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2차 창작

Runaway with me.

ER, 콩브그랑.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병률, 새날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이병률, 새날

"나랑 같이 도망이라도 가세."

비가 내렸다. 물 비린내가 물씬 풍겨 오는 파리의 거리를 바라보던 콩브페르가 툭 내뱉었다. 그랑테르는 낡은 종이가 습기에 젖어 눅눅해진 책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멍하게 콩브페르를 바라보았다. 아니, 당황해서가 아니라 술 때문이거나, 며칠째 밤을 샌 탓이거나. 그랑테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디로?"

"아무데나, 자네 고향도 좋고, 내 고향도 좋아."

"내놓은 자식이 돌아간다고 해서 어머니가 잘도 반겨 주시겠군."

그랑테르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기운이 없어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콩브페르는 그랑테르가 빈 압생트 병을 내던지는 것을 보다가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콩브페르도 여실히 지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랑테르를 놓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피곤에 절어 조금 날카로워진 콩브페르가 눈두덩을 문질렀다. 여기는 위험하네. 그랑테르. 

"자네랑은 안 갈 걸세."

그랑테르는 흐려져 뻑뻑한 눈을 몇번 깜빡였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콩브페르는 그랑테르의 고집에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폐부를 치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그랑테르의 가슴을 죄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콩브페르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갈 셈인가?"

내가 어딜 가나, 내 태양이 여기 있는데. 그랑테르가 읊조렸다.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으나 들리는 것을. 콩브페르가 지친 걸음으로 다가와 그랑테르의 손에서 책을 빼들었다. 

"고집 그만 부리게, 그랑테르. 자네도 살아야지."

"누가 그러던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이대로는 자네가 죽을 것 같아 가만히 못 있겠네. 그 말에 그랑테르는 눈을 치떴다. 그 책 내놓게. 

"여기서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는가?"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네."

"나더러 자네를 내버려 두라는 건가?

유일하게 남은 동지를, 콩브페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 울컥울컥 솟구치는 감정들이 드러나는 순간은 그랑테르의 가슴에 진실을 내리꽂았다. 콩브페르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 또한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콩브페르가 자신에게 동지라는 호칭을 붙여야 하는 순간을 항상 싫어했다는 것을.

"이봐, 콩브페르, 나 하나 걱정한다고 해서 죽은 동지들이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그랑테르는 콩브페르의 얼굴에 대고 조소했다. 아니, 조소가 아니라 그것은 슬피 울부짖는 비소에 가까웠다. 날 내버려 둬. 그랑테르는 며칠 간 온 몸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콩브페르는 온 몸으로 그 처절한 목소리를 덮었다. 그랑테르는 그 바보같은 행동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콩브페르는 마치 벽처럼 서서 버티고 있었다. 그랑테르가 앙졸라스의 붉은 재킷을 끌어안고 밤새도록 통곡했을 때 곁에는 콩브페르가 있었다. 그랑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 구해낸 것도 콩브페르였고, 열에 들떠 앙졸라스의 이름을 불렀을 때 자신을 지키고 서 있었던 건 콩브페르였다. 퍽 정성스런 손길로 자신의 땀을 닦아 주며 정신이 드냐고 물었다. 그 목소리에 그랑테르는 잠시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허나 그랑테르는 곧 자신의 머리 맡에 걸려 있는 앙졸라스의 옷을 보고 깨달았다. 지독한 친구야, 왜 나를 이리 살리려 하는가. 그랑테르가 희게 웃자 콩브페르도 따라 웃었다. 다행일세, 하는 말이 뒤따라왔지만 그랑테르의 웃음은 허탈함에 가까웠다. 태양의 그림자는 사라지고자 했으나 촛불이 그림자를 붙잡았다. 위태롭게, 허나 끈질기게. 그랑테르는 콩브페르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압생트 병을 열고 들이켰다.

"살아나지는 않겠지. 허나 그렇다고 내가 자네까지 포기하란 법은 없네."

"내가 살아갈 이유는 죽었어."

그랑테르가 기어이 콩브페르 앞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끈질긴 콩브페르에게 돌이라도 던져 자신의 곁에서 떠나 달라고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콩브페르는 그랑테르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바위처럼 무겁게 버티고 서 있던 자세를 무너뜨렸다. 의자에 걸터 앉아 마른 세수를 하던 콩브페르가 고개를 들었다. 

"꼭 죽어야겠는가?"

"내 비틀어진 척추를 붙잡던 빛이 사라졌지. 나의 태양이 저 하늘에서 떨어져 차가운 땅 속에 묻혔단 말일세."

"나를 봐서라도 살 수 없는가?"

콩브페르가 말했다. 그랑테르는 허, 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미안하네, 콩브페르. 자네는 나의 동지이지 태양은 아닐세."

