었던 것은 알아채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별 일 아니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싹이 트려던 의심의 씨앗에 가림막을 씌웠다.

 

3.

  

테오의 죽음, 그리고 시작된 전투.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스파이. 스파이가 처음으로 공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너였다. …그런데 있잖아. 하나 알려주자면, 놀랍게도 나는 그 순간 스파이가 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의심을 줄였다. 우리들 사이에 몸을 숨기어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자신의 진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공격할 리가 없다고, 자신을 용의선상에서 지우기 위한 행동이라기엔 너무 뻔한 술수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이미 싹을 틔워버린 의심의 씨앗에게 주려던 물을 그대로 다른 곳에 쏟아버렸다.

길어지던 전투. 전적으로 우리가 불리했었다. …내가 왼손에 주목했던 것은, 사실 별 것 아닌 이유에서였고, 스파이를 찾기 위해 세워둔 그 수많은 가설들 중 하나를 뒷받침하는 증거였을 뿐이었다. 네가 다친 손도 왼손이었고, 내가 공격받은 어깨도 왼쪽 어깨였기 때문. 스파이가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는 이 전투를 자신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목적일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스파이가 왼손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너는 또 손등을 공격당했다. 오른손 손등이었다. 스파이가 왼손잡이고 오른손잡이이고 그 여부를 떠나서, 이미 공격했던 너를 또다시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스파이가 공격한 것은 너였다. 또 너였다. 너일 이유가 없는데 너였다. 굳이 너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아아, 의심의 싹은 그대로 꽃봉오리를 틔우고 활짝 만개해버리고 말았으니.

5.  

 

햇빛을 가리고, 물을 쏟아버리고. 그의 성장을 늦추려 했지만, 애초부터 그의 성장이 막을 수 있긴 했던 것이었던가. 의심의 씨앗은 싹을 틔웠으며, 마침내는 꽃을 피우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의심을 줄이고 싶었다. 줄이려고 애썼다. 모든 증거가, 모든 상황이, 모든 생각이 너를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로 향하던 의심을 줄이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사실은 이미 의심은 확신이 된 지 오래였다. 한참 전부터 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말을 아끼고 생각을 아꼈다. 수많은 다른 가설들을 세워보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가상실험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변함없이 날카롭고 예리하였나니. 결국, 그 씨앗은 열매를 맺었다.

결국은 너였다. 결국에는 너였다. 마침내는, 너였다.

…그리하여, 너였던 것이다.

네가, 스파이였던 것이다.

 

6.

  

처음에, 나를 감싸고 나를 가득 채운 것은, 배신감.

차가운 분노는 바닥에 낮게 가라앉아 내딛는 발자국마다 그 기운이 서리었고,

그러나 이성은 여전히 굳건하고 날카로워 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왜 갑자기 연락도 끊어버리고 행방을 감추었는지. 네가 왜 나를 이름으로 부르며 위화감을 주었는지. 네가 왜 스스로 저의 왼손을 찔렀는지. 네가 왜 다른 이들과 싸우지 않았는지. 모든 게 말끔히 정리되고 나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하, 하고 짧게 내뱉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그런 단말마의 신음뿐이었다. 싸움이 끝난 검은 숲에는 고요함이 찾아왔음에도 고요하지 않았고,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평화롭지 않았다. 종전이 되었음에도 종전인 것 같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간간이 삭막한 바람이 일으키는 약한 소리뿐이었거늘, 검은 숲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 나는 네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놀랍게도 네가 스파이라는 것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신기하지.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내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그쪽이 아니었다. …나는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네가 내게, 우리에게 보여주던 모습은 정말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내가 너희를 빛으로 이끌어주겠다고, 나는 아무리 그래도 친구였던, 친구인 저들과는 싸울 수 없다고, 나는 저들도 걱정된다고, 저들 모두도 품에 끌어안고 가겠다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너의 그런 모습들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그런 모습이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심이라고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밌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너의 가면을 그대로 믿고서 너에게 의지했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느냐고,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연극을 준비해왔던 것이었느냐고, 처음부터 너의 본질은 이런 것이었느냐고. 그래서 얼마나 재밌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생각의 물결들에 나는 휩쓸리어, 하마터면 그 물결에 나 자신을 놓아버릴 뻔하였다. 

그러나 내가 네게 말했듯, 나는 오러, 어둠의 마법과 그 추종자과 싸워 이 세계를 지키는 자. 그리고 너는, 죽음을 먹는 자, 어둠의 마법을 추종하는 자.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었고 그것은 흔들리는 일 없이 굳건했다. 그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그 추종자가 내 친구인 자든, 친구였던 자든, 전혀 초면인 사람이든 그것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언제든지 네게 지팡이를 겨눌 수 있었고, 나는 실제로 네게 지팡이를 겨누려 했다. 그러나 나를 멈춰 세웠던 것은-

 

7.

