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미 - 베일

※ 성인 설정

※ 女행자 설정

※ 2.7 층암거연 스토리 네타 포함

※ 미노벌난 언급 有

저녁 노을이 느긋하게 물들었다. 곧 청빈한 달이 낯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나 오래 걸렸다. 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우들의 물건을 보며 한숨지었다. 죽은 자의 물건을 오래 갖고 있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된다고 해도 소 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니, 몇이고 껴안고 있을 수 있다. 허나 죽은 자의 물건을 버리지 않는 것이 죽은 자를 보내주지 못하는 것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종려가 넌지시 건네 준 조언에 이제 와서야 마음이 든 것이다. 마주하고, 나에게서 떠나보내고, 안녕을 고할.

"소, 이건 어디에 둘까?"

시냇물같이 명랑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흩뿌려졌다. 고개를 돌리자 뒤에 살랑이는 치마자락을 끌어당기며, 상자를 옮기는 여행자가 보였다.

"무거운 건 내가 든다고 했잖아."

"이거 그렇게 안 무거워."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행자는 그날 이후로 소가 조금 '인간' 다워졌다고 생각했다. 다른 야차들은 후에 '인간' 세상에 살고 싶어했다고 들었다. 소만이 예외였다고. 하지만 지금만큼은 소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부터 망서객잔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야차들의 옛 물건을 정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 거대한 검은 부사의 것, 날카로운 활은 응달의 것, 두터운 장갑은 벌난의 것, 정갈한 숫돌은 미노의 것……. 소는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곤조곤 그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소가 얘기하지 않으면 이제 기억할 이는 소 뿐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늘어놓아 하나라도 기억해주는 이가 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야차들에 대해서도. 그게 마땅히 마지막으로 남은 금붕 대장이 해야 하는 일이고 살아남은 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큼 물건들이 밖으로 날라졌다. 각자 한 개씩만 남겨 동작의 사당에 함께 봉헌하기로 했다. 이렇게 보니 물건들이 많기는 했다. 미노가 부사에게 권했던 옷도 한 벌 찾아냈고, 부사가 소의 얼굴에 낙서를 했던 필묵도 한 쌍 찾아냈다. 소가 낮잠을 자던 사이에 부사가 소의 얼굴에 낙서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여행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너무 보고싶다며 졸랐지만 소는 전력을 다해 무시했다.

여행자는 유품을 돌아보며 야차 일족이란 생각보다 감상적이고 가족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었다. 그들이 남긴 물건은 전사의 것이라기 보다는 가족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갔다. 누구보다 뛰어나고 용맹한 전사라는 것은 지킬 게 있는 사람인 법이다. 누구보다 리월을 아끼고 서로를 아낀 이들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생활감 가득한 과거의 물건이란 이리도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거의 마지막 상자만 남았다. 마지막 상자를 열었을 때 여행자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 예쁘다."

붉은색의 하늘하늘한 천이 떨어졌다. 금색의 자수로 색색이 놓인 반투명한 천이었다. 마치 선녀의 날개 옷 같았다.

"이건……."

소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손에서 붙잡혀 있었지만 곧 흐르는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은 천이었다. 이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이건 뭐에 쓰는 거야? 근데 소랑 잘 어울린다."

여행자가 가볍게 말했다. 그의 눈가의 인주부터 해서, 통일감이 있는 색이었다. 하지만 소는 그 얘기를 듣자 잠시 눈가를 찌푸렸다.

"나랑?"

"응, 소랑."

"이거 여자 거야."

아, 헉. 여행자는 잠깐 혀를 물렸다. 소가 삐진 게 느껴졌다.

"하, 하지만, 소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다들 소보고 절세의 미소년이라고……. 읍."

소가 더이상 듣지 못하겠는지 여행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장갑이 가볍게 입가에 와 닿았다 떨어졌다.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미간이 보인다.

"너는?"

"뭐가?"

"너는 날……. 아니야. 됐어."

소가 천을 다시 곱게 접으며 고개를 훽 돌렸다. 너는 날? 여행자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답에 도달했다.

