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부 - 아베쎄의 벗들.

제 6부 아베쎄의 벗들.

빅토르 위고 따라하기.

서문


사람은 왜 글을 쓰는가? 창조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창조란 무엇인가? 온전히 새로운 것만이 창조라 칭해질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새로운 것이 지나치게 많다고 칭해질 법한 세상에 살고 있다. 모방은 태초부터 배움의 시작이었다. 표절은 지리멸렬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진 자들의 것이었으며, 패러디는 감히 재치를 가지지 않으면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만하게도 패러디를 내세운 글이다. 이 모든 것은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아베쎄의 벗들 (Les Amis de l'ABC) 이라는 인물들을 창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생일과 출신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에 분노해 시작한 일이라 설명하겠다. 6월 봉기의 한 가운데 있었던 아베쎄의 벗들을 사랑하여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알려주지 않고 팡테옹에 고이 누워 계신 위고옹의 관짝을 두들기기 시작한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심지어 아베쎄의 벗들 중 몇몇 이들은 죽음의 과정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은 탓에, 그들의 존재는 바리케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단 하룻밤만에, 몇 페이지만에 사라진다. 그저 죽었다, 라는 너무나 단순하고 또 무신경한 단어 하나로 그 존재를 지운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우리는 왜 <레 미제라블>을 읽으며 질노르망 씨의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은 알 수 있으나 푀이가 일하는 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가? 위고는 왜 파리의 하수구에 대해서는 그리 길게 논하였으면서 졸리의 건강염려증에 대해서는 그리도 짧게 서술했는가? 우리는 작가를 알 수 없다. 이제 그는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채, 어딘가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거나 혹은 무無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길고 긴 서술이며 그들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리기 위한 서사시이다. 위고에게 그것을 써 내라고 할 수 없기에, 단지 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얄팍한 마음 하나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아름다운 가치 중 하나이므로. 그저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로 이 글을 마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빅토르 위고를 정말로 따라할 수 없음이 통탄스럽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번역된 빅토르 위고의 문체"를 따라해보려 노력했다.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위고를 모독하거나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오로지 이 글이 <레 미제라블>의 어느 부분에 삽입되어도 부조화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모방한 것이라 설명하겠다. 

<레 미제라블>을 주로 참고했으며, 고증을 위해 글 중간중간 정말 내가 이걸 굳이 알아야 하나, 는 마음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정보들이 넘쳐남을 독자들에게 미리 고지해 두고 싶다. 믿거나 말거나 나 자신도 그 부분을 쓰면서 괴로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고 19세기 프랑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글에서 분명 오류가 발견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후에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부탁드릴 것은 그 오류를 잡아내어 지적해 주는 일이다. 이 글이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점차 진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고, 독자들에 대한 신뢰는 작가가 잃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디 나 자신이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마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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