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2)
1장(밤), 그리고 모두가 있었다
빨간 소녀는 우리가 여자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기계팔로 전등을 도로 덮어놓곤 가버렸다. 전선을 억지로 뽑는 바람에 빛은 아까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사라지고 기척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나는 흡연구역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어떻게 만든건지 파르르 떨고 있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등 뒤에 기댄 자판기 벽면이 차가웠다. 쥐 죽은 적막 속에 홀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서 한참을 침묵했다. 숨만 조금씩 내쉬고 있는 지금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정신이 돌아왔다. 몸에 피가 돌자 그제서야 아픈 게 느껴졌다. 으스러진 손은 전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저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만 했다. 하… 좆같네.
그 놈은 어느 새에 그랬는지, 여권처럼 생긴 경찰 수첩을 두고 갔다. 그 옆에는 빨간색 무선 이어폰이 한 쪽만 있었다. 덮개는 위로 여는 형식이었고 덮개 뒷면엔 능력을 쓰는 방법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바닥엔 길가에서 산 것 같은 싸구려 경찰 배지가 붙어 있었다. 이름도 사진도 없는 그저 그 뿐인 물건이었다. 경찰이라는 증표라도 된다는 건가? 이어폰은 일단은 껴봤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이 놀라울 만큼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이미 한 차례 말도 안 되는 12일의 감금을 겪어서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때 질릴만큼 비현실을 겪었다.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는 차치하고서라도 싸워서 이긴 놈만 나가게 해주겠다는 말이 외계인이 만든 괴담같은 도서관에서 지하를 따고 들어가서 수 분 마다 바뀌는 미로를 몇 번 뚫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들리긴 했다. 그리고 피까지 전부 뽑아서 사람을 죽인 놈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흔히들 말하곤 하는, 꿈으로의 도피도 하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서 편지를 줍곤 일어났다. 어쨌든 ‘마피아 게임’이라고 했으니 나의 정체를 남에게 들키지 않는 게 기본이겠지. 그 말인 즉슨 다른 녀석들도 각자의 역할을 받았을 것이고, 그리고 누군가와는 적이 되고 아군이 되었을테다. 그렇다면 여기 가만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어쨌든 나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선우진을 찾은 건 1층 정보교육실에서였다. 그냥 감으로 때려 잡은 건 아니고, 방마다 문패가 걸려 있었다. 빨리 나온다고 보진 못했지만 아마 흡연실엔 내 명패가 걸려 있겠지. 나는 문 두드리는 것도 잊고 문을 박차고 열었다. 선우진 역시 일어나 있었는지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갑자기 감금 당하고 얻어 맞은 데다가 일어났더니 살인 게임에 휘말렸다. 뭐, 이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겠지. 나는 드물게 문을 노크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누, 누나… 다행이다. 있었구나. 괜찮아? 이상한 일 당하진 않았어…?”
다행히 이 녀석은 평범하게 제 누나를 기억하는 듯 했다. 여기에 우리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난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재간도, 자신도 없었기에 그냥 그 일에 대해선 침묵했다. 사실 알려서 좋을 게 없을 것을 알았다. 알려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린 원래 약 2주일 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였고 생사를 달리했으며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봤자 좋을 게 없었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떨쳐내는 게 더 어려워 질 뿐이었다. 선우진은 쩔쩔매며 인상 쓴 내 낯을 살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내 어깨를 팍 붙잡았다.
“누, 누나! 피나, 어쩌다가 이마가… 손은 또 왜 이래?"
“아이고, 귀 울린다. 조용히 좀 해.”
딱히 그렇게 시끄러운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귀를 막는 척까지 해가며 입을 다물게 했다. 나는 조용히 정보교육실 문을 닫고 선우진에게 가까이 붙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잘 들어라. 너랑 나랑 앞으로 여기서 나갈 때까지 서로 모르는 사이인 거야.”
“왜… 그보다 손은?”
“서로 짰냐고 캐내면 귀찮아지잖아. 이름 물어보면 성 떼고 말해. 어차피 너랑 난 전혀 안 닮았으니까 생긴 걸로 의심 받진 않을 거 아냐.”
나는 적당히 말을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나는 상처나 손을 숨기려는 것처럼 몸을 약간 돌리며 모자를 눌러 썼다. 한편, 정보교육실은 내가 단체 조사를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었다. 그땐 들어가자마자 빔 프로젝터가 자동으로 켜졌었는데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듯 했다. 빔 프로젝터를 비추는 스크린 아래에 아무것도 없는 단상이 하나 있었다. 선우진은 이 단상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열린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보라색 이어폰이 굴러다녔다. 저 녀석도 이어폰을 받은 건가? 나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 내 이어폰을 빼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진은 자꾸만 손을 어쩌다 다쳤냐며 캐물었다. 나는 못 이긴 척 다친 오른손을 선우진에게 쥐여줬다.
“도대체 왜 이래, 손이?”
“야, 아파!”
“설마… 그 기계 여자아이를 주먹으로 때린거야…?”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괜시리 짜증을 내며 손을 도로 걷어냈다. 기계 여자아이라면 아무래도 사회를 맡았다는 기계 놈들이겠지.
“여기도 이상한 기계 녀석 다녀갔냐?”
“그 초록색 여자아이?”
포레스트가 다녀간 듯 했다. 그렇다면 에이미는 어떻게 된 거지? 그 녀석은 이 게임의 참가자일까, 아니면 같은 사회역일까.
문득 그 녀석과 나눈 약속이 생각났다. 탈출했던 날, 나는 에이미에게 함께 이 도서관을 떠날 것을 권유했다. 어차피 주인도 버리고 간 곳이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곤 웃는 위험한 녀석들이 형제랍시고 있는 이 이상한 도서관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여기 두고 간다면 다음 누군가 이곳에 올 때까지 그것은 혼자 남겨지겠지. 돌봐줄 사람이라면 사서 청람도 있고 당초에 유능하고 여러가지 어려운 기능들이 탑재된 로봇이니 어디든 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을테다. 그 녀석은 세계의 끝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냐는 내 말에 긍정했고 깊게 고민해본다고 말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 거대한 지식의 서고를 지키는 기묘한 파수꾼을 남기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말을 아꼈다. 이 게임을 꾸려놓은 사회자라는 놈들은 딱히 우리가 쌍둥이라는 형편을 고려해서 역할을 주지도 않았고 혈연 관계라는 사실이 우리 둘에게 특별히 유리한 상황을 주지도 않았다. 모두가 즐겁고 공평하게…… 인가. 나는 뭐라 더 말하려는 선우진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누나도 그 기계를 봤어?”
“누나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뭘 믿고 그렇게 일일이 알려주려는 거야. 내가 마피아면 넌 어떡할래?”
“그건… 그럴 리가 없…”
나는 선우진의 말을 석둑 잘랐다.
“그런 물러터진 생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어?”
“……”
“아무도 믿지 마.”
누군갈 섣불리 믿거나 함부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삶을 팽개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을 믿지 않고 감히 다른 사람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곳에서 발버둥치고, 기어이 살아남아서, 일상을 되찾는 방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선우진에게 말했다.
그리고 반드시 여기서 나가는거야.
그 순간에 종소리가 울렸다.
이 게임의 참가자는 총 1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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