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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1)

1장(밤), 그리고 모두가 있었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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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우린 함께였다.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최악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 곁을 떠났던 녀석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쾌하다고 느끼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우린 또 다시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서관에 갇혔고 나갈 방법 역시 마땅치 않았으니까. 한 번 탈출했음을 기억하고 있던 건 오로지 나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게 짜증나져서 괜스레 정문 셔터를 발로 찼을 때,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던가. 그 순간에 한 가지 섬짓한 예감이 들었다. 이것이 꿈이 맞을까? 손을 잡은 건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그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것의 손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거멓게 점멸했다.


깨어난 곳은 흡연실 안이었다. 내가 기억했던 것과 비슷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뭐야? 고개를 돌렸던 그 순간에 무언가와 마주쳤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 마저도 확실하진 않았다. 다만 어딜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고 관자놀이가 세게 짓눌린 듯 아팠다. 당초에 정문 근처에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3층이었을 흡연 구역에 누워 있던 것이 이상했다. 다들 어디간거지? 주변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발끝부터 싸한 냉기가 느껴졌다. 주변이 추운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직감은 경험의 축적된 형태다, ⋯⋯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나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낯익을 터인 흡연구역을 샅샅이 뒤졌다. 흡연구역은 휴식 공간과 붙어 있었고 출입구에 문이 있었다. 중앙에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고 소파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책상 크기에 맞지 않게 조그만 재떨이가 하나 있었고, 녹이 슨 자판기가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유행하는 최신 담배 하나 없는 것이 그때와 똑같았다. 도대체 누가 요즘 세상에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겠냐? 책상 아래엔 그때와 똑같이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통 바닥에서, 편지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모든 게 다 낯설고 색이 바란 20년 전의 공간에서 유일하게 새것처럼 새하얀 봉투였다. 봉투는 이상한 씰로 봉인되어 있었고 겉봉투에 내 이름이 있었다.

선우빈

발신인은 없었다. 받는 사람만 적힌 편지가 몹시 불쾌해서 인상이 구겨진 나는 거칠게 편지를 뜯었다. 봉투 안엔 잘 접힌 작은 편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편지엔 상당히 난잡하고 삐뚤삐뚤한 글씨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귀하의 역할은 경찰입니다.

매 밤마다 원하는 사람 한 사람을 수색하여 해당 대상이 마피아인지 아닌지 조사할 수 있습니다.

시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천장에서 인기척이 들린 건 그 직후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천장 전등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내가 천장을 홱 쳐다본 그 순간에 파지직, 소리를 내며 전등이 꺼졌다. 전등이 꺼지자 흡연실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달리 빛이 나는 물건이 없었다. 자판기는 작동할 뿐 20년이 지나도록 빛이 나는 버튼은 없었고 내게 핸드폰처럼 빛을 낼 수 있는 물건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방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억지로 전등선을 헤집고 뜯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휴식 공간으로 나가는 문 쪽으로 이동했다. 여차하면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갈 셈이었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이 도서관을 탈출했던 날의 이틀 전 일이다. 나는 이유선, 백자석, 송세희, 선우진과 함께 도서관을 조사했었고… 천장에서 타일이 떨어져서, 천장을 올려다 본 그 순간에,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물러서던 걸음을 딱 멈추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소리쳤다.

“어떤 새끼야. 나와.”

멋대로 거친 말이 튀어나갔다.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뛰쳐나간 말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우린 그 녀석에게 목숨을 빼앗겼으니까. 그런데도 마주했을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그것이 두고두고 분했다. 떠나고 나서도 계속, 그 녀석들의 사망 신고를 하고 장례를 지내며 멋대로 지낸 기일에 추억의 숲을 찾아갈 때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 묻고 싶었다. 도대체 그 녀석들은 왜 죽어야만 했냐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찾았던가보다. 누군가가 죽었어야만 했던 그 이유를.

천장 뚜껑이 열린 듯 했다. 더러운 성깔은 여전한지 억지로 뜯어낸 전등을 대충 휙 던져낸 듯 했다.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건 소파에 떨어트려서일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참으로 대담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기계 놈들은 뭐가 다른가. 버스럭 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천장 구멍에서 작은 빛이 보였다. 빛은 두 개였고, 새빨간 색이었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더니 나를 발견한 듯 이쪽을 바라봤다. 역겨울 정도로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여전했다.

