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3)
1장(낮), 소리치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온 건 7시 쯤이었다. 잠을 설친 난 결국 인상을 팍 구긴 채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1층 계단을 내려오자 먼저 로비로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일찍도 나왔네. 나는 일부러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1층을 훑었다.
프론트 쪽엔 사서 청람이 담요를 팔에 걸친 채 서 있었다. 그 옆엔 하늘을 닮은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열람실 벽에 기대 서 있는 건 이유선이었고 로비의 둥근 벽에 주원하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엔 이하림이 있었다. 옆에 앉아있다고 해서 달리 친근한 분위기로 보이진 않았다. 그보단 로비 전체에 음울하고 어두운 공기가 사람들을 있는 힘껏 짓누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불안에 손톱을 뜯고 누군가는 괜스레 긴 부츠로 벽을 두드렸다. 귓가의 귀걸이를 끊임없이 만지는 행동, 담요를 펼쳤다 접었다하는 것 역시 이 묵직한 분위기에 압도된 증거였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함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로 한 명, 두 명 남은 사람들이 합류했다. 그 다음 등장한 건 송세희와 진홍이었다. 그들은 DVD실에서 나왔고 명패는 송세희만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진홍의 개인실은 복사실인 모양이었다. 복사실은 DVD실을 거쳐서 들어가야 했으니까. 진홍은 묘하게 차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모습은 진홍이라기 보다는, 그래… 형사의 모습을 닮았었다. 첫만남이니 분위기를 풀자며 사진을 찍자고 권유했던 어리숙하고 소심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옆에 따라 나오는 송세희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진홍의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아무래도 같은 공간을 경유하는 사이니 더욱 껄끄럽겠지. 난 뭐가 두려웠는지 스치듯 마주친 눈을 회피했다. 이쪽이 먼저 눈길을 피한 것을 눈치챘는지 송세희 역시 더 이상 계단을 쳐다보지 않고 벽면에 쭈뼛쭈뼛 붙었다.
그쯤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등 뒤에서 내려온 것은 알렉세이 바실리예비치 표도로프였다. 하… 외우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는 내려오다가 서 있는 나를 보고 흠칫, 멈추더니 이내 나와 조금 떨어진 층계에 앉았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가 입술을 움직이거나 손으로 건들 때마다 담배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보교육실에서 선우진이 나왔다. 밤을 설쳤는지 눈밑이 심하게 어두웠다. 그 녀석은 이미 사람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있자 갈피를 못 잡고 주변을 둘러 보다가, 마주친 내 눈을 어색하게 피했다. 선우진은 결국 마지못해 송세희의 옆에 섰다.
그 다음 나타난 것은 무야호였다. 그는 예의 우산을 편 상태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눈을 몇 번 굴리더니 컴퓨터실 벽쪽에 붙어 우산을 접곤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장갑 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컴퓨터실에서 마그네트PD가 나왔다. 그는 파리해진 낯빛으로 벌벌 떨며 컴퓨터실과 DVD실이 맞닿는 구석 벽에 기댔다. 기댄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리가 풀린 듯 스르륵 주저 앉았다.
우린 그 상태로 조금 더 기다렸지만 달리 다른 사람이 나타나진 않았다. 우린 서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침묵을 유지했다. 누군가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 한 쌍의 눈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누군가는 불안에 차서. 누군가는 공포에 차서. 누군가는 고통에 차서. 누군가는 무기력에 차서.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처음엔 2주 정도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예상이 깨졌던 건 흡연 구역에서 눈을 떴을 때였다. 이미 이곳에 한 차례 감금 당했었기에 엄습하는 불안이 있었다. 이것은 악몽보다도 잔인한 현실이고 그게 단 며칠이라고 하더라도 그 며칠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아니, 몰랐을까. 알고 있기에 불안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부터였을까. 우리가 서로를 기억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기 급급해졌던 것은.
여기 모인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 중엔 엉뚱한 사람도 있고, 거친 사람도 있고, 상냥한 사람도 있었다. 대해 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들을 대하느라 삐걱거리기도 며칠. 결국엔 고집에 지고 마찬가지로 따듯하고 퍽 다정한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은 거꾸로 돌기 시작했고 첫 번째 아침이 밝았다. 우린 모두 무사히 어젯밤을 보낸 것일까? 모두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계단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 선 채로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천장엔 사람의 눈이 없었다. 참으로 다행히.
그저 답답했다.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 혼자만이 오롯이 이곳에 모인 열 몇 명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나는 신경질적으로 왼손에 끼운 바이크 키를 빙빙 돌렸다. 키에 주렁주렁 달린 장식들이 자기들기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생각이 멈췄을 때 손에 키를 잡아 챘다. 어쨌든 난 이 얼어붙은 분위기가 질색이었다. 문득 나는 어떤 충동을 느낀다.
그저 소리치고 싶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어디 초상 났나.”
그때와 했던 말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격려가 아니었다. 이 긴장된 재판의 현장에서 겁에 질려 멈출 것 같은 발을 억지로 떼기 위해 엄포를 놓은 것에 불과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아, 정말이지. 이래서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부러 위협하듯 혀를 찼다. 내 말을 받은 것은 이유선이었다.
