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身

일반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A가 그 자신을 인간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염세주의적인 면모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을 달리했다. 하지만 시작은 정말 별것 아니어서, 그조차도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간혹 그의 아내만이 찰나의 괴리감을 느끼고 눈을 깜빡일 뿐. B는 종종 A가 말하는 ‘우리’에 자신이 없음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납득했다. 내 남편이 좀, 범상치 않잖아. 그래서 그래. 그러나 폭탄의 퓨즈에 붙은 불을 알아차렸을 때는 항상 늦다.

가끔 —이 사 오는 참치샌드위치가 A의 입맛에 맞지 않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역겹지는 않았다. 아내와 함께하는 티타임이라면 A는 뉴욕 하수구의 구정물도 마실 수 있었다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멀쩡한 찻물이 구정물처럼 느껴졌을 때, 그는 차를 그대로 머금은 채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B의 걱정이 어린 눈빛에 A는 사실을 묻어두는 쪽을 택했다. ‘괜찮아.‘ 그는 미스틱 아츠의 대가다. 괜찮게 만들면 될 일이다.

곧장 카마르 타지로 넘어가 서적을 찾아보는 A에게 몇몇 마법사들은 웃긴 농담을 하기도 했다. 자네 부인께서 기쁜 소식이 있진 않은가? 하하, 하는 웃음소리와 몇 마디 농담이 더 넘어왔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면 남편이 입덧을 대신 하기도 한다던데. 자네의 아내 사랑은 이 카마르 타지에서 아주 유명하지 않나! 그 사랑의 결실인 거지! 그들의 농담에 마주 웃으며 A는 생각했다. 인간은, 간혹, 아주 오만하고 무례해서, 제가 상대할 가치도 없을 말들을 한다고. 빛이 잘 들지 않는 책장 사이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고서야, 농담을 던지던 마법사들은 자리를 떠났다. 카마르 타지의 서고 깊은 곳, 소서러 슈프림이 관리하는 서적들을 모아놓은 곳까지 도착하고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방금 저들을 뭐라고 지칭했지?

A는 미친 듯이 서적을 읽어나갔다. 그가 마법을 처음 배울 때와 같은 속도에, —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A에게 전말을 들은 —는 조심스럽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으나 A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현대 의학의 분야가 아니었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선배가 필요했다. —이 있었더라면….

—. 그의 스승이자 몇백 년을 살았던 자. 번뜩이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는, 매 전투마다 있었던 인간의 죽음에 대해 묵념하는 시간은 짧아지다 못해 생략된 지 오래였고, 더 큰 흐름을 위해 소를 포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자에게 오는 선택의 순간.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초월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그러나 A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A만 한 재능의 소유자가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다는 건, 이기적인 것이었다.

“하하….”

그는 어딘가 힘이 빠진 듯한 헛웃음을 흘렸다. —, 들어보게.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믿을만한 선배 마법사이자 훌륭한 조언자인 —는 연민을 담아 말했다. 그건 이미 자네의 손을 떠나간 것 같군.

그길로 생텀에 돌아간 A는 곧장 B를 마주했다.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아내. 그는 카마르 타지에서 얻은 결론을 부정했다. 인간이길 포기한 자가 어떻게 사랑을 안단 말인가? 며칠 간의 부재로 인한 B의 걱정은 부드럽게 풀린 그의 얼굴과 그녀를 마주 안아오는 그의 따뜻한 품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걱정했어, A.”

“미안해. 그래도 오늘 저녁은 당신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 최대한 빨리 왔어.”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A는 B를 생텀의 주방으로 이끌었다. 곧 화목한 웃음소리와 함께 음식이 요리되는 냄새가 주방 근처로 퍼진다. 평범한 주방, 평범한 메뉴, 자신이 없었다면 평화로운 삶을 즐겼을 그의 아내.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살아가는 기분에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상관없어, 이대로라면. 그는 좀 고독할지언정 인간이길 택할 것이다.

“오랜만에 여보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도 사 올까?”

“그건 직접 안 하고, 사 오려고?”

