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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 멜트다운 1987

SVT RPS / 양키와 프리터 / 10200자

태주 커미션 by t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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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는 자기를 미도리, 로 부르라고 했다.

그때 전원우는 일본 생활 삼 년차가 다 되어가는데도 시부야계와 아키바계를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등짝에 벌건 붓글씨로 夜露死苦요로시쿠가 적힌 새카만 특공복에 쨍한 녹색으로 머리 색을 뺀 양키 김민규에게 너 하츠네 미쿠 뭐 그런 거 좋아해? 하고 물을 수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멍청하면 용감하다던가 …… 김민규, 아니 미도리가 하얀 송곳니를 반짝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서.

미도리가 야, 하니까 전원우는 쫄았다.

그러니까 전원우는 하나도 용감하지 않았고, 그렇게 멍청한 경로의 사고를 거쳐 그런 말을 뱉은 것도 결코 아니었단 거다. 전원우는 다소 억울했다. 다음과 같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고정관념이 중첩 및 복제되어 도출한 결론이었다.

i. 양키든 폭주족이든 리젠트 머리가 정석이 아닌가. 미도리의 머리는 단정하다. 그냥 하츠네 미쿠랑 색만 똑같다.

ii. 특공복은 요즘 오타쿠들이나 입는다. 시부야고 아키바고 좆도 관심 없는 전원우도 그건 안다.

iii. 무엇보다 사람으로 미어터진 2021년 도쿄도 시부야 구 한가운데서 누가 폭주를 뛴단 말인가.

무엇보다 전원우는 미도리라는 이름이 그랬다. 그냥 여자 이름 같잖아. 잘하면 190도 족히 되어 보이는 다소 위협적인 거구의 남성이 자기를 미도리로 소개하는 게 그냥 좀, 그랬다. 뒤지게 무섭기도 했고 …… 그럼 뭐 코스프레나 오카마 그런 거야? 그렇게 물으려고 아주 잠깐 생각하기도 했는데 미도리가 야, 할 때 쫄아서 냅다 집어치웠다. 전원우 입술 안쪽이 바싹바싹 말랐다. 24세 전원우에게 일본은 약속과 기회의 땅도 아니었고 애초에 큰 야망이나 꿈을 갖고 건너 왔던 것도 아니며 그저 며칠 벌어 며칠 먹고 사는 프리터로서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는데 왜 이 멀고도 가까운 타국 땅에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가.

무서움 너머로 쪽팔림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자존심도 상했다. 전원우 작은 키도 아닌데 은근히 자길 내려보는 듯한 미도리의 시선에 배알이 꼴렸다. 집에 가고 싶다. 전원우는 할 수만 있다면 울었을 거다. 전원우는 손을 내렸다. 카운터 아래를 더듬거려 비상벨을 찾으려고 했는데 미도리가 냅다 손목을 쥐었다. 그때 전원우는 진짜 까무러치고 싶었다. 아 나 입술 터진 것 같애. 놀라서 콱 깨문 게 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니 불행일 수도 있고 ……. 가칠가칠한 붕대를 감은 미도리의 두 손이 전원우 손목 꽉 쥐고 물었다.

정말로 시부야의 미도리를 모르냐고, 미도리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씨발 새끼야 …….

✦ ✦ ✦

넌 고리타분하게 생겨서 책 읽는 꼬라지도 딱 그렇다.

누가 한 말인진 기억도 안 난다. 전원우 고등학생 시절 얘기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서 전원우는 그때 반박도 안 했다. 모비딕이나 데미안 따위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전원우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딱히 호시절도 아닌 기억이 왜 떠올랐냐 하면은 …… 일단 전원우는 아침 일찍 볼을 긁으며 잠에서 깼다. 온몸이 간질거렸다. 헌 이불은 다 내다 버렸다. 이번 여름 큰맘 먹고 장만한 새 이불이다. 저번 주에 빨래 후 햇볕에 잘 널어두었으니 지긋지긋한 베드버그나 알레르기도 아니다. 날이 더워져 살이 물렀나 생각했다. 더듬더듬 벗어두었던 안경을 찾아 쥐었는데 침대 옆 바닥에 조그만 바퀴벌레 한 마리가 몸을 뒤집고 누워 있었다. 진짜 여름이다. 이 좆같은 해양성 기후 국가에 걸맞은 한 계절의 스타트다. 시부야에서 세 번째 여름을 맞는 전원우에게 이제 이런 것 쯤은 덤덤한 일이다. 덤덤한 일이 되었다고 해서 짜증이 안 난다는 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모든 구식 목조 건물을 도끼로 내려찍는 상상을 하며 전원우는 집을 나섰다. 귓바퀴 안쪽까지 혓바닥처럼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뜬 눈으로 벌레가 되는 꿈을 꾸는 것 같다.

