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15년의 진혼곡
나는 불멸하리라. 스러져도 명예롭게 불멸하리라.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과 다르게 차가운 바람이 나의 얼굴을 때리고 머리카락을 흐트려놓는다.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비석들 앞이다. 내가 마주해야 하는 과거의 일편 앞. 직계가족인 내가 관리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묘들은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묘비도 금간 곳도 없으며, 얼룩이 묻은 부분도 없었다. 풀들도 다 깔끔히 정돈되어 있어 누가 보아도 이들을 대해주는 손길은 상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섯 개의 묘비들 앞에 하얀 국화들을 올려둔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이들을 한눈에 담았다가, 뻗어지지 않는 손을 겨우 뻗어 다섯 개의 묘비들을 하나씩 쓸어본다. 차갑다. 온기를 띠지 않는 물건이 장갑 너머로 그 차가운 감촉을 전한다. 그때 온기를 잃어가던 이들도 이만큼 차가웠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네킹은 이만큼 차가웠다는 사실이다. 차가운 돌을 쓸어대던 손을 떼어 그 앞에 무릎꿇고 앉는다. 머뭇거리던 입이 몇 번 달싹였다가 겨우 목소리를 뱉어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저, 모두에게 고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 저… 저, 그것이… 생각보다… 모두를…”
찾는 것이 수월했어요. 이제껏 찾지 않은 것이 한으로 느껴지시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마저도 머뭇거리다 결국 뱉어내지 못한 말은 다시금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버린다. 그만큼 씁쓸한 맛이 목에 오래토록 남는다. 아니, 가슴속에 남아 내 마음을 갉아내는 기분이다. 뱉어내지 못하고 응어리진 덩어리들은 사실 산성을 띠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해내고 싶게 만들지만, 괴로워서 토해낼 용기를 주지 못할 정도로 속을 썩힐만큼 강한 산성.
찾아낸 한 가지 정보는 다른 정보를 물어다 주며, 그렇게 하나하나 다리를 만들어주어 이렇게 내가 찾고자 했던 목적까지 길을 터주었다. 그래, 거의 일직선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눈을 가리던 것들을 치우고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하면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을 정도로 쉬운 길이었다. 그래서 이 길을 나아가는 동안 느낀 감정은 기대와 설렘, 긴장, 불안감, 그리고… 죄책감이었다. 이리 쉬운 것을 왜 이제까지 하지 않았나 싶어서. 찬찬히 내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결국 정답에 다다른다. …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가 버리고 온 것을, 나의 죄악이라 생각하는 것을 마주하지 않고 이제껏 한 것처럼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모든 것은 깔끔하게 맞춰진다. 제가 뱉어온 모든 핑계의 이유들이. 더는 되찾지 못할 과거와 마주하지 않기 위한, 세상에서 더는 숨쉬지 않을 그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우습게도 여전히 이 새장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서 내뱉은 핑계들이었다. 어릴 적에는 스스로 잠궈버린 새장 속에서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에, 칼미아에 있었을 때에는 새장 대신 칼미아에 스스로를 가둬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는 그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고 흐릿했기 때문에, … 그리고 벽이 허물어지며 기억이 돌아온 직후에는 바쁘다던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려 더는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고 끝없이 사정에 맞춘 핑계를 대며 여전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름다운 것만을 받아들여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웠을 터다. 15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온전한 기억으로서 담아두는 시간조차 짧았던 가족들을 마주하는 것이.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미루고 또 미뤘던 것이다.
… 이리 쉬운 일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했을 것을. 왜 계속 미루고 있었던 걸까.
“… 죄송해요.”
그 이후 아무 말도 못하다가 그 짧은 말 한 마디 뱉어내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앞에서 쌓아둔 회한과 자책을 풀어내듯이 감정이 쉴새없이 터져나온다. 열리기 시작한 입에서는 죄송합니다, 그 한 마디만이 계속 막아내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안 그래도 시린 볼은 약간의 온기를 머금었다가 더욱 차가워진다. 몸을 웅크려 제 얼굴을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면 결국 모조리 터져나오고 만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죄송해요, 보고 싶어요… 차가운 공기 속에 퍼지는 따스한 햇빛처럼, 오열하는 차가운 감정이 따스한 물기를 머금으며 입김과 목소리의 형태로 하늘로 퍼져올라간다.
