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일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위해

모험가가 반송장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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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인물들의 추가 해석이 있습니다.

* 비그리드 시나리오에서 움직임을 멈춘 정면의 모험가가 이리스에게 발견되면 어떨까? 라는 가설에서 시작했습니다.

* 작성 기준 저는 최종 스토리인 [시간의 균열] 시나리오를 열람하지 않은 상태라, 해당 시나리오의 내용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험가가 의식을 잃었다. 여신의 손길이 닿은 성스러운 화원 위에서 잠든 그의 얼굴은 입관하기 전의 사자(死者)처럼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물며 생자가 습관처럼 내쉬는 숨결하며, 온몸을 유영하는 따뜻한 체온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의 모험가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이리스는 결국 얼굴에 이슬처럼 반짝이며 흘러내린 눈물을 옷소매로 훔쳤다. 이리스는 지금까지 발생했던 사건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사건이라고 정의하기에도 애매했다. 절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 의식을 잃은 것에 불과했으니. 모험가가 그녀의 앞이 아닌 평범한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의식을 잃었다면,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를 단순한 의식혼탁이겠거니 결론내리고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병원에 데려갔겠지.

하지만 여신의 대리인인 모험가라면 상황이 달랐다. 그의 뒤에는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적대적인 자들이 많았기에 그들 중에서 모험가의 의식을 휘어잡은 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판단을 미룰 시간 따위 부족했다. 이리스는 상황을 하나씩, 차근차근 되짚어가기로 결심했다.

모험가는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자신의 뜻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초석이였으며, 하나의 주제로 한껏 떠들 수 있는 활달한 친구이며, 평화라는 공통된 목적을 향해 함께 노력하는 든든한 파트너이니까. 그래서 더욱 그의 의식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허공을 덧없이 부유하던 이리스는 지상에 내려앉아, 모험가의 창백한 얼굴에 손을 얹었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생자의 온기가 아닌, 마치 시체같은 창백함이 그녀의 손을 맞이한다. 가능한 그의 기억에 다시 손을 대고 싶지 않았지만…. 이리스는 모험가에게 닿지 않을 고백을 남기며 기억을 걷는 길에 올랐다. 그녀의 손길을 마중나온 모험가의 기억 조각들은 마치 꽃잎처럼 가볍게 바람에 흩날리며, 이리스를 포근하게 감쌌다. 이리스는 비처럼 무수히 흩뿌려지는 꽃잎 중,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를 골라잡았다.

익숙한 유적지의 풍경이 그녀의 곁을 스쳐간다. 한때 고대신을 애타게 기다린 엘-라르사를 만났던, 오르카리움의 경치가 눈에 비쳤다. 여기에서 모험가는 ‘누군가’를 만났다. 인적이 닿지 않는 유적지의 드문 곳까지 찾아와, 모험가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수풀 속에 숨겼다. 괜히 기억 속 그의 곁에 따라앉아본 이리스는 모험가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의 방에 눕혀진 모험가와 다르게, 수풀 속에 쭈그려앉은 모험가의 눈은 보석처럼 총명하니 빛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를 휩쓸고 간 것일까.

그때, 구두 굽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억 속의 모험가도 그 소리에 반응했는지, 아주 약간의 몸만 틀어 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였다. 이리스도 고개를 돌려 낯선 음성의 주인을 보았다. 이리스는 침착을 갖고 천천히 살펴보니 깨달았다. 그의 이름은 아론, 모험가의 기억 속에서 여러 번 존재를 드러내었던 자였다. 이리스가 기억 속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현실에서 그녀를 잡아채는 억센 손길이 느껴졌다.

“…!”

터질 듯한 섬광과 함께 이리스의 눈이 뜨였다. 한때 궁수로서 활동하였던 자신을 단번에 제압하는 거대한 기세였다. 이리스는 손을 제압한 존재를 확인했다. 눈길을 끄는 높은 채도의 분홍빛 머리칼인데도, 그녀의 주변에는 어스름한 새벽을 품은 어두운 그림자가 잔잔히 흘렀다. 자신과 동화된 모험가의 기억 속에서 확인했던 검은 달의 신이었다. 이리스는 문득 자신을 제압하였음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리스가 입을 열기 전, 신이 먼저 음성을 뱉었다.