지겨운 숨을 내쉬었다.

뼈대를 목조로 쌓아 올린 낡은 맨션에서 골목을 따라 조금만 걸어 나가면 모퉁이 너머로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가 보였다.

항상 우글우글한 인파가 오가는 교차로가 관광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전원우는 항상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시부야에 왔을 때부터 그랬다. 그건 인파라기보단 헐떡이고 어슬렁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짐승 같았는데, 전원우는 거기 뛰어드는 게 제일 싫었다. 인파에 떠밀리다 빠져나오면 겨드랑이 안쪽이나 무릎 뒤쪽 같은 곳의 살점이 떼어먹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 무슨 이 여름엔 드잡이를 해도 모자랄 가혹한 기후의 나라에서 거길 통과하는 건 고역이었다.

전원우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의 중심에서 살짝 비켜난 곳에 있는 로손에서 일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적당히 바쁠 때엔 바빴으며 한가할 땐 한가한 정도였다. 타워레나 콘서트홀이 있는 쪽과는 꽤 거리가 있는 건너편이어서, 관광객들보단 IT 업계 종사자들이 근처 호텔에서 숙박하며 들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간혹 진상을 부리는 고객은 있었는데,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싱겁기 그지없는 인간인 전원우는 시비가 걸려도 무던했다. 그런 탓에 큰 소란 없이 일 년 가량을 일했다. 별일 없다면 계약서를 새로 쓰고 일 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재수가 없으려니까 일이 터졌다.

평소엔 털끝 하나 내비치는 일 없던 점장이 와서 결산을 하겠다고 나서기에 전원우는 말없이 끄덕였다. 구석에 서서 조끼를 벗고 퇴근할 타이밍이나 재고 있던 때에 점장이 그랬다. 일만 엔이 비네.

네? 전원우는 멍청하게 물었다.

일만엔이 빈다니까.

기가 찼다.

눈칫밥 하나는 알아서 차려 먹는 스타일의 전원우가 저 은근하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스탠스를 띤 일본인들의 화법을 모를 리 없다. 이 땅에서 전원우가 가장 먼저 배운 게 일본인들의 속내를 교활하게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멍청하게 얼이 빠져 있더라도 …… 본능적으로 몸 어느 한 구석이 팽팽 돌아서 점장의 속내가 뭔지 딱 닿아오는 거다.

아, 이거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전원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원우 오늘 잘리는 날인가보다. 불쌍한 새끼 …….

한숨이 나왔다.

삼십 분 전쯤에 체크했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다. 돈통도 재고도 뭐 하나 부족하거나 남는 것 없이 꼭 맞았다. 잘리는 마당에 퇴직금은 무슨 쌩돈 일만엔 뱉어내고 나가게 생겼다. 조금만 더 채우면 일 년인데. 전원우도 안다. 그래서 잘린 거다. 여긴 죄 나쁜 놈들 되긴 싫어하는 못돼처먹은 새끼들 밖에 없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터진 일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전원우다. 억울하긴 해도 비효율적인 감정은 취급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었다.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을 견디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원우의 일어는 그렇게 매끄럽지 않고 억양이 희미했다. 원체 악센트가 도드라지지 않는 언어라지만 전원우의 일어는 지나치게 분명한 이방인의 언어였다.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있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앞날 캄캄하긴 하다. 비자고 취직이고 … 점장이 쏟아내는 단어와 활자의 모서리에 쿡쿡 찔리는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툭툭 떠밀리다가 삐끗했다.

