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4)
1장(낮), 고요한 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분명 살아있는 것이 열 한 개나 됐는데도 모두가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때 약속된 타이밍처럼 8시가 됐고 지하 계단에서 쌍둥이 로봇이 나타났다. …블러디와 포레스트. 이 게임의 가증스러운 사회역할을 맡은 기계 소녀들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큼하게 웃는 얼굴에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웃는 얼굴엔 침을 어떻게 뱉냐고들 하는데 잘만 뱉어질 것 같았다. 비켜 서줄 수도 있긴 했겠으나 난 그저 그 자리에 똑바로 선 채 두 녀석을 노려봤다. 여즉 떨리고 있는 오른손이 욱씬거렸다.
“모두들 다 모이셨습니까?”
먼저 말을 뗀 것은 포레스트였다. 저 녀석과는 첫 대면이었는데 제 짝꿍과는 다르게 상당히 말투가 딱딱하고 정중했다. 모두들 다 모였냐니.
“그걸 우리한테 묻나?”
알렉세이 바실… 아오, 길어. 김알렉이 말했다.
“다들 모인 것 같네! 모두들 각자의 역할과 게임 규칙은 확인했지? 나중에 몰랐다고 해도 봐줄 수 없으니까 잘 확인하도록 해.”
“그보다 어젯밤 결과는 어떻나요?”
“너무 보채지 마. 안 그래도 이제 알려줄테니까.”
재촉하는 이하림을 애태우듯 블러디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어젯밤 결과를 발표했다.
“어젯밤은…… 놀랍게도 조용히 지나갔어!”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뱉고 누군가는 불안에 찬 시선을 보냈다. 또 누군가는 공포에 차 떨었고 의심의 눈빛이 교차했다.
“조용히 지나갔다는 건 마피아 역할을 맡은 분들이 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불안에 떨리는 물음. 송세희의 것이었다. 건너편의 무야호가 대답했다.
“글쎄요. 함부로 단정짓는 것은 독이 될테지요…”
“마피아가 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의사가 제대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선우진이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어 질문하는 건 이유선이었다.
“그보다 식량은 있는건가요?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굶어 죽을 순 없잖아요.”
“물론 있지. 여기에 8시까지 모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야. 매일매일 똑같은 양의 보존식량을 나눠줄 거거든. 9시까지는 식사를 마쳐야 해.”
그렇게 말하며 그 녀석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바구니를 꺼내 보였다. 피크닉 바구니 마냥 레이스에 빨간 리본까지 달린 라탄 바구니였다.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깔깔 웃어 젖히는 동안 우린 멍석처럼 굳은 채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 이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백한 구경꾼의 즐거운 웃음이었기에 그랬겠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건 진홍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만지고 있던 카메라를 목에 걸곤 바구니에서 제 몫을 하나 꺼내갔다. 서바이버 비스켓이었다.
“다들 하나씩 가져가시죠. 먹지 않으면 본인 손해일 뿐입니다.”
진홍의 말에 이어 나선 건 이유선이었다. 그 뒤로 한 명, 두 명 느릿느릿 걸어 각자의 몫을 받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것은 나였다. 바구니엔 비스켓이 두 개 있었고 나는 요령 좋게 한 손으로 둘 다 꺼냈다.
“잠깐, 한 사람이 한 개 씩이라고! 혼자 두 개 가져가는 건 불공평하잖아.”
“하나는 저기 구석에 처박혀서 떨고 있는 놈 거 아냐? 갖다 주면 될 거 아냐.”
왠지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아서 나는 부러 날카롭게 받아쳤다. 어차피 이 맛도 없는 걸 두 개 씩이나 먹고 싶진 않았다. 난 이미 이 비스켓이 무슨 맛인지 알고 있었다. 비오는 날 빠다코코넛을 들고 가다가 떨어트린 걸 주워 먹는 맛이라고 하면 알까. 멀쩡한 과자를 구정물에서 꺼낸 것만 같은 역겨운 맛이긴 하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나았다. 블러디 에이미는 여전히 은은하게 웃는 낯으로 날 빤히 올려다보더니, 이내 눈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난 기분이 불쾌해진 나머지 혀를 차곤 죄 없는 바구니를 발로 밀어 치웠다. 반대편 벽 모서리로 이동했다. 두 벽이 맞닿는 구석에 마그네트PD가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차갑게 그를 불렀다.
