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필멸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분명 살아있는 것이 열 한 개나 됐는데도 모두가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때 약속된 타이밍처럼 8시가 됐고 지하 계단에서 쌍둥이 로봇이 나타났다. …블러디와 포레스트. 이 게임의 가증스러운 사회역할을 맡은 기계 소녀들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큼하게 웃는 얼굴에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웃는 얼굴엔 침을 어떻게
아침이 밝았습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온 건 7시 쯤이었다. 잠을 설친 난 결국 인상을 팍 구긴 채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1층 계단을 내려오자 먼저 로비로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일찍도 나왔네. 나는 일부러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1층을 훑었다. 프론트 쪽엔 사서 청람이 담요를 팔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빨간 소녀는 우리가 여자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기계팔로 전등을 도로 덮어놓곤 가버렸다. 전선을 억지로 뽑는 바람에 빛은 아까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사라지고 기척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나는 흡연구역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어떻게 만든건지 파르르 떨고 있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등 뒤에 기댄 자판기 벽면이 차가웠다. 쥐 죽은 적막 속에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우린 함께였다.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최악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 곁을 떠났던 녀석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쾌하다고 느끼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우린 또 다시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서관에 갇혔고 나갈 방법 역시 마땅치 않았으니까. 한 번 탈출했음을 기억하고 있던 건 오로지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선우빈이 다시 도서관에 갇히다니. 선우빈은 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현실이라고, 그야 그렇겠지. 봐라,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 선우빈은 그것이 얼음보다도 차가운 환상임을 알았다. 참으로 잔인한 악몽이었다.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이 흘렀다. 사람들은 감금 당한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서로 저마다 다른 말들로
첫 번째 만약, 도서관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는 마침내 도달했다. 세계의 끝이라는 곳에. 절벽 끝에 선 그는 바이크에서 잠시 내려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에 줄줄이 달린 스트랩이 흔들거렸다. 단 한 장 찍은 사진에선 저멀리 벌건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뜨고 있었다. 그는 어쩐 일인지 곧바로 SNS에 올리지 않고 다시 바이크에 올라탔다. 지구의 마지막 땅이
나는 당신에겐 별로 연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날적부터 문제아였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과 또래이면서 번듯한 일도 하나 없이 그저 내키는대로 돌아다닐 뿐인, 열 일곱 살 적 불량 소녀에서 달리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이다. 더러운 진창 같은 현실의 최전선에서 살고 있는 내가, 따듯하고 온화한 세상을 그리는 당신과 연이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린 결국 이때 한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