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

이름

선우빈 → 백자석

폐허 by 필멸
10
0
0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선우빈이 다시 도서관에 갇히다니. 선우빈은 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현실이라고, 그야 그렇겠지. 봐라,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 선우빈은 그것이 얼음보다도 차가운 환상임을 알았다. 참으로 잔인한 악몽이었다.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이 흘렀다. 사람들은 감금 당한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서로 저마다 다른 말들로 떠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사서라는 자와 기묘한 생김새의 기계를 주축으로 상황이 돌아갔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통성명을 한다. 그리고 선우빈은 그 속에 끼지 않고 벽 한 켠에 삐딱하게 기대 선 채였다. 간혹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먼저 눈을 돌린 건 이쪽이었다. 하긴, 사실이 그랬다. 이름 따윈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그리고 우리의 결말이 어떨지도⋯⋯ 하지만 기어이 제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선우빈은 또 다시 퉁명스러운 말을 건넨다.

“뭘 봐.”

“당신을 보고 있었지.”

“뭘 봐는 인사가 아니지, 누나⋯.”

그는 옆에서 쩔쩔매는 선우진을 무시했다. 먼저 다가온 것은 백자석이었다. 그는 별 이유도 없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선우빈에게 다가왔다. 선우빈은 우리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먼저 이름을 건넸다. 사실은 그가 겁도 많고 제법 내성적인데다가, 소심한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때처럼 모든 말이 다 날카롭진 않았다.

“선우빈이다, 내 이름.”

“고맙게도 이름을 알려주는군. 나는⋯⋯”

“자석. 맞지?”

너는 어떻게 반응할까. 무심한 붉은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작아진 동공을 응시한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자연광 하나 들어오지 않는, 잘 정리되어 있지만 오래 된 탓에 퀘퀘한 도서관 내부는 적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각양각색한 목소리가 공간의 외로움을 먼지 털듯 치워냈고, 나 역시 불안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말상대 없이 떠돌아 다니는 이들에게 간간히 접근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조금 눈이 사납지만 아리따웠던 이에게도 발걸음을 옮겼다.

선우 빈이라는 여자는 신경이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본 지 얼마 안 된 사이인 우리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으면서 동시에 다음에 상대가 무슨 말을 할 지, 무슨 일을 벌일지ㅡ 어쩌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눈치였다.

“아.”

“ㅡ재치 있는 농담이었어.”

「마그네트」를 자석으로 해석한 단순함, 이라고 편할 대로 이해했다. 닉네임이 본명과 얽혀 있는 이상, 사람들이 우연히 내 이름을 부르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 그게 본명인 줄은 보통 추측하지 못 한다. 나는 신상 관리도 잘 하고 있으니까. ㅡ하지만 너에게서, 나는 그립고 반가운 향기를 맡았다.

왠지, 만나고 싶었다는 기분을.


선우빈은 그가 놀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야,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마그네트라는 것은 본래 자석이고 그가 PD 활동에서 사용하는 가명은 본명에서 따 온 것이니까. 중학생 때까지긴 했지만 아이돌 영상 같은 것도 종종 보긴 했으니 세간에선 유명인들의 활동명을 애칭처럼 변형해서 부르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자석, 이라고 불렀을테다. 그게 그의 본명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로.

한편, 이제는 어떻게 할까. 선우빈은 결국 이 상황에 개입하고 말았다. 모든 결말을 알고 있는 자로서 이 세계에 기어코 발을 들이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앞이 어찌 될 지 알지 못했다. 그는 서글픈 엔딩을 뒤바꾸기 위해 몇 번이고 분투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과거로 돌아간 기회를 명특하게 사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돌아간’ 게 아니었다. 그저 반복할 뿐. 어떤 식으로 이곳의 12일이 흘러가든, 이것은 그저 선우빈의 한 잠 꿈에 불과했다. 이 밤이 지나고, 선우진이 그를 깨우면 끝나버릴 덧없는 시간이었다. 실제로 그랬듯 이곳에서 숨을 거둔 누군가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도, 그 목숨을 애써 살려내도 눈을 뜨면 전부 없던 일이 되어버릴테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 되지는 못했다. 현실로 만들기엔 너무도 늦어버렸다. 우린 이미 이곳을 떠났으니까.

그래도 만약 또 다시 이 2주를 반복한다면, 그는 죽었던 이들이 다시 또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그것이 처절한 자기위로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다 알고서도 방관하는 것이 저에게 무언갈 남기고 떠난 이들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방관이라. 그러고보면, 난 당신을 방관자라고 비난했던가. 그는 마침 첫 날, 제게 먼저 다가왔던 이를 앞에 두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나는 굳이 서로 물고 뜯는 싸움터에 난입하고픈 마음은 물론, 성심성의껏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픈 마음도 없거든. 설령 노력하더라도,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괜히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선우빈은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기어코 누군가의 주검이 돌아왔을 때 백자석이 모두가 자는 심야에 홀로 컴퓨터실을 지키고, 컴퓨터나 키보드 사용이 미숙한 선우빈을 도와 공유 문서에 기록을 남기고, 그 자신으로서 이 도서관을 탐사할 것을 약속했음을 알았다. 마지막 날엔, 기어이 바깥에 쏟아지는 비를 맞고 돌아오기까지 했던가. 당신은 굳이 살인하는 기계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도서관에 들어가서, 성심성의껏 캐비닛을 열고 보드에 적힌 계산식을 노려보며 책상 위의 낙서를 뚫어져라 쳐다봤더랬다. 설령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래는 변할 수 있으니까, 괜시리 당신의 시간을 낭비했었지.

만약 지금이 또 다시 주어진, 그렇게 큰 의미는 없다고 하더라도, 과거 마저 뒤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면 그에게 방관자라고 비난했던 말들을 철회하고 싶었다. 선우빈은 능청을 떠는 백자석에게 마찬가지로 천연덕스러운 말을 건넸다. 당신은 눈치챘을까. 그가 아주 조금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 네 팬들이 이렇게 부르더라고. 그 이름 너에게 잘 어울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