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아멜리아 실비에] 잃어버린 페이지

17.03.04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2,664자.

※2017.03.04 작업 완료 

 

 

 

잃어버린 페이지

 

 

 

 

1.

  

책을 읽다가, 갑자기 중간에 뜯겨져버린 부분이 있으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그냥 읽을 거야? …아니면, 그 부분을 찾아볼 거야?

2.

 

멈춰버린 구름, 색을 잃어버린 하늘, 죽어버린 풀꽃들. 눈을 감았다 떠봐도, 보이는 것은 회색 세계 뿐. 깨어진 세계, 멈춰버린 시간.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내 잘못일까. 너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어야 했을까. 네가 싸운다고 했던 그 순간부터 너를 돌려보내야 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처음부터 네가 그와 가까워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네가 상처받는 일은 없게 해야 했을까. …아니,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과거에 미련을 가져봤자, 현재와 미래는 바뀌지 않아.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뭐지?

 

3.

  

…나는 네가 그 부분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랜만이었다. 아무리 그동안 너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해도, 역시 직접 얼굴을 보며 만나는 것은 느낌이 다르지. 새삼스러운 질문들을 하고 싶었다. 잘 지냈니. 무엇을 하고 지냈니. 그런 거. 그러나 하지 않았다. 정말 새삼스러운 질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런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자니 전혀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나중에도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더라.

내가 그를 오랜만에 본 것처럼, 너도 오랜만이었겠지.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래서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내가 그를 반가워했던 것처럼, 너 역시도 그러했을 테니까. 또한 조금은 풀어져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같은 불사조 기사단이라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둘 다 일반인이었으니. 아무리 싸우러 온 것이라고 하지만, 너희는 그래도 조금은 긴장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는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오러인 나도 긴장하기 마련인데 너희는 어떻겠느냐고, 과도한 긴장은 오히려 안 좋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잘못된 생각이었나 보다. 끼어들 걸 그랬다.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지?

  

4.

 

…괜찮아? 너는 정말 위태로워보였고, 힘들어보였다. 그래서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나는 괜찮지만 너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괜찮지만, 너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네게 다가간 거였다. 많이 힘들어보여서.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무척이나 아플 것 같아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너를 도와주려고 했다.

  

아주 간단한 부탁이야. 내 기억 좀 지워줘.

  

내 기억 좀 지워줘.

조금 놀라긴 했지만, 뭐랄까… 사실, 아주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네가 기억을 지워달라고 할 만큼, 그만큼이나 힘들어하고 있는 게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빈말로라도 농담하지 말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너의 결정을 믿지 않으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 역시 하지 못한다. …네가 이 말을 함부로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이런 결정을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내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그러나 나는 너의 부탁을 들어줄 거야. 내가 마음이 아픈 것과, 네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나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그 말을 들은 순간, 네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잔인한 사람. 너는 알잖아. 너는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걸 알면서, 너는. 내가 괜찮다고 해서, 나도 이 상황이 버겁지 않은 것이 아닌데. 나도 이 상황이 버거운데. …그래도 너만큼은 아니겠지. 너는 이미 힘든데,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더 힘들 텐데. 나는 안다.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왜 나인지 안다. 나는 실제로 너의 부탁을 들어줄 테고, 또한 그러한 부탁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맞아. 나는 너의 부탁을 들어줄 거야.

자아, 기억할 필요 없어. 너를 괴롭히는 기억을 끌어안고 있을 필요 없어. …괜찮아.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그리하여 그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너는 몰라도 괜찮아. 그게 너를 괴롭게 한다면, 몰라도 괜찮아. 대신 웃어줘. 환하게 웃어줘. 내가 웃지 못하고, 그가 웃지 못하더라도, 너만큼은 웃어줘. 그리고 입을 열어 속삭였어. 네가 괴롭지 않기를 바라고, 네가 웃기를 바라며. 그 작은 속삭임은, 너도 알고 있을 말.

  

오블리비아테.

 

5.

  

…엄청 긴장되더라. 분명 어려운 마법이 아닐 텐데, 잘못되면 어쩌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어. 많이 떨렸을까, 주문을 외우던 내 목소리는. 많이 떨었을까, 너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던 그 손은. …몰라. 사실 기억 안 나. 내가 기억하는 건 다행스럽게도 마법이 잘 돼서 네 기억이 말끔하게 지워졌다는 것뿐이야. …응. 말끔하게. 너를 괴롭히던 기억이 말끔하게. 다행이지?

  

네가 잃어버린 페이지는 나에게 있어. 뜯기기를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페이지.

  

6.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까. 미안해. 그를 아즈카반으로 보낸 게 나야. 네 기억에 공백을 만들어버린 것도 나야. 내가 그를 아즈카반으로 보냈고, 내가 너의 기억을 지웠어. 모두 나구나. 다름 아닌 나구나. 아아, 그리하여 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들고 갈라져버렸으니. 이런 나를 원망해도 괜찮아. 각오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원망해도 괜찮아. 네가 이유모를 원망을 느낀다고 해도 괜찮아. 너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나를 원망해도 괜찮아.

…나더러 괜찮으냐고 묻는다면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난 당연히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내가 한 일은 오러로서도, 친구로서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네가 괜찮으니까. 나도 괜찮아.

 

7.

  

에드윈에게.

  

오늘은 요 며칠 내리던 부슬비와는 다르게 엄청 쏟아지더라! 전국적이라는데, 네가 사는 곳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을까? 비 때문인지 뭔지, 오늘은 일하기가 더 싫더라고! 왜, 그거 있잖아. 날씨가 우중충하면 절로 기분이 가라앉는 거. 딱 그 느낌이었어. 마침 일도 없었던 것도 있고? 이래 뵈도 나 맨날 일도 안 하고 땡땡이치는 건 아니라고! 오늘은 웬 일로 미ㅅ

  

아, 실수. 계속 여기서 실수해버리네… 마법으로 수정하는 건 나중에 효력이 다 떨어지면 들킬 수 있으니까 위험해. 새로 써야겠다. 새 양피지가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에드윈에게.

  

오늘은 요 며칠 내리던 부슬비와는 다르게 엄청 쏟아지더라! 전국적이라는데, 네가 사는 곳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을까? 비 때문인지 뭔지, 오늘은 일하기가 더 싫더라고! 왜, 그거 있잖아. 날씨가 우중충하면 절로 기분이 가라앉는 거. 딱 그 느낌이었어. 마침 일도 없었던 것도 있고? 이래 뵈도 나 맨날 일도 안 하고 땡땡이치는 건 아니라고! 오늘은 웬 일로 벤자민이 오러 부서 쪽으로 왔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오러 부서가 있는 쪽에 볼 일이 있던 거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편지를 써. 네가 기억의 공백을 느끼지 않도록. 기억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도록.

 

8.

  

아마 네게 돌려주는 일은 영원히-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