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건서현] Espresso 2
Espresso에 이어서
세건은 오늘 아웃로 뱀파이어가 있다는 허위 정보에 속아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헛걸음을 거하게 하면서 시간과 돈을 제법 낭비했지만 세건은 그 사실에는 그닥 흔들리지 않았다. 사냥이란 건 원래 나갈 때마다 항상 성공하는 게 아니니까.
그보다도 잠깐 바이크에 올라 달리려다가 무심코 와버린 아르쥬나, 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훤칠한 회색 머리 청년. 여느 때처럼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그가 누구인지 인식하자마자 세건은 자신의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젠 지겨우리만치 본 녀석이다. 보기만 한 것도 아니지. 다른 사람들은 서현이 키가 크고 마른 근육질이라 흰 셔츠에 검은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구나 하는 생각 정도밖에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건은 눈을 감고서도 서현의 얼굴 생김새를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얼굴뿐인가? 걷어올린 셔츠 소매 밑에 가려진 팔 근육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도, 흰 셔츠가 잘 어울리는 저 어깨는 사실 아무 것도 안 입었을 때가 제일 예쁘다는 것도, 하얀 목과 시원하게 쭉 뻗은 쇄골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내려갈 때 놈이 내뱉는 열에 들뜬 숨소리가 얼마나 야한가 하는 것도 그는 알고 있다. 서현이 그러도록 허락한 상대는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한세건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 틈에 있는 서현을 볼 때마다, 세건의 머릿속은 홀로 갈대밭에서 거센 바람을 맞을 때처럼 고요하고 차갑게 식어갔다.
아르쥬나에 있으면 별의별 진상들에게 갖가지 희한한 방식으로 시달린다지만 세건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범죄자 신분을 완전히 세탁하고 인간 사회에 적응한, 야수의 본능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데 도가 튼 라이칸스로프...
조금만 주변을 살핀다면 그는 매력적인 외모는 물론이고 훌륭한 마음가짐까지 갖춘 남녀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서현이 어째서 껍데기만 간신히 인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세건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숨기지도 않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는지... 세건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 테러범. 뭘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들여다 보고 있냐."
어느새 세건을 발견하고 다가온 서현이 유리창을 툭툭 두들겼다.
"왔으면 매상이나 올려주고 가라?"
그러면서도 서현은 연인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꽤나 즐거운지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괴물 주제에, 제기랄... 세건은 투덜거리면서 그에게 이끌려 아르쥬나 안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계산대에 선 순간 서현은 평소의 아르쥬나 알바생 모드로 돌아가 영업용 스마일을 한껏 띄운 얼굴로 묻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커피 한 잔."
잠시 서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짜증이 떠올랐지만, 세건은 그 시선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사실은 모르겠다. 카페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맛을 맞추기 위해 수많은 메뉴가 있고 기호를 좀 더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위해 시럽이니 휘핑크림이니 하는 것들을 빼고 더하는 옵션도 있지만, 이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입으로 너무 단 건 싫다고 말하면서 열량을 채우려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생활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그러니까 네가 맞혀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게 호감을 가지고 말았다는 걸 알아차려서,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든 너라면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잖아?
"자."
"..."
서현이 내어온 것은 커다란 머그잔.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에스프레소 샷 하나 그대로뿐이다.
"아르바이트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알지. 정말 아무것도 안 넣은 에스프레소 그대로를 즐기는 손님은 별로 많지 않아."
무슨 수작인가 하고 쳐다보자 서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이 가득 든 다른 잔 하나를 옆에 내려놓는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치고, 여기다 물을 당신 마음만큼 타서 마셔."
그 말을 듣고 세건은 얼마 전 서현과 함께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 진짜 블랙홀 같은 사람이다.'
'뭐.'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만 하고, 한 번도 해줄 줄을 모르지.'
'그래봤자 짐승인 네놈 속만큼 시커멓겠냐?'
'아 진짜 오냐오냐 해주니까 이 테러범이...'
평소대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동원해가며 시답잖은 말싸움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서현 쪽에서는 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검고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자신을 비유하다니...
하지만 꽤 잘 어울린다. 단순히 뜨겁고 쓴 액체 같다가도, 복잡하고 풍부한 향기와 맛이 가득하지. 그러니까 그런 네 마음에다가 서툰 솜씨로 내 마음을 끼얹는 짓 따위는, 안 해.
세건은 그렇게 결정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느릿하게 물컵을 기울여 내용물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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