“일찍 일어났네, 너. 역시 건강하고 튼실한 인간들이 빨리 일어나는 모양이야. 내가 남긴 편지는 잘 읽었어?”

“편지는 무슨 빌어먹을 편지.”

“괜히 말 돌리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희가 하는 행동은 전부 다 모니터 되고 있거든.”

“변태냐?”

“그런 게 아니라, 너희가 규칙을 어기면 곤란해지잖아? 모두가 즐겁고 공평하게 게임을 하기 위해서야. 우리는 사회역을 맡았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

게임? 나는 짧게 반문했다.

“마피아 게임! 너희 인간이 만든 재밌는 유흥거리잖아.”

“방에 둥그렇게 모여서 고개 숙이고 ‘밤이 되었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주세요’ 하는 거?”

“그래, 맞아. 이번엔 언탄이 아니라 실탄을 쏘는 거지만.”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네가 이해한 그거 맞아.”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눈에 보이는 붉은 빛을 향해 돌진했던 것 같다. 뭐가 됐든 좋으니 저 천진난만한 낯짝을 잡아 뜯어내고 싶었다. 어째서 저렇게 쉽게 말하는거지? 또 다시 누군가의 죽음을 반복하라는 뜻인가? 그것도 우리들의 손으로. 악에 받쳐 허공으로 내지른 주먹을 막아낸 것은 차갑고 단단한 기계팔이었다. 보이진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딪힌 순간에 깡, 하는 소리가 났으니까. 명쾌하게 울린 소리 만큼이나 손이 세게 진동했다. 기계손이 고통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나는 충동적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신음을 억지로 참았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깟 것에 지고 자존심이 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어둠 속에서 벌겋게 빛나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있는 힘껏 그 이마에 내 머리를 박쳤다.

“아이, 정말로! 성깔 참 더럽네, 너.”

“내가 좀 하는 돌머리거든.”

기계가 고통을 느낄 리 없는 건 알았지만, 어쨌든 저 녀석이 한 차례 뒤로 물러나면서 기계손 역시 내 손을 놨다. 이마에서 피가 주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오른손이 멈출 줄 모르고 떨렸다. 흥분에 찬 숨이 가쁘게 뱉어졌다. 숨이 찬 와중에도 난 그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딴 개같은 게임 할 것 같냐!”

“할 수 밖에 없을 걸. 나가고 싶지 않아? 이런 이상한 도서관에서.”

“고작 나가겠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겠어?”

“그건 네 생각이지. 그렇게 단정짓는 건 좋지 않아. 누군가는 고작 그런 이유로 남을 망설임없이 쏴버릴거라고? 그리고, 어차피 넌 쏘는 역할이 아니잖아. 우리가 네게 부여한 역할은 그 처형자들을 찾아내는 거야. 밤마다, 한 명씩 말이지. 너라면 이해할 것 같은데,”

이 도서관에 너 혼자만 온 게 아니잖아?

심장을 콱 짓누르는 말이었다. 그래. 이 도서관에는 나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이 도서관도, 감금됐다는 상황도, 저 증오스러운 낯짝도 똑같다면 아마 이 도서관의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 아이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겠어?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반항해도 우린 상관 없어. 대신 누군가가 죽어가겠지. 너 때문에.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바로 너! 너야.”

“웃기지마.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쏜 놈이 잘못한 거지.”

“그치만 넌 후회하게 될 걸. 네가 막을 수 있었다면서.”

“지랄 말고 할 말 다 했으면 썩 꺼져.”

“네, 네~ 알겠네요. 내가 준 편지는 뒷면도 있으니까 꼭 읽어야 해? 이번은 봐준거야.”

웃기라도 했는지 붉은 눈동자가 조금씩 사라졌다. 곧 다시 나타난 두 붉은 빛은 다시금 경고하듯 나를 쳐다본다.

“다음은 없어.”

그리고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밤이 되면, 각자의 부여받은 역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낮이 되면 충분한 토론을 거친 뒤 재판을 하게 된다. 가장 많이 득표한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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