휘청거리다가 카운터 뒤쪽을 짚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가오 다 뒤졌다, 씨발. 애초에 세운 적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 안경도 벗겨졌다. 눈앞이 침침하다.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그때 하필 이 고루한 세계에 입장한 게 미도리다.

미도리는 오른쪽 팔에 헬멧을 끼우고 왼쪽 어깨로 문을 밀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전원우가 안경을 주워 쓰자 그제야 공중에 둥둥 뜬 녹색 원에 눈이 그려지고 코랑 입도 생겼다. 까무잡잡하고 선명한 미도리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눈치껏 어련히 다시 나가겠거니 싶었는데 미도리는 그대로 카운터 앞까지 걸어왔다. 전원우는 그때 그냥 딱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고 비뚤어진 안경을 바로 썼다.

점장, 삼 분 전에 잘린 프리터,

밝은 녹색 머리의 폭주족.

세 사람이 편의점 안에 서 있었다.

봉준호 영화 같다고 전원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진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전원우에게 미도리는 최상급 또라이로 각인되었다.

미도리는 품고 있던 헬멧을 카운터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선 깍지를 껴 두 팔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목을 양쪽으로 두어 번 꺾더니 점장과 전원우를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리고 애처럼 웃었다.

좀 개 같기도 했다.

눈이 둥글어서 그런가. 전원우가 얼이 빠져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미도리는 내리 찍듯 발로 차서 매대를 엎었다. 어? 전원우가 엎어진 매대와 쏟아진 물건들을 보며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굴리고 있을 때 미도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겁먹은 전원우 눈 질끈 감고 뒷걸음질 쳤는데 미도리는 점장 멱살을 냅다 쥐어챘다. 그리고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전원우한텐 안 들렸다.

옆선 죽인다. 미도리를 보면서 전원우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미도리가 고개를 돌리고, 미도리와 전원우의 눈이 마주쳤다.

전원우 쫄아서 입 꼭 감쳐무는데 미도리는 씩 웃었다.

아, 얘는 얼굴값 하는 최상급 또라이구나.

전원우는 아연해졌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진 몰라도 점장은 미도리가 귀에서 입을 뗌과 동시에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애처럼 혹은 개처럼 웃고 있는 미도리는 이제 전원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십 분 전에 잘린 프리터,

밝은 녹색 머리의 폭주족.

두 사람이 편의점 안에 서 있었다.

봉준호 영화에도 이런 장면은 안 나올 텐데. 전원우는 생각했다.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미도리는 계산대 위에 걸터앉았다. 미도리는 전원우 얼굴 빤히 보다가 손 뻗어서 뺨을 슥 감싸 쥔다. 전원우는 당연하게도 쫄아서 슬쩍 뒤로 몸을 뺐으나 그렇다고 미도리의 리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도리 손에 감긴 낡고 깨끗하고 가칠가칠한 붕대에서 은은한 박하 향이 났다. 미도리의 엄지가 전원우 콧등을 살짝 쓸었다. 그제야 전원우는 콧잔등 시큰거리는 걸 자각한다. 넘어지면서 안경 받침에 긁혔을지도 모르겠다. 미도리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미도리다.

내 이름, 미도리.

미도리가 말했다.

……

너 하츠네 미쿠 뭐 그런 거 좋아해?

전원우가 말했다.

미도리가 야, 하니까 전원우는 쫄았다.

✦ ✦ ✦

분명 입밖으로 꺼낸 소리가 아니었다.

전원우는 속으로만 곱씹었다. 시부야의 미도리를 모르냐는 질문에 전원우는 시종일관 그래왔듯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속으론 몇 번이고 욕을 뱉으며 이 어이없는 상황이 끝나길 빌긴 했지만, 전원우 사회성과 인내심 자기 통제력 생존본능 등등 전부 그러모아 입 닥치고 있었다.

그런데 미도리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 건지 몰라도 허리를 꺾으며 크게 웃어대서, 전원우는 자기가 정말로 저 면전에 대고 뭔 새끼 뭔 새끼 내뱉었나 싶어서 순간 놀랐다. 한참을 웃던 미도리가 말했다.