“당신이 원한다면 만들 수도 있지. 대신 당신 입에 들어가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음식 냄새마저 역겹게 느껴지는 그 대신 B에게 간을 보게 하고, 저녁 시간 내내 매스꺼운 속을 누르고 음식을 욱여넣으면서도 그는 그 자신이 인간이기에 괜찮았다. B가 잠들고 난 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저녁으로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내고서도, 그는 괜찮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A는 제게 ‘인간으로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 옆에서 잠든 B를 바라보며, A는 차라리 이 찰나가 영원하길 바랐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문지르는그의 손길에는 욕심이 묻어난다. 인간 A는 제 손에 주어진 행복을 스스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 스스로 인간이길 택했기 때문일까? 일은 A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블립 이후 온 우주는 약해졌고, 악해졌다. 혼돈 속에서 그는 이 우주를 지켜야 했다. 순리를 뒤트는 물건을 봉인하고, 실종된 마녀를 찾아 헤고, —의 침공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지구를 탐욕의 눈길로부터 지켜내고. 몰아치는 일 가운데 A는 더 강한 힘이 필요했다. 다른 이들은 한낱 인간이기에, 함부로 맡길 수 있는 일도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A는 짧은 시간이더라도 B와 함께 보내기 위해 매일 생텀에 들렀다. 어느 날은 티타임을, 또 다른 날은 브런치를, 또 어떤 날은 남편이 걱정돼 깨어있던 B와 야식을 함께 먹기도 했다. 사랑을 위해 의무를 저버릴 필요도 없고, 의무를 위해 사랑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A는 언제나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내지 않았던가. 매번 먹었던 것을 게워 내며, 그 자신을 그렇게 세뇌했다. 나는 인간이야, 나는 인간이야, 포기할 것 없이, 둘 다 해내면 돼…. 매일 B를 찾아가는 것이 사랑인지 의무인지 구분이 안 될 즈음, B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바쁘면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여보.”

“무슨 소리야, B?”

“말 그대로야. 당신 요즘 바쁘잖아. 굳이 시간 내서 이렇게….”

“B, 여기가 내 집인데 무슨 말이야. 당신이 사는 이곳이 내 집인데.”

“… 정말?”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가장 가까이서 바라봤다. 이제는 차를 마시는 것조차 괴로워하는 A를 보며 B는 일반인이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위화감을 느꼈다.

“A. 지금 당신은…, 날 사랑하려 애쓰는 사람 같아.”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다정한 빛을 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은 사랑이라기엔, 관성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부분을, A도 느꼈다. B는 조용히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맞닿아있던 손은 따뜻했지만 이제 저를 바라보는 눈은 그 푸른 빛을 닮아가듯 시렸다. 그 뒤로도 B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 결국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A에게 생텀의 1층은 너무 넓어 보였다. 구석구석에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A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는, 인간이어야 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간으로서 가장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지친다, 였다.

그 뒤로 A는 생텀을 찾아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찾아가지 못했다. 그가 추적하던 마법사가 거대한 조직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아마 그래서, A는 너무 바빠서, 평소였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위험을 저도 모르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무사히 세상을 구한 A는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붙잡고 반파된 뉴욕 생텀으로 게이트웨이를 열었다.

그가 범죄 조직의 본부에 가 있던 동안, 미리 빠져나온 몇몇 조직원들의 소행이었다. A와 B의 생활 터전이었을 2층과 3층이 거의 부서져서, 1층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다. A는 익숙하게 마법을 다뤄, 생텀을 복구시켜 나갔다. 계단과 벽, 유물과 그걸 보관하던 유리관. 자주 티타임을 즐기던 창가와 각자 차지하고 몸을 파묻던 큰 의자, 함께 저녁을 만들던 주방, 다 만든 음식을 가져와 함께 먹던 식탁, 요리를 하느라 꼴이 엉망이 되어도 사랑스럽던 그 미소, 같은 이불을 덮고 자신을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 사랑한다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

느릿한 손짓과 함께 완전히 복구된 생텀은 차가웠다. 수리는 끝났지만, 어딘가 망가져 있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는 B가 제 손을 놓던 날의 달빛과 닮아있었다. 생텀을 나타내는 가는 선으로 만들어진 문양. 그 문양이 그려진 창가에서 여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 그래. 식후에 차를 마실 땐 늘 저 의자에 앉아 마셨지. 저녁노을에 붉게 빛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서, 못 참고 키스를 한 기억이 있다. 전부, 기억에 있다.

옆구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A가 걸음을 옮기자 걸음 소리와 함께 핏자국이 생텀 바닥에 남는다. 창가에 다다르자, 제 몸에 좀 커 보이는 의자에 파묻힌 B가 있다. B, 그의 아내,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 A는 눈앞에 쓰러진 시체 한 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고요 속에서, 마치, 인간을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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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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