"자네가 내 태양이 되어주게. 그랑테르."

"아니, 자네에게는 태양이 필요 없어."

콩브페르의 절절한 말은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나는 태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네. 그랑테르가 말을 마치고 압생트를 들이켰다. 운명이야, 그림자의 운명이지. 그랑테르가 중얼거렸다. 

"우스운 게 뭔지 아나? 그 날, 그 날 밤에 나 또한 앙졸라스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네,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자고. 같이 떠나자고, 앙졸라스는 기어이 거부했었네. 그러면서 내게 그러더군. 살라고, 살아달라고. 죽지 말라는 말을 했네. 정말 그 말대로 되어 버렸어. 저 외투 하나가 내게 남은 전부일세. 콩브페르. 헌데 이제는 자네가 내게 그 말을 반복하는군. 살아 달라고. 내가 왜? 난 이미 죽었네. 그 날 밤 두려움에 떨던 앙졸라스를 안았을 때부터 이미 죽었어."

"아니, 자네는 살아 있어. 나라고 자네에게 살아 있으란 말을 못 할 게 뭔가?"

콩브페르가 말했다. 질문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 또한 죽고 싶네, 그 말은 삼켜졌다. 콩브페르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랑테르를 내려다보았다. 어지러운 시선이 와 닿았다. 그랑테르의 목덜미가 술로 인해 벌개졌다.

"알아 들었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란 말일세. 자네는, 자네는 나의... "

"지식 안에서는 그럴 지도 모르지, 헌데 사람은 피와 살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그랑테르가 콩브페르의 말을 막았다. 피와 살이 전부가 아닌 존재. 허나 콩브페르는 그랑테르에게 영혼을 주려 하고 있었다. 동지가 아닌 호칭으로 불려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랑테르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술을 들이켰다. 과음, 과음.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술을 들이부었으나 쉽사리 취하지는 않았다.

"내가 자네를 데리고 어디든지 갈 테니."

콩브페르가 그랑테르에게로 다가가 테이블 위에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랑테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네가 무엇에서든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해 주게. 떠나면, 떠나고 나면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와 함께 떠나세. 여기를 떠나 어디든지 가세. 그랑테르. 제발."

목을 단근질해가며 내뱉은 소리처럼 고통스러웠다.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지만, 자네와 내 고향의 노을을 보고 싶었어. 언젠가는 그리 하고 싶었단 말일세. 자네와 대화를 할 때 마다 그 생각을 했어. 콩브페르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털어냈다. 굳은 피를 떨구어 내듯 한 단어씩 툭, 툭. 말은 감정을 타고 격해지며 그랑테르의 심장을 갈래갈래 찢었다. 그랑테르는 취해 흐릿해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만큼 밀어 냈으면 그만 할 만도 하지 않았나. 

"자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콩브페르는 그랑테르의 손을 꽉 쥐었다. 

"자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단 말일세."

그랑테르는 흔들거리는 몸을 가누려 애썼다. 아하, 그랬구만. 자네. 드디어. 그랑테르는 찌푸린 미간을 풀었다. 콩브페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였다. 

"그랑테르,"

"안 돼."

"내 말 듣게."

"그 입 다물게. 콩브페르.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는 자네를 너무도 아껴."

"자네, 우나?"

취해 비틀거리는 정신이 콩브페르를 붙잡으려 하는 것을 붙잡은 그랑테르는 대신 미소를 선택했다. 비웃으려 했으나 누가 보았다면 비틀리고 비틀린 슬픈 미소라 했으리라. 내가 닦아줄 수 없어 미안하네. 그랑테르는 중얼거렸다. 상관 없네. 내 눈물은 닦아 주지 않아도 좋아. 콩브페르는 그랑테르의 손을 붙잡고 반복했다. 자네를 사랑해. 오래 전부터 그래 왔어. 허나 그랑테르는 여전히 슬프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마디만 해주게, 콩브페르.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거라고."

"그랑테르,"

"어서,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거라 해 주게."

그랑테르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는 콩브페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랑테르는 고개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붉은 외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콩브페르의 어깨에 걸쳤다. 깃발처럼 쨍한 붉은 색. 그랑테르는 의자에서 내려와 앙졸라스의 외투를 걸친 콩브페르를 끌어 안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걸세. 콩브페르. 그랑테르가 중얼거렸다. 앙졸라스의 외투에서 화약과 피 냄새가 났다. 그랑테르는 외투에 고개를 파묻었다. 꼭 콩브페르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모양새였다. 앙졸라스, 그랑테르가 말했다. 콩브페르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한참을 울었다. 그랑테르는 콩브페르를 끌어 안은 채로, 아니, 앙졸라스의 외투를 끌어 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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