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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프로파간다

SVT RPS / 역아고 로코 / 1700자 (일부 발췌)

태주 커미션 by t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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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는 첫사랑 같은 걸 안 믿는다.

그러니까 작년 여름 초입에, 이석민이 옆 학교 3학년 선배를 사랑하다 못해 아주 미쳐서 여고 앞에 돗자리를 깔다시피 살다가 선배 졸업 안 하면 안 돼요? 같은 멘트를 칠 때도 뭐 잘못 씹은 표정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때의 이석민은 주책에 꼴불견을 명절 선물세트마냥 알차게 겸비하고 있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낭만주의자 서명호도 사랑의 힘은 믿었지만 이석민과 거리 두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김민규가 쑥맥이라거나 순진해 빠져서 연애 한 번 못 해본 동정이라거나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중학교 졸업할 적부터 이미 안정적으로 180대에 진입했던 키는 열아홉 현재 188을 기록하였으니 일단 피지컬 나쁘지 않다. 김민규 넉살 좋은 탓에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걔네랑 어울려 줄창 뛰어다녔더니 딱 보기 좋게 까무잡잡해졌다.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김민규는 무엇보다 얼굴이 좀 된다. 코끝과 뺨의 조그만 점이나 희고 선득한 송곳니 같은 것. 김민규는 그게 자기 매력인 걸 익히 알아차렸다. 김민규는 자기 괜찮게 생긴 걸 일찍이 알아차린 영리한 타입이고 사랑받는 것도 잘했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텄다는 거다. 김민규는 여우다. 저 좋다고 줄 선 여자들한테 선착순 다섯 명까진 대기표 주고 기다리게 할 스킬이 있었다. 그리고 윙크 찡긋해주며 두 명 정도 더 들여보내는 뻔뻔함까지도 김민규 체질이었다.

근데 그게 썸이고 연애긴 한데 첫사랑은 아니다.

김민규 말로는 그렇다.

그 말 들었을 때 이석민은 웃다가 의자 뒤로 넘어갔고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넘어갔다 분식집 안 모든 사람들이 쳐다봐서 김민규는 테이블 밑에 숨고 싶었다) 서명호는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김민규는 손에 쥔 포크로 바르게 고쳐 앉은 이석민 손등을 콱 찔렀다. 지는 여고 졸업식에서 뺨 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 김민규 눈을 흘겼다. 민규 너 인생 왜 그렇게 쓰레기같이 살아? 서명호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게 사랑도 아니고 뭣도 아니면 걔네랑 입도 맞추고 배도 맞춘 김민규는 쓰레기라고 하는 편이 퍽 어울린다. 김민규도 쥐뿔만한 양심에 좀 찔려서 일자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이 나는 그게 아니라, 김민규 그저 눈을 굴리며 말을 늘였다. 뭐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인지, 혹시 첫사랑 그게 이미 별 거 아닌 것처럼 벌써 슥 지나갔으면 어떡하는지, 뭐 그런 것들을 김민규는 어금니 안쪽을 혀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첫, 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잘 모르겠다.

어쩌면 생각보다 대단한 건 없을지도 모른다.

진짜 그냥 첫사랑 그런 거 다 구라 아냐? 첫키스도 머릿속에 종소리가 들린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거 구라던데.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여러분. 누가 그렇게 말해줬음 좋겠다 차라리. 그렇게 뒷머리 벅벅 긁던 김민규 삶에 변곡점이 찍히게 된다.

첫사랑을 모르는 좆고딩 김민규에게도 첫눈에 반하는 순간이 어느날 갑자기 정말로 찾아온 거다.

매번 입이 닳도록 말한 이상형 - 너무 마른 것보단 건강미 넘치고 늘씬한 체형에 운동 좋아해서 취미를 같이 할 수 있으며 (중략) 검고 긴 생머리에 시트러스 향이 잘 어울리는 여자 - 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대상은 …… 손질되지 않아 눈꺼풀까지 덮인 부스스한 머리에 동그란 안경 뼈가 툭 도드라지는 가느다란 손목 품이 큰 회색 맨투맨에 파묻힌 것 같이 비쩍 마른 …… 유부남이다.

코끝에 스치는 다우니 냄새를 맡으며 김민규는 멍하니 생각한다.

나 게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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