  

그 다음에, 나를 감싸고 나를 가득 채운 것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마냥 깨어진 생각의 수많은 파편들은 내 곁에서 무섭게 휘몰아치었고,

그러나 이성은 여전히 굳건하고 날카로워 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힘들어보였고, 수척해보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거짓으로라도 즐거웠다고, 재밌었다고 했다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될지 나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는 꼭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내가 계속 몰아붙이고 있었음에도, 너는 자신이 죽음을 먹는 자라고, 완강하게, 나를 밀어내고 거부하려는 것처럼 말했지. …게임은 거기서 끝난 거였어.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힘들어보였을까.

원해서 죽음을 먹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했지, 우리들을 지키고 싶었다고 했지. …너는 우리들을 지키고 싶어서 죽음을 먹는 자가 된 것이라고 했지. 그리고 너는 내게 본인 스스로를 불사조 기사단인 나와 양립할 수 없는 죽음을 먹는 자라고 했지. 그러면 너는 어때. 그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너는 존재할 수 있겠니? 그 둘이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 건 다름 아닌 너 자신이잖아.

8.

  

내가 너와 했던 말다툼을 기억하니, 너는. 내가 너와 나누었던 말을 기억하니, 너는. 너는 어떠한 생각을 했니. 저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마는지, 저들이 내 친구였던 아니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것은 저들이 우리의 적이라는 것뿐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너는 어떤 기분이었어? 네 말을 빌리자면, 그래, 나는 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며 단칼에 잘라버릴 때, 너는 어떤 기분이었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네 앞에서, 내가 다치지 않고 죽지를 않기를 바라는 네 앞에서, 나는 나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 맞아. 그건 사실이야. 군인인 나는 내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너는 어떤 기분이었니. 그러한 나를 보며, 너는 어떤 기분이었니.

내가 보았던 너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느끼고 싶었기에 그리 느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던 것이다, 너는. 저들을 구하고 싶어 하던 너의 모습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는? 저들을 구원해주려 애쓰던 너는. 너는 누구에게서 구원받았습니까? 너는 정말로 구원받았습니까? …혹시, 너는 구원받지 못한 것 아닙니까?

어떠니. 무섭니. 네가 죽음보다도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이었잖니. 하나만을 바라보다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가엾은 사람.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가엾은 사람. 정작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은 찾지 못해서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진, 가엾은 사람. -아아. 이제야 알겠다. 내가 처음에 느꼈던 그 묘한 느낌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내가 저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너의 간절함이었고, 내가 너를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너의 간절함이었다. 왜 이제야 알아챘을까.

네가 내게 말했지. 나는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마는지 그걸 알 수 있을 거라고. …미안. 못 했네. 처음부터 확신을 가졌다면 가능했을까. 나는 너를 의심하기가 싫어서 최대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네게는 독이었을까. 너를 믿었던 것마저도 네게는 독이었을까. 미안.

나는 내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미련도 없으며,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다만 한심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은, 너 같은 경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나의 행동은 오러로서 아주 이상적인 행동이었지만, 너에게는 오히려 너를 깊숙하게 찌르던 비수였다는 것.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사과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아마 이 후회와 자괴감, 미안함은 오러로서가 아니라, 너의 친구로서 가지고 있는 감정들일 것이며, …아마 여기서,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네게 친구로서 가지는 마지막 감정일 것이다.

  

9.

 

마지막에, 나를 감싸고 나를 가득 채운 것은, 적막감.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곳이 평화롭듯 내게도 고요한 평화가 찾아와주었고,

그러나 이성은 여전히 굳건하고 날카로워 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양 손등에 크게 남은 자상이 안쓰러웠다.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분명 흉터가 크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단지 너의 상처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기만 했다. 너의 왼손 손등에 선명하게 찍힌 죽음을 먹는 자들의 표식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학창 시절 함께 놀며 웃었던 친구가 아니라, 너를 체포해 갈 오러.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학창 시절 함께 놀며 웃었던 친구가 아니라, 내가 체포해 가야 할 죽음을 먹는 자. 내가 너의 선처를 위해 움직여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 점은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 믿어.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나는 네게 힘겹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는 이 미소가 가벼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끝났고, 멈추었다. 우리의 싸움은 끝났고, 우리의 시간과 우정은 연료가 떨어진 기차마냥 잠시 멈추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멈춰버린 시간과 우정이 다시 움직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멈춰버린 기차에 연료가 다시 채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막연히, 그저 막연히 해보았다.

 

10.

  

네가 아즈카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미래의 일.

 

11.

  

나는 괜찮아. 네가 괜찮다면 나 또한. 네가 괜찮으니까, 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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