“그러고보니 어젠 총성이 울리지 않았죠.”
“이 게임의 참가자는 11명이라고 했으니… 지금 전원이 로비에 모인 것이라면 어젯밤엔 사상자가 없었나 봅니다.”
이어지는 말은 주원하의 것이었다. 여전히 손톱을 만지고 있었지만 원래의 침착함을 어느정도 되찾은 목소리였다.
“규칙에 따르면 아침 방송이 울리고 1시간 내로 로비에 모여야 한다고 했고 이제 곧 8시가 되니 틀림 없겠지.”
“그러고보니 식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먹을 것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하림 역시 어딘가 차분했다. 그는 여기저기 발랄하게 뛰어다니며 셔터를 억지로 열어 보겠다며 힘껏 걷어 차고 헤프게 웃곤 했는데, 우리 중 누군가 처음 사라졌을 때처럼 그 목소리엔 나로선 잘 알 수 없는 조용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이하림의 말에 사서 청람은 손을 조용히 들곤 앞으로 조금 나서며 말했다.
“우선 도서관을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저는 사실 이전에 이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어요. 남아 있는 식량같은 게 있을 지도 몰라요.”
“그냥 보기에도 일반적인 도서관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서관에 먹을 게 있을까요….”
청람이 선우진의 질문에 답하기 전 대화에 끼어든 것은 진홍이었다. 그는 목에 건 카메라를 끊임없이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보다는 이 도서관엔 달리 나갈 방법은 없는 겁니까? 살펴보니 대부분의 창문이나 문에 셔터가 쳐져 있는 듯 한데요.”
진홍의 말대로 그때 그랬듯이 도서관의 문이란 문은 전부 다 셔터가 쳐져 닫힌 상태였다. 청람은 조금 곤란해보이는 얼굴로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요…….”
나는 모른다는 듯 적당히 에둘러 말하는 사서 선생의 얼굴을 가만 살폈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이 동일하다면 도서관엔 2주일 정도를 보낼 수 있는 보존 식량이 있으며 그는 이 도서관을 만든 설계자와의 연락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대화에서 빠지듯 몇 걸음 뒤로 다시 물러났다. 나는 구태여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어젯밤. 고요히, 지나갔다는 거겠죠…….”
“그, 그럼… 어쩌면 마피아 역할을 받으신 분들도 이런 게임을 하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닐까요? 이런 거 하지 않아도 다같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나는 송세희가 꺼낸 말을 자르듯 계단을 훌쩍 뛰어내렸다. 지겹게도 떨리고 있는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 속에 감춘 채였고 내가 바닥에 착지한 순간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일순 한 두 마디씩 오가던 말들이 일제히 멈췄다. 나는 모두의 시선이 닿는 곳에 똑바로 선 채 반대쪽 벽면에 선 송세희를 바라봤다. 내 시선은 천천히 이 게임의 플레이어들을 훑는다. 그리고 한바퀴 죽 돌아 멈춘 곳은 선우진이었다. 나는 잠깐 그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송세희를 마주보고 이야기 했다. 더는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게 내심 아팠다.
“넌 꿈이라도 꾸고 있는거야? 그런식으로 적당히 도망치는 건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오늘 낮에도 누군가는 목이 매달릴지도 모르고 밤이 되면 어젠 울리지 않은 총소리가 울릴지도 모르잖아.”
“그, 그치만… 그럼 이런 정신 나간 게임을 하자는 거예요?”
“할 수 밖에 없잖아.”
송세희는 말이 없었다. 그 눈은 약간의 절망에 흔들렸다. 그리고 곧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지금은 이 말이 괴롭고 아프겠지. 그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넌 의젓하게 일어나 똑바로 걸었고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먼저 끌어 당겼어. 그러니 괜찮을 것을 알았다. 너 역시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린 각자가 상황을 바꿔 갈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군가 날 죽여주길 기다리기만 할 거야? 우리 중 누군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누굴 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괴롭고 살해 당할 밤이 두렵다고 해도,”
말하자면 송세희의 제안은 달고 아늑한 도피처였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답이었다. 어쩌면 내심 송세희가 아닌 누군가도 그것을 바랐을지 몰라.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인 게임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삶으로의 길에서 눈을 돌리고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그때와 도서관 상황이 같다면 언젠가는 식량이 동날 것이다. 누군가가 게임을 포기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사이에도 다른 누군가는 승리하기 위해 부던히 움직일지 몰랐다. 어제도 누군가 죽지 않았을 뿐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순 없었다. 하룻밤 사이 무언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몰라. 그저 막연히 있을지 말지도 모르는 탈출구를 찾는 건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살아남는거야. 남을 의심하고, 추궁하며, 상처 주고, 함부로 재단하고 심판하여 그 결과로 누군가를 죽게 하고 그 시체를 밟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서 나가야지 않겠어?”
7시에 아침이 밝는다. 아침이 되면 아침이 되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모든 참가자는 8시까지 1층 로비로 모여야 한다. 22시가 되면 밤이 되며 마찬가지로 밤이 되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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