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mnopedie No.1
발장팡틴, 그리고 코제트.
오늘은 짧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뭐라고 규정 지을 수 없는 분야의 이야기입니다. 그림으로 치자면 풍경화가 될 터인데, 제 글에는 물감이나 비질을 비유할 만한 부분이 없으니 뭉뚱그려 이야기라고 칭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강 설명하자면 쿠르베가 그린 돌 깨는 사람 같은, 그러니까 정말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독자분들이 편하게 받아들이실까요. 저는잘 모르겠으니 글을 다 읽고 난 후에 이것이 어떤 이야기라고 칭해질 수 있을지 고민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은 비가 왔었을 겁니다. 축축한 파리는 늘상 기묘하게 차가우면서도 또 따뜻한 기운을 풍기지요. 늘 그랬듯이 안 나오는 글을 붙잡고 펜이나 물어뜯고 있기에는 창 밖의 파리가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저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흘러내리는 빗물이 저를 조금 적적하게 만들더군요. 그래서였을까요. 발이 사람이 많은 상점가로 흘러갔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지도 못할 물건들 구경이나 하고 구석에 있는 담배 가게에서 새 담뱃잎을 좀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코트를 둘러 입고 발 밑에 찰박이는 물을 밟으며 상점가로 가는데, 문득 저 멀리 골목에서 못 보던 사람들의 인영이 어른거리는 겁니다. 하숙집을 일부러 인적 드문 곳에 잡았더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알아볼 수 있게 되더군요. 가족처럼 보였지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확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네들이 쓰는 호칭이 가족들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영 어색했기 때문이었고요. 하지만 누가 보아도 아주 단란하고 행복한, 별 다를 것 없는 파리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서 덩치가 큰 신사분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물 웅덩이를 피해 걷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거리란 비가 오면 진흙 투성이가 되기 일쑤인지라 신사분도 아이가 드레스에 흙을 묻히지 않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모양새였지요. 청금석을 빻아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런 색이 나올까요. 그리고 그 뒤로 연꽃 같은 분홍빛 옷을 입은 한 부인이 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저는 첫 눈에 그 분이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입술에는 홍조가 돌고 있었지만 커다란 두 눈과 볼에는 여전히 어디선가 깃들었던 수심과 불행의 흔적이 남아있었거든요. 기름이 아니라 물과 물감을 섞어 수채화를 그린다고 치면 부인분의 얼굴에 담긴 그 슬픔을 묘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옅은 분홍색 물감에 물을 많이 섞어 반투명한 천 같은 빛으로 만든다면, 예. 그럼 아마 그 분의 얼굴을 칠할 색을 겨우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신사분과 부인분의 손에는 작고 얇지만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흠집이 별로 나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오래된 무언가를 녹여 새 반지로 만든 물건인 것 같았지요. 제가 예의 없는 눈길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어 황급히 눈을 돌리고 제 갈 길을 가려 했을 때, 부인께서 앞에 걸어 가던 신사분과 아이에게 가만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코제트, 그러니까 새 드레스를 입지 말라고 했잖니. 퍽 다정스러우면서도 아이가 수고를 끼치는 것이 걱정이 되는 투로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에 코제트라고 불린 아이는 활기찬 동작으로 고개를 돌리는 겁니다. 부인 분을 많이 닮은 아이였습니다. 저는 마치 어디선가 그 아이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공원에서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 주었을 때, 힘찬 목소리로 의젓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해 줄 것만 같은 아이였습니다. 발그레한 분홍빛 볼도 그렇고요.
글쎄요. 어쩌면 정말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신사분이 대신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리 걱정되면 내가 목마를 태우고 감세. 어때, 코제트. 괜찮으냐? 하고요. 부인께서는 아주 당황스러운 얼굴로 시장님, 비가 오는데, 하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부인께서 말을 끝맺지 않은 이유는 아이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고요. 코제트 - 이쯤 되면 저는 이 아이를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는 신사분의 넓은 어깨 위로 번쩍 올라갔고, 신사분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은 아이의 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탑이 정말로 있다고 치더라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탑보다 보기에 흐뭇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차마 소리내어 말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지요. 신사분의 높은 어깨 위에 올라간 아이는 신이 났는지 어서 가자며 우산을 꼭 쥐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는 신사분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는 흔히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보내는 햇살 같은 온기를 담고 있었고요. 아이가 방울처럼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자 부인도 조심스레 웃으셨습니다.
아이가 어깨 위에 자리를 잡자 신사분이 낮은 목소리로, 자기 자신도 조금 민망한지 조금 머뭇거리며 말씀하셨지요. 시장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어째 그 순간만큼은 커다란 덩치를 가지신 신사분이 조금 작아 보이시더군요. 그 말에 부인께서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시더니 작게 헛기침을 몇 번 하시고, 입을 여시더군요. 미안해요. 익숙치가 않아서. 장. 마지막에 소리 내신 한 음절짜리 이름에 두 분 모두 얼굴을 붉히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사분께서도 헛기침을 하셨습니다. 조금 과장된 소리로요. 그리고 나서 한 손으로는 어깨 위의 아이를 붙잡고, 다른 쪽 손을 부인께 내미시는 겁니다. 판틴. 하면서요. 그 목소리와 손동작이 마치 무도회장의 맞은편에서 인파 사이로 애타게 나타났다 사라지며 서로의 얼굴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새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상대편에게 춤을 청하는 것마냥 조심스럽고 경건한 투를 띄고 있어서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물론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터라 곧 그 놀라움은 사라졌지요. 부인께서는 아주,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시고 그 손을 잡으셨습니다. 두 분은 손을 맞잡고서 잠깐 침묵하는 것처럼 눈을 맞추시더군요. 그리고는 아이가 얼른 가자며 신사분의 모자를 두들기기 전까지 작은 새처럼 따뜻한 눈으로 서로를 보고 계셨습니다. 신사분은 어이쿠, 하고 엄살을 피우시며 아이와 부인을 꼭 붙잡으신 채로 거리로 나가셨습니다. 부인께서 돈을 너무 많이 쓰지 말라며 조곤조곤 하시는 잔소리와 신사분의 너털웃음이 잘 어울려서일까요. 저는 문득 이 풍경화에서 하나 필요없는 게 있다면 바로 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 주특기를 발휘하기로 했습니다. 없는 척 하는 것. 코트 깃을 세우고 천천히 그네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지나쳐 갔지요.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등 뒤에 들러붙어서 난로 없이도 뜨끈했습니다. 비 오는 파리의 풍경이 따뜻했다고 하면 모두들 비웃을 터이지만. 저는 그 날 정말로 춥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방금 스쳐간 그 가족이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함이, 함부로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일까요. 조심스러운 태도 속에는 행복이 도망갈까 무서워하는 머뭇거림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뭐 어떻습니까. 외출하는 가족이라는 별 다를 것 없는 풍경. 아직도 저는 이 이야기를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그네들을 떠올리면 작고 작은 희망이라는 것이 저 발 밑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는 겁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쩌면 별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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