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프레를 해 보자!(下)

함께해서 즐거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헴프혁명 by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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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글이다. 원래는 상, 하 두 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분량 조절을 개같이 실패해버렸다… 오늘은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자.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여유롭게 입장하려면 그래도 9시 전까진 가야 했으니까. 가발과 의상이 워낙 튀기 때문에 화장을 거의 성형 수준으로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발과 의상에 묻혀서 얼굴이 엄청 밋밋해지는데 이 화장이 시간을 꽤 많이 잡아먹는다. 5시 기상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화장을 다 끝낸 뒤 자고 있던 친구를 깨웠다. 의상은 행사장에서 갈아입으면 되기 때문에 가발까지만 뒤집어썼다. 그러고 체크아웃을 하러 가니 무대화장 수준의 메이크업에 라벤더색 가발 쓴 여자가 방 키 돌려주니까 직원분이 적잖이 놀라시던데… 견디세요. 견뎌야지 뭐 어떡해… 원래 이런 데서 하룻밤 묵고 가는 사람들이 나사 하나씩 빠져 있고 그런 거잖아. 벙쪄있는 그를 뒤로하고 친구와 나는 모텔 밖을 나섰다. 수원메쎄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였는데 친구가 나를 너무 창피해해서 그냥 카카오택시 불렀다. 이해한다. 어디 내놔도 쪽팔릴 비주얼이었다…

수원메쎄에 도착했다. 전국의 오타쿠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웅장해짐을 느꼈다… 아아. 이것이 나의 동료들인가. 코스어랑 일반 관람객은 줄을 따로 서야 해서 친구랑 나는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코스어들은 의상 환복 등 준비할 게 많아 일반 관람객보다 더 일찍 입장하기 때문에 친구는 행사 입장까지 한참 기다려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얼리 입장권을 예매해 줬을 텐데. 얼리 입장권이란 일반 관람객이 남들보다 빨리 입장하기 위해 추가 비용을 내서 예매하는 입장권이다. 동인에서 인기가 많은 창작자의 굿즈는 순식간에 팔리기 때문에 더 비싼 입장권을 사서라도 일찍 들어가는 것이다. 얼리 입장권이 없었던 친구는 더러운 자본주의의 폐해로 한 시간 넘게 대기하고 나서야 나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만나서 친구 사진사 등록을 진행하고 우선 동아리 부스 먼저 둘러보았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바로 옆에서 서울 디저트 페어(이하 서디페)가 열리고 있었다. 서코는 보통 비오덕층 관람객도 끌어들이려고 자영업자들이 홍보를 위해 참가하여 디저트, 수공예품, 음식을 만들어 파는 서디페나 개인이 창작한 캐릭터로 팬시를 제작해서 파는 서울문구전이 옆에서 같이 열리는데 서디페가 같이 열리는 서코를 가면 음식을 먹으면서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좋다. 서코 행사장은 주변 상권이 열악하거나 인파가 너무 많아 인근 편의점, 카페가 도떼기시장이 되어버려서 행사 도중에 식사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행사장 전경이 아주 장관이었는데 공간을 반으로 나눠서 한 쪽은 서코, 한 쪽은 서디페가 운영되고 있었고 애니라고는 원나블*, 최애의 아이, 귀멸의 칼날이나 간신히 알 것 같은 갓반인 참가자들이 지나가는 코스어들을 붙잡고 시식용 음식을 먹여대고 있는 것이었다. 역시 돈 앞에서는 편견도 사라진다. 그렇게 하데스의 석류알을 먹어 버린 오타쿠들은 쭈뼛쭈뼛 지갑을 꺼내며 디저트를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걸 쓰고 앉아있는 나도 정작 서코 굿즈는 안 사고 디저트에만 10만 원 가까이 털렸다. 한 입 먹은 게 미안해서 한 개씩 사 주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다들 장사하시는 분들이라 맛은 있었고 그들의 호객행위가 나름 정겹고 즐거웠다.

서코 행사장의 야외에는 코스어들이 아주 많다. 이들을 구경하는 것도 서코의 묘미 중 하나인데 가끔가다 애니나 게임 캐릭터가 아닌 것을 코스프레하는 사람들이 있다. 십자군 갑옷을 입은 채 사람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프리허그를 한다던가 밀리터리 피규어 코스프레한다고 피부, 군복, 군모, 총기 전부 녹색으로 칠하고 하루 종일 발판 위에서 장난감처럼 서 있는 사람, 퍼슈트**를 쓴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아 보이는 퍼리***, 의미심장하고 철학적인 문구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는 사람 등 컨셉이 확실한 사람들이 이 행사의 재미를 높여준다. 그리고 용기만 있다면 서코에서 코스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촬영이나 급한 장소 이동, 휴식 등의 특별한 일을 안 하고 있는 코스어에게 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을 걸면 대부분 기분 좋게 찍어준다.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포즈를 요구하면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나 또한 의외로 사진 요구를 많이 받아서 행사 대부분을 사진 찍어주며 보낸 것 같다. 사진 찍자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인데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일반 관람객, 코스어와 사진사 등록 후 카메라 장비를 가지고 코스어를 피사체로 사진을 찍는 사진사가 있다. 지금까지 코스프레로 행사 두 번 정도 갔다 왔는데 내 경험 상 같이 사진 찍자는 관람객은 성비 반반 정도고 사진사는 대부분 남덕인 것 같다. 오덕 문화도 분야별로 여초가 있고 남초가 있다 이 말이야.

아, 씹덕 글 많이 안 쓰고 싶은데 자꾸만 말이 많아진다. 이 글도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왜 코스프레를 하느냐? 그냥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게 너무 좋았다. 이 생애를 살며 마주칠 수 있는 순간이 한 번뿐이기에 나눌 수 있는 그런 다정함이 있다.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허락을 받은 나보다도 더 기뻐하는 코스어, 코스프레 예쁘다면서 내게 사진을 요청하는 관람객,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요구하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사. 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가끔씩 나를 덜 외롭게 해준다. 문득 사는 게 재미 없어질 때 이름 모를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진다. 그뿐이다.


*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2000년대 소년점프의 3대 인기작.

** Fursuit, 개인이 독창적으로 창작한 동물 형상의 인형탈.

*** Furry, 사전적 의미로는 ‘털로 덮인’, ‘복슬복슬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지만 서브컬쳐 문화 내에서는 의인화 된 동물 캐릭터를 의미한다. 사람보단 동물 외형에 가깝게 의인화 된 것이다.


<번외-코스어로 참가할 때 소소한 팁>

1. 사진사 혹은 같은 코스어를 데리고 가는 게 좋다. 혼자 가면 사진 찍을 때 여러모로 불편해진다.

2. 가능한 본인이 잘 아는 캐릭터를 코스하자. 가끔 그 캐릭터 관련 대사로 드립을 쳐오거나 그 캐릭터의 시그니처 포즈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3. 사진 요청 시 웬만하면 기분 좋게 찍어주자. 그거 어려운 것도 아니잖나.

4. 의상이 생각보다 몸에 핏이 잘 안 맞거나 잘 뜯어지기도 하므로 옷핀을 넉넉히 챙겨가자.

5. 즐거운 마음으로!(제일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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