“야.”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듣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 그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웅크린 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심장 부근을 쥐어잡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털퍽 앉았다. 오른손은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이빨로 포장을 뜯었다. 포장에 틈이 생기자 나는 멀쩡한 손으로 비스킷을 꺼내 조금 벌려진 그의 입에 곧바로 쑤셔 넣었다.
“뭐, 뭣… 컥?!”
“먹어.”
그는 입에 문 비스킷을 망연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궜다. 바작, 하고. 비스킷을 씹는 소리가 났다.
식사는 9시가 되기 전에 끝났다. 비스킷을 한 팩씩 받았을 뿐이니까. 난 내게 주어진 몫을 전부 먹었다. 옆에 앉은 놈은 식욕이 없는건지 맛이 없어서 먹기 싫은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몇 개 먹지 않고 포장을 접기에 허락없이 뺏어 먹었다. 그 녀석은 뭐라고 따지지도 않고 멋대로 제 몫을 먹고 있는 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하다 못해 화라도 좀 내지. 난 괜히 답답해져서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다시 그 녀석의 입에 집어 넣었다. 그 녀석은 질겁하면서도 결국 입 안에 들어온 비스킷을 집어삼켰다.
식사가 끝나고 나자 두 사회자는 이 게임의 몇 가지 규칙과 유의사항을 설명했다.
“다들 다 먹었지? 아침 식사가 끝난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탐문 시간이야.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도록 해. 로비가 아닌 다른 곳에 가도 괜찮지만 서고나 3층의 휴게 공간처럼 개방적이지 않은 공간은 대부분 각자의 개인실로 배정되어 있어.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문패가 걸려 있으니 착각해서 잘못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모든 개인실은 잠금 장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귀중품을 잃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필요할 땐 우리가 임의로 잠금을 해제할 수도 있으니까 그 점도 유의해 줘!”
그때 주원하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점심 식사는 없는거군요.”
“식사는 하루 한 번, 아침 식사만 진행 됩니다.”
“그럼 15시 이후엔 뭐가 진행됩니까?”
“낮 3시부터 재판이 시작 될 거야.”
모두의 시선이 블러디에게 주목됐다.
“우린 재판에 관여하지 않아. 우린 진행만 맡을 뿐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 공평한 게임을 해야하잖아?”
“니가 어떻게 하는진 됐고, 저기.”
나는 중간에 말을 자르고 끼어 들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청람 옆에 서 있는 조그만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하늘을 닮은 기계 소녀. 이 도서관의 파수꾼인 에이미였다. 나는 실수로 이름을 부르거나 하지 않게 조심했다.
“저 녀석도 너희랑 비슷해 보이는데. 저 놈도 사회자냐?”
“아니. 사회자는 우리 둘 뿐이야. 그게, 제로는 옆에 선 인간이랑 친한 사이였거든. 혹시라도 적당히 봐주거나 하면 안 되잖아?”
그 녀석은 마치 내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재판이 끝나면 집행이 있을 거야. 그리고 밤 시간인 22시가 되기 전까지는 전원, 집행이 끝나자마자 개인실로 돌아가야 해.”
“집행이 끝나고 나서는 모두의 발언이 제한되니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시간 약속은 중요하니까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해.”
몇 가지 더 이어졌지만 실질적으로 게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블러디는 빈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자, 그럼. 지루한 설명도 끝났으니 시작해 볼까!”
그리고 첫 번째 탐문 시간이 시작됐다.
모든 게임의 진행은 도서관의 시계를 기준으로 한다. 모든 도서관의 시계는 정확히 똑같이 작동하고 있으며, 각자의 개인실과 각 층의 개방 공간에 하나씩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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