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선우빈 → 한소미
나는 당신에겐 별로 연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날적부터 문제아였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과 또래이면서 번듯한 일도 하나 없이 그저 내키는대로 돌아다닐 뿐인, 열 일곱 살 적 불량 소녀에서 달리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이다. 더러운 진창 같은 현실의 최전선에서 살고 있는 내가, 따듯하고 온화한 세상을 그리는 당신과 연이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린 결국 이때 한 철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 언젠가는 이것도 옅어질테고, 기괴한 경험 정도로 남을 것이다. 상처가 옅어지면 당신의 작품 모티브가 될 지도 모르지. 난 그냥 그 정도로도 괜찮았다. 당신 역시 내 인생엔 그닥 연이 없는 사람일테고. 그리고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한들, 내게 상처 되는 일은 아닐테지.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나의 얼빠진 질문에 당신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한다.
“당연히 있죠! 여기서 나간다고 맺은 연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것은 내게 참으로 낯선 단어다. 줄곧 세상에 가시를 세우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으르렁 거리기만 했던 나날들에서 그것 만큼 낯선 단어는 없었다. 아, 또다. 저 눈빛이, 이번엔 기어이 내게 인연이라는 것을 가르치려 든다.
당신은 나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나를 기억한다고. 나는 그때 언젠간 잊을 게 당연하다며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날이 밝은 오늘.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나는 오늘 조사에서 그 빨간 머리의 아이를 만났다. 예컨대, 모두가 블러디 에이미라고 부르곤 하는 것이다. 떠나기 직전 맞이한 두 죽음 탓인지,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이 앞서 튀어나갔다. 손이 박살나든 어쩌든 좋으니 울분을 터트리고 싶었다. 알잖아. 난 참는 것도 못하고, 그리고 영리하게 제 살길을 찾는 것은 더 못하지. 내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고 그에게 제지된 탓에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분노에 머리가 부글거렸어도 뒤돌아 나오는 길은 차가웠다. 그래도 그것만이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더 다치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없이 오늘을 무사히 보냈다고.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걸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내 심장에 맞닿은 당신의 네잎클로버를 떠올렸다. 선으로 만든 허울일 뿐이어도 난 그것이 괜시리 고마웠다.
피로가 몰려와서 돌아온 후엔 빈백 위에 늘어졌다. 늘어져 있다고 해서 잠이 온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또 다시 행동을 시작했고 그 속엔 당신도 있었다. 나는 여리고 섬세한 당신이 행여나 다치진 않을까. 제 운을 빌어 남에게 줘버린 당신이 화를 입진 않을까 걱정한다. 몸이 죽을 정도로 피곤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바삐 움직이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올 때 까지는.
오늘은 운이 정말로 좋았는지 이미 우리가 잃은 두 사람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을 빼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그저 당신의 상냥함 탓으로 두고자 한다. 당신이 따듯하기에.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나눠주고자 했기에. 그래서 우리가 오늘 무사하다고.
나는 돌아온 당신에게 어제 못 다한 대답을 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가도 날 기억해주겠다는 거. 아직도 유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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