내일 하치코 앞에서 만나.

그리고 미도리가 왔던 것처럼 갔다.

오른쪽 팔에 헬멧을 끼우고 왼쪽 어깨로 문을 밀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전원우는, 멘트 한 번 뒤지게 구리다고 생각했다.

원래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데 미도리는 그걸 혼자 다 하는 새끼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하치코가 뭐야, 하치코가.

버블경제 직후 쏟아져 나온 천편일률적인 로맨스 드라마나 청춘 애니메이션에서도 저런 대사는 안 썼을 거다. 원래 폭주족이란 허세와 중2병에 찌들어 사는 놈들이라지만, 유치한 걸로 치면 결이 다른 대사 아닌가. 오늘날 충견 하치코 동상 옆엔 로망이란 다 뒤졌고 인접한 흡연 부스에서 넘어오는 담배 쩐내만 있다.

그렇다고 전원우가 미도리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어제 그 지랄의 끝에 전원우는 또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로 향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 뒤통수 주먹으로 세게 두세 대는 쳤다. 전원우 네가 미쳤구나. 그러면서 또 비척비척 낡은 맨션에서 기어 나와 모퉁이를 돌고 교차로를 마주하고 …… 그 과정에서 전원우는 자기 힐난과 합리화를 수십 번쯤 번갈아 했다. 점장이 일만엔이 비었다고 했지 해고란 말은 안 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오늘도 하던 대로 출근하는 것뿐이고 하치코는 무슨 하치코며 미도리는 또 뭔가 …… 모두 악몽이다. 대충 벌레로 변해 등에 사과가 박힌 남자의 이야기처럼 말도 안 되는 악몽이다.

그리고 전원우가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앞에 선 순간, 몇 겹 더께처럼 내려앉은 생각들은 순식간에 쓸려 사라진다.

교차로 건너편 하치코 동상 앞에서 정말로 손을 흔들고 선 미도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리타분한 세계와 전원우의 종신계약은 아무래도 어제자로 무통보 조기종료 된 게 맞았다.

전원우는 정말로 조용히 살고 싶었다. 지루하고 안정적이며 침체되어 있는 삶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인파로 미어지는 교차로 너머에서도 용케 저를 발견하고 팔이 떨어져라 흔들어대는 미도리를 보면서, 일순 도망칠 궁리도 한다. 차라리 저 반대편으로 꺾어서 어제까지 일하던 로손에 들어가 싹싹 비는 생각까지도 한다. 죄송해요 일만 엔이 어디 갔는진 모르겠지만 제 사비로 이만 엔 넣어둘 테니까 한 번만요 …… 영원 같은 찰나 속에서 신호가 청색으로 바뀌고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전원우가 가만히 서 있는데 …… 인파라기보단 헐떡이고 어슬렁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이 그를 대각선 건너편, 하치코와 미도리가 있는 쪽으로 끊임없이 밀어낸다. 꼭 어금니로 물어다 미도리 앞에 놓는 것처럼. 전원우 머릿속에서 어릴 적 본 지브리 애니메이션 몇 편 재생된다. 그니까 미도리는 이 짐승을 부리는 더 큰 짐승이고, 그렇게 따지고 보자면 쟨 개새끼 오브 개새끼가 맞을지도 모르고 …….

속도 모르고 미도리는 하얀 송곳니 반짝거리며 웃는다. 전원우는 바보같이 땀에 살짝 눌러붙은 앞머리를 손끝으로 턴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 …… 귀신도 웃는 귀신이 제일 지독하다는데 사람도 다를 거 없다. 울거나 화내는 놈보단 웃는 놈이 진짜 또라이다. 전원우는 결코 미도리 같은 인간과 엮이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 있다. 미도리는 그런 전원우 속도 모르고 일단 손목부터 꼭 쥔다. 한 마디 말도 못 꺼낸 채 전원우는 그대로 미도리에게 붙들려 시부야의 인파를 관통하며 내달린다. 귓속에서 색색 바람 소리가 난다.