“그대가 기억에 더 다가가면 모험가가 더 큰 위험에 처할 것이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리스는 그녀의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신은 이리스를 향했던 시선을 내려 모험가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다그치듯이 물었다.

“아이는 어쩌다 이곳에 데려오게 되었지?”

“…흔적을 쫓다, 문득 모험가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발견했어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든 호흡이 멈췄더군요. 그저 바라만 볼 수는 없었어요.”

“자신의 필멸자를 위해 성급한 짓을 저질렀구나. 그대가 진 성계신이라는 무거운 역할과 달리.”

그의 잔잔한 말은 곧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이리스에 심장에 날아 꽂혔다. 이리스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문득 이리스는 자신의 시야가 안개 낀 듯 흐려진 것을 느꼈다. 차오르는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이리스는 자신의 옷자락이 구겨질 정도로 꾹 잡았다. 어느새 신은 모험가를 자신의 물건인 것처럼 두 손으로 가뿐히 들어 올렸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축 늘어진 모험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닌 적막하고 죽음을 품은 검은 달의 신과 더 어울려 보였다. 그러더니 신은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이리스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자신의 모험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그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신은 고개를 돌려 이리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신은 이리스의 마음을 파악하기라도 한 듯, 곧 묻지 않은 질문에 답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것이지. 이 이상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장소에 머무른다면 그대의 필멸자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 속의 미아가 될 것이니.”

“미아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그대, 내 흔적을 지닌 아이와 만나지 않았던가?”

신이 말하는 아이는 곧 자신의 성소에 다녀간 힐다를 뜻했다. 그 말에 이리스는 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스는 생각했다. 신은 생명을 위해 행동하는,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자신의 모험가를 짐처럼 든 저 행위도 언젠가는 모험가를 위한 결말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신의 손길 아래에서 힘없이 늘어진 모험가는 평소와 달리 가련해 보였다. 이리스는 자신의 모험가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울렁거리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간 것은 찰나였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이리스는 신에게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험가를 데려갔다.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든 모험가는 한때는 먼 과거가 되어버린, 인간이었을 시절에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리스의 앞에 선 신은, 이리스를 제지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 일련의 행위를 바라보았다. 이리스는 부러 그 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신은 곧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그녀 앞에서 등을 돌려 어느 공허한 공간으로 걸어 사라졌다. 그 공간 속은 신이 덧댄 옷만큼 짙은 암흑이었다. 그 공간은 신의 모든 것을 반영하기라도 해보였다. 공간의 한편에서는 온갖 잔혹한 저주가, 어느 한 곳에서는 필멸자들의 절망 섞인 비탄이, 증오가 겹겹이 쌓여 결국 신에게조차도 버림받은 어떤 파편에서는 공간의 주인을 마구 비난하고 멸시하는 메아리가 번잡하게 울렸다.

그 공간은 이질적인 손님을 인식했다. 그것들은 날카로운 쐐기처럼 변해 이리스와 모험가를 공격하려 들었고, 그들의 단단한 내면에 균열과 파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리스는 평정을 잡고 저 앞에 위치한, 희미한 빛을 발하는 출구로 향했다.


무자비한 섬광과 찢어질 듯한 비명 속에서 이리스는 잠시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약한 소음이 이리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리스는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덜컥.

순간적으로 그녀는 심장이 심해로 깊숙이 가라앉는 듯했다. 검은 달의 신 옆에 선 우직한 키의 남성은, 분명 모험가의 기억 속에서 여러 번 보았던 자였다. 이 장소는 나약한 그들에게 위험했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미친 듯이 뇌리를 두드렸다. 이리스의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느려졌다. 그것을 본 남성은 이리스와 모험가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매몰차게 돌렸다. 석상처럼 굳은 이리스의 몸과 마음을 깨운 것은 검은 달의 신이었다. 신의 목소리는 성소에서 무감정했던 것이 아닌, 자신을 복돋아 주는 듯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나와 협력하기로 한 것이니, 지금은 안심하여도 된단다, 아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정면과 이면에 속하지 않은 이 공간을 제가 찾아냈다고 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그 말의 증거인지, 대공의 곁을 따라다니는 검은 나비가 공간의 곳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검은 달의 신은 짧은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다 목소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대공.”