"나도 소가 예쁘다고 생각해."

"예쁘다고?"

소의 거친 눈썹이 움찔거렸다.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나 보다. 여행자는 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오는 것은 핀잔이나 차가운 행동이 아니었다. 순간 꿈결같은 감촉이 몸을 휘감으며 일순 세상이 빛났다. 빛 결정이 조각나 흩뿌려지며 반짝였다. 그의 호박색 눈에 비치는 여행자는 빛이 났다. 붉은 색 아름다운 천이 여행자를 감싸 면사포처럼 머리에서부터 떨어졌다.

"소, 이건……."

"역시,"

밤이 찾아오기 전 가장 강렬한 붉은 색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두사람의 위로 지나갔다. 강렬한 빛의 이음은 마치 한낮의 유성같이 꼬리를 그렸다.

"네가 더 예뻐."

여행자는 순간 소의 얼굴에서 미소를 봤다. 얼핏 어설프지만 다정한 웃음이 정말 꿈결같았다. 여행자가 그 뜻을 깨닫고 얼굴이 달아오르기 전에 소가 가볍게 "아" 소리를 내었다.

"이건 미노랑 벌난 거였어."

미노랑 벌난, 바위 야차와 물 야차다. 여행자는 집중하며 자신과 마주앉은 소를 바라봤다.

"그때는 그 둘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갔거든. 근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군."

소의 손길이 가볍게 여행자의 뺨에서 배회했다.

미노와 벌난의 마음, 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퍼즐은 여행자의 속에서 눈처럼 흩날렸다. 오히려 지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행자였다.

"이건 미노랑 벌난 거니까, 네 건 언젠가 내가 새로 구해 줄게. 나랑 혼례는 올리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네가 쓴 건 보고 싶어."

소가 여행자의 머리에서 가볍게 천을 거두며 얇은 금발을 무심코 정리해줬다. 혼례에 쓰는 붉은 천. 리월의 신부들은 전통적으로 빨간 혼례복을 입는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머리 위에 쓰는 붉은 색 베일. 리월의 어느 마을은 저 베일의 자수를 남편이 평생에 걸쳐 놓는다고도 했다. 미노가 그랬다. 미노는 벌난을 위해 자수를 놓으며 세상 다정한 미소로 벌난을 내려다봤다. 벌난은 자신의 커다란 손을 보며 미안하다 말했지만-또 어느 지역에서는 원래 여자가 놓아야 하던가- 미노는 그때마다 벌난에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사랑. 사랑? 자신은, 여행자를, 사랑──── . 

여행자의 머리카락에 섞여 들어갔던 소의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태까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오늘 말이 많아지다 보니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혼례는 올리지 않아도 괜찮지만]

[네 건 언젠가 내가]

[그래도 네가 쓴 걸]

[역시 네가 더 예뻐.]

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가 자신의 얼굴에 대해 자각하기도 전에 여행자가 불쑥 다가왔다. 착각인가? 여행자의 얼굴도 붉었다. 노을 탓일지도 모른다. 붉은 천을 썼던 여파일지도 모른다. 얼굴이 붉어 보인다. 불쑥 다가온 여행자의 얼굴이 뺨을 스쳤다. 따뜻한 온기가 짧은 소리를 내고 다시 멀어졌다.

"나는, 다른 거 정리하고 올게. 페이몬이 도움이 필요할 거야."

"응, 그래."

여행자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달음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남은 붉은 천이 사락거렸다. 마치 야차 형제들의 응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니면 타박, 장난, 그게 무엇이던 그들은 소의 편이었다. 가봐, 금붕. 가야지. 너는 앞으로 가야지. 뒤를 돌아본 것도, 길을 잃은 것도 전부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 천하의 영웅'들'은 길을 잃지 않을 테니까── 

소는 여행자가 떠난 자리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늦장 부릴 시간은 없었다. 뒤늦게 여행자의 흔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손을 잡게 되면 여행자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그 조곤조곤한 말투로 어떤 말을 해줄까. 또…….

부디, 노을이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주기를. 적어도 고백을 끝내기 전까지 만이라도.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