✦ ✦ ✦

미도리는 가와사키 W800 스트리트를 탄다.

전원우는 미도리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에서 바이크 한 대를 마주한다. 너무 뛰어서 토할 것 같다. 숨 고르고 바이크 노려보며 묻는다. 이게 뭔데요. 불퉁하게 말을 붙인다. 첫 대면부터 말끝 잘라먹긴 했다지만 모른 척 다시 경어를 쓴다. 내 바이크. 미도리는 숨이 차는 기색도 없이 의기양양하다. 그러니까 미도리는 진짜 공도에서 폭주를 뛰는 미친놈이 맞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전원우는 움찔한다. 살짝 눈치도 본다. 튈까. 생각하는데 미도리는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속삭인다.

이런 거 안 타봤지. 태워주려고.

누구 마음대로.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꾹 눌러 삼킨다.

전원우도 바이크는 조금 안다. 전남친이 2ch 채널에서 상주하며 내내 바이크 얘기만 떠드는 인간이었으므로. 개인 소유 바이크는 없는데 가끔 웃돈을 줘가며 렌트를 해서 타고 다녔다. 전원우가 거기 같이 타는 일은 없었다. 기스라도 나면 곤란해진다는 태도였다. 전원우도 바이크는 미친짓이라고 생각했으니 태워달라고 한 적 또한 없었다. 그냥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말만 몇 개 있는 거다. 전원우는 그걸로 미도리한테 아는 척을 한다. 얕잡아보여서 좀 짜증난 것도 있다. 휠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묻는다.

가와사키 모던 클래식 라인이네. 안 어울리는데 이런 거 좋아하나봐요.

형도 내가 가와사키 닌자에 환장할 것처럼 보여? 아님 Z1000? 근데 사실 나는 두카티가 좋더라. 내 드림 바이크. 죽기 전에 한 번은 사보려고.

잠깐만.

… 형?

전원우가 아연해진다.

제가 형이에요?

아연해져서 되묻는다.

하? 미도리는 열아홉인데요.

도리어 미도리가 불퉁해져서 대꾸한다.

전원우 기가 차서 헛웃음 툭 뱉는다.

전원우가 야, 해도 미도리는 쫄지 않는다.

대신 가슴팍에 헬멧 하나를 안겨준다.

로손 습격 및 기물 파손 사건 프롤로그로 고이 카운터에 내려두셨던 그 헬멧이 맞다.

전원우가 얼빠진 얼굴로 그걸 멍청히 들고만 있을 때, 미도리는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뭐 해. 타. 형 바이크 타본 적 있는 거 아냐? 질러놓은 게 있으니 이제 와서 바이크는 미친 짓이라느니 사서 개죽음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다. 전원우 묵묵히 헬멧 쓴다. 입술이 말라서 혀를 꼼지락거린다. 가만히 지켜보던 미도리가 손을 뻗어 비뚤어진 헬멧 바르게 고쳐준다. 끝내 미도리의 가와사키 W800 스트리트에 전원우가 올라탄다. 미도리는 전원우 두 손 쥐어다 제 허리 단단히 잡게 한다.

형, 놓으면 안 돼. 놓으면 죽어. 미도리는 즐거운 듯 말한다. 전원우만 사색이다. 그래도 꼴에 살고 싶어서 미도리 등에 헬멧 쓴 머리까지 푹 파묻는다. 미친 새끼 …….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미도리의 등에서 어렴풋이 소금 냄새가 난다.

오래된 상처나 바다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

전원우는 말은 안 했지만 뒤지게 무섭다. 그러니까 손끝 하얗게 질릴 만큼 미도리 특공복 꽉 움켜쥔 제 손도, 그걸 느끼고 헛웃음 터뜨리는 미도리도 알아차릴 새가 없었다는 뜻이다. 미도리는 넓은 도로로 빠져나간다. 제 아랫배 부근 옷자락 꽉 쥔 전원우 손 위로 제 손 덮고 고개 반쯤 틀어 말한다.

형, 눈 뜨고 옆에 좀 봐. 죽이지.

알겠으니까 …… 닥치고 앞 좀 보면서 운전하면 안 돼?