“예. 말씀하시죠.”

신을 향한 말투는 한껏 정중했으나 은은한 빈정거림이 깃든 고조였다.

“이 이상의 개입은 원치 않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그대는 그대대로 할 일이 있지 않나?”

“아아. 그랬지요.”

안경을 고쳐 쓴 그는 사라질 것처럼 굴더니, 발걸음을 옮겨 이리스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핏빛 어린 대공의 눈과 윤슬처럼 반짝이는 이리스의 눈이 교차했다. 이윽고 그는 시선을 내려 이리스의 품에 꼭 안긴 채 의식을 잃은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이리스는 소중한 보물을 품은 듯, 자신의 모험가를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모험가의 얼굴은 그 반동으로 이리스에게 돌아가, 대공으로부터 가려졌다.

“의식을 잃은 모험가님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군요. 이렇게나 힘없이 품에 안긴 꼴이라니.”

“제 모험가님을 위협하려 한다면….”

“그럴 리가요. 방금 □□□님께서 말씀하셨듯, 지금의 저는 할 일이 있답니다.”

유약한 자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것은 그의 나쁜 습관인 듯했다. 이리스는 순간적으로 든 모욕감에 그를 향한 눈을 부릅떴으나, 대공은 그것마저 가엾다는 듯 픽 웃고 넘겨버렸다. 이윽고 그는 길게 흘러내린 이리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져가더니 가볍게 키스했다.

“지금의 저는 이리스 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그나마 흥미가 있는 부분이라면, 의식을 잃은 모험가님이 어떻게 다시 돌아올지 그것일까요. …어찌되었든 간에, 저는 사사롭게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잠시만요. 그게 무슨 뜻이죠?”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이리스 님의 대리인을 통해.”

대공이 말을 마치자,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릴 만큼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가이아와 사뭇 다른 검은 나비가 그의 주변을 잠식했고, 이윽고 대공은 이 장소에 존재하지 않은 듯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리스의 주위를 맴도는 빛이 그녀를 위로해 주듯 따뜻하게 몸을 두드렸다. 이리스는 자신의 품에 안긴 모험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공에게서 자신의 모험가가 당한 치욕을 생각하면 한편에서는 분노가, 다른 곳에서는 미안함이 꺼이꺼이 차올랐다. 처음 발견된 장소로 돌아온 덕분일까, 아니면 자신의 기분 탓이었을 수 있다. 모험가의 표정은 성소에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리스는 일부러 폭신한 자리를 찾아 그 위에 모험가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행위를, 신은 이리스의 뒤에서 침묵을 지킨 채 바라보았다.

“보았지. 그대의 필멸자가 이면에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단다.”

“모험가님은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 계신 거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위해]라고, 해둘까. 그대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대도 그렇듯, 잠든 가이아와 지금은 세계 속으로 사라진 세레스도 그랬듯, 한때 여기에 속했던 신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졌지.”

“…….”

그 목소리는 뱀이 속삭이는 달콤한 유혹처럼 다가왔다. 맨살과 대리석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달의 신이 이리스를 뒤에서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 행위에는 부모가 아이를 보살피듯, 자상함과 따뜻한 온기가 한껏 담겨있었다. 이리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힘껏 억누르려 애써 고개를 들어 고즈넉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든 생명의 활동이 멈춘 지금, 신과 이리스는 이 장소에서 유일한 함께였다.

“그대가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지금은 두거라.”

“…모험가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그대의 감정을 이해한다.”

“돌아올 수 있을까요?”

“지금은 그를 믿거라. 어딘가의 전장에서, 그대의 모험가는 그대를 보기 위해 치열히 투쟁하고 있을 것이니.”

이어지는 이리스의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둘러싼 손길에 힘을 주었다.

이리스는 그의 말대로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모험가를 축복했다. 이리스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빛과 바람, 희망이 되어준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비단결처럼 아름다운 이리스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비녀가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렸다.

눈물이 모여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루었다. 애써 유지했던 그녀의 단단함은 모험가라는 퍼즐 조각이 사라지며 허물없이 무너졌다. 손이 닿지 않는 세계 너머로 사라진 모험가, 그러나 찾을 수 없는 저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이리스는 지금 자신의 모험가가 무척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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