…
한참을 울고 나면 가족들이 안식을 취하는 곳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바이크를 몬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는 자연스럽게 노을이 깔리고, 얼마 안 있어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이 깔린다. 그럼에도 달리고 또 달려서 도착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숨겨진 명소. 우리들이 지켜온 빛, 판도라에 드리운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 한참을 울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붉어진 두 눈에서 야경이 만들어내는 빛이 안광을 대신한다. 힘들다. 빛에 스스로 만들어내는 안광을 담지 못할 만큼. 이 심적으로 ‘힘들다’ 하는 감정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는 마음속에 개운함이 스며든다. 가족들을 떠올리며 무겁게 마음을 옥죄어오던 감정이 이제서야 완전히 풀린 것인지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늦은 시각이다. 12월 15일 23시 56분. 일부러 보지 않았던 폰에는 다양한 연락이 담겨 있다. 집으로, 돌아가자. 이제 집으로 가자. 다시금 미래를 위해 살아가야지. 이제는, 더욱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기분이 든다.
어둠이 짙게 방 안에 드리운 밤, 모든 일을 다 마무리하고 나면…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미리 받아두었던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고급 술을 잔에 채운다. 그러고 나면 식탁 위에 올려진 메리골드의 드라이플라워를 손으로 건드렸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내일 할 것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일은, 오늘 못 했던 만큼 피아노를 치고, 못 잘랐던 케이크를 자르고, 별을 올려다봐야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반드시 그러리라. 술을 입에 머금으면서 만취하여 다음날 일정이 꼬이면 어떡하나 생각하면서도, 내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것 역시 세뇌가 풀린 탓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
술에 취해 엎드려 눈을 감고 있으면, 자신의 머리를 쓰담아주는 손길이 느껴졌던 것도 같았다. 그 손길에 눈을 떠서 고개를 들어보면 집의 풍경 대신, 아름다운 하늘과 어여쁜 꽃들이 만개한 땅이 자신을 반긴다. 그 위에서 행복한 듯이 웃고 있는 가족들. 그 모습에 눈에는 다시금 물기가 차오른다. 처음으로 당신들이 나온 꿈에서, 당신들은 활짝 웃고 있다. 자신을 눈에 담으면 가족들은 아까보다도 더욱 환한 웃음을 입에 건다. 누가 봐도 자신을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서향을 한 송이씩 자신의 손에 쥐여주고 자신을 안아준다. 자신의 손에 서향이 5송이가 쥐여졌을 때, 그제서야 당신들은 마음을 놓은 듯 웃으며 등을 돌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져간다. 다급하게 일어나 그들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분명 느리고 행복해보이는, 가벼운 걸음일 터지만 전력으로 달려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손을 뻗어도, 자신의 손을 펼 수가 없다. 손을 뻗기엔, 제 손은 이미 서향을 붙잡고 있기에. 당신들이 준 서향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기에. 당신들을 붙잡지 못해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울음을 흘리고 있으면 동생의 형체를 지닌 아이가 부모와 조부모를 먼저 보내고는 몸을 돌린다. 여전히, 부드럽게, 행복하게 웃음을 짓고 있다. 그리고는 손을 뻗는다. 자신 너머를 가리킨다. 그리로 시선을 옮기면 그곳에는 따스한 빛이 있다. 자신의 크기에 맞는 빛이다. 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이를 바라보면 아이는 웃으며 입을 벙긋거린다.
[매그리올드의 행복은 우리의 곁 대신 그곳에 존재해.]
그리고는 다시금 가족들과 걸음을 함께한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서야 이 풍경이 완전히 눈에 들어온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사방에 깔려 있으며, 빛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족들이 걸음을 옮기는 길은 행복이 만들어주고 있다. 그걸 눈치챈 순간부터, 자신 역시 걸음을 떼어낼 수밖에 없다. 빛을 향해서. 가족들과의 거리는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해도 가까워지지 않았으면서, 어찌 빛과의 거리는 이리도 빨리 좁혀질 수 있는지. 마지막 미련을 가지고 등돌리면 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하얀 국화 꽃잎들이 흩날린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고는 그대로 빛을 넘어 걸음한다. 따스한 온기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동시에 너무나도 눈부신 빛이 제 시야를 가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게 만든다.
…
다시금 눈을 뜨면 어느새 눈부신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며 제 눈을 찌른다. 숙취에 컨디션이 안 좋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마음은 괴롭지 않았다. 더는 슬픈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다. 이것은 제 응어리가 풀리며 심리의 변화를 깨달은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평소보다 개운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뭐, 아무렴 어떠하리. 자신은 지금 이미, 완전하다고 느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난간을 붙잡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 그것들을 장식하는 구름들. 그것들을 보고 편히 웃었다. 15년간 작게 연주된 진혼곡에 드디어 Fine를 적어낸다.
* 하얀 국화의 꽃말 - 성실, 진실, 감사
서향의 꽃말 - 불멸, 명예
메리골드의 꽃말 -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석산의 꽃말 -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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