✦ ✦ ✦

미도리는 알아주는 스케반의 아들이다.

어디까지나 미도리가 말한대로라면 그렇다.

전원우 결국 미도리 어깨 두들겨서 갓길에 바이크를 멈췄다. 내려서 구석에 가 구역질을 했다. 형 멀미 해? 그런 건 바이크 태우기 전에 물어보는 게 맞지 않나. 전원우 시큼한 입술 문질러 닦으며 생각했다. 하필 미도리가 바이크 세운 곳도 바닷가라 비린내에 취약한 전원우 속 배로 울렁거렸다. 등 좀 두드려 줘? 뻔뻔하고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얼굴이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물어와서 전원우는 그냥 헛웃음만 지었다. 잠깐만 있어. 그러더니 미도리 어디로 뛰어갔다. 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척비척 걸어가 벤치에 앉은 전원우 앞으로 칼피스 소다 한 병 들이밀어졌다.

마셔.

넌 이걸 … 토한 사람 마시라고 사다주니?

미도리 눈 동그랗게 뜨고 굴린다. 전원우는 병뚜껑만 만지작거렸다. 형 진짜 손 많이 가는 타입이구나? 미도리가 그거 채가서 뚜껑 따고 다시 전원우한테 건네면서 그랬다. 형, 내 얘기 해줄까. 우리 엄마 얘기.

그리고 그렇게 말한 거다.

나는 알아주는 스케반의 아들이고 관동이 폭주족들의 항쟁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태어났다는 걸.

전원우 당연히 안 믿는다.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

그거 삼, 사십 년도 더 된 얘긴데 너 열아홉이라며.

마시던 칼피스 워터 뱉기 직전에 꾹 삼키고 따졌다.

진짠데.

그렇게 말하고 미도리는 웃었다.

아버지 얼굴은 몰라. 근데 오사카에서 타코야키 트럭 모는 젊은 남자였대. 나 그래서 어릴 땐 오사카 살았어. 칸사이벤 좀 남아있지 않아? 아님 말구. (그렇지만 전원우 생각에 미도리 억양은 살짝 미묘하게 도쿄도 오사카도 아니었다.) 근데 그래서 그런가 난 바이크 타면 바다로만 와. 모르는 길로 아무렇게나 가도 그래. 처음에 도쿄 넘어올 땐 새벽에 활어 트럭을 몰래 얻어 타고 넘어왔거든? 그 때 걸려서 반쯤 죽을 뻔 했는데 어떻게 빠져 나왔냐면 …….

거짓말.

거짓말의 거짓말.

거짓말의 거짓말의 거짓말.

미도리는 그랬다.

그렇게 뻔뻔하고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얼굴로 거짓말의 연쇄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허풍과 허세 거짓말로 얼룩덜룩한 미도리 말 중에 절대 거짓 아닌 말 한 마디는 있었다. 내일도 하치코 앞에서 만나. 그럼 진짜 그 다음 날 하치코 앞에서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하치코 앞에서 만나자고 했고 그럼 그 다음의 다음 날에도 정말 하치코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도리는 매일 하치코 앞에 서 있다.

거기서 늘 전원우를 기다린다.

그리고 전원우는 매일 하치코 앞으로 간다.

더 이상 로손에 출근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냥 미도리 말 믿거나 속아주었다.

언젠가부턴 멀미도 거의 줄어 안 했다. 겁 먹는 것도 좀 줄었다. 그래도 미도리 허리는 꽉 껴안고 등에 얼굴 묻었다. 그래도 미도리는 비슷한 포인트에 바이크를 갓길에 멈춰 세워 주었다.

그 날도 전원우 거짓말 늘어놓는 미도리 얼굴 가만히 보고 있는데 문득 미도리가 말 멈췄다. 듣고 있어. 찔려서 거짓말 불쑥 내뱉는데 미도리가 불쑥 손을 뻗었다. 안경 살짝 들어올리고 엄지로 콧잔등 어루만지면서 그랬다.

형 여기 흉터 남겠다.

전원우 콧잔등에 남은 상처가 희미한 갈색으로 아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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