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2차 창작

공포.

3. 그랑테르


말하라.


그랑테르는 거리에 서 있었다. 그의 삶이 늘 그러했던 것처럼, 툭 내던져진 채로. 아무도 없는 카페 뮈쟁의 앞 거리에 홀로 서 있다. 저 비틀린 건물을 마주하며. 해가 금방 졌거나, 혹은 떠오르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 시간이었다. 짙은 남색의 하늘 한 켠이 붉지 않은가. 낡은 나무 뼈대와 회색빛 돌벽을 가진 건물들은 그래서 기이한 녹색에 가까운 빛을 입었다. 마치 그랑테르 그 자신의 조끼처럼. 코 끝을 훌쩍여보니 차가운 기운이 도드라진다. 아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어느 때인가보다고, 그는 오로지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 그 무엇도 단정지을 수 없었다. 그의 삶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맨정신이었다. 취기의 베일을 쓰지 않은 주정뱅이의 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랑테르 그 자신조차 오래도록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그것은 바로 깨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랑테르는 일순간 몸이 떨려 오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공포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감정으로. 자신을 마취시킬 것 없이, 주정뱅이의 유일한 무기이자 방어구 없이 여기 맨몸으로 서 있지 않은가. 발 끝에 닿는 포석은 딱딱하다. 늘 그렇듯이 축축하고 차가우며 구두 끝이 시려오는 곳. 그런 곳이 파리라는 도시이다. 한 가지가 확실해진다. 이곳이 파리임은 분명하다.

한새벽 파리 거리는 방금 죽은 병자를 치운 어느 병원의 침대처럼 냉랭하다. 한때 온기가 있었으나 사라진 것처럼.

그 누구의 창가에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끄려는 시도도 없으며 켜지려 드는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가고는 있는 것인가? 그랑테르는 자리에 선 채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이처럼 양 팔을 벌렸다 툭 내렸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몰랐으며,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에 공포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의 삶이 본디 그러했으므로. 그는 다만 막연한 냉소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무엇을 할지, 어떤 것을 믿을지, 알 수 없으므로 그저 비웃어대기에 그쳤던 때처럼. 모든 것이 다를 바가 없었다. 이질적이나 자신이 아는 감각 안에서 그랑테르는 불안을 이기기 위해 코웃음을 한 번 쳤다. 자신을 이곳에 던져 넣은 누군가를 조롱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봐!

그가 크게 소리를 내어 질렀을 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파리 거리에서는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마치 이 거리에 산적한 어느 우울과 죽음들이 그것을 먹고 제 크기를 키워대는 것처럼. 소리와 활기는 반드시 그것들에게 잡아먹혔다. 그랑테르는 그것을 예상한 바 있으므로 놀라지 않았다.

누가 여기 담요를 좀 가져다 주겠어? 개구리가 덮는 것이라도!

그는 농담을 했다. 그가 구사하는 첫 번째의 가장 좋은 것을 꺼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침묵뿐이다. 청중이 없지 않은가.

좋아, 그렇다면 나는 디오게네스의 꼴이 되겠군. 아마도 햇볕을 찾다가 죽을 예정이라는 거야. 아니, 그가 볕 때문에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분명히 거리에서 수음을 해대다 돌을 맞아 죽었던 것임이 분명하군! 여기는 날 지켜 볼 이가 없으니 마음껏 문질러 대어도 되겠구만. 거기 숨어 있는 자네, 있다면 나와서 나를 좀 말려 보라고. 그러지 않을 참이면 내가 정말로 바짓춤까지 풀어 헤치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것으로 알 테니 말이야!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인극을 구사한다. 그에게 있는 나름대로의 쾌활한 면을 내어 보인다. 어둑어둑한 거리 한 켠을 가리키며 외친다. 대사처럼, 마치 그가 어느 극장에 서서 견유학파犬儒學派 학자의 모습을 재현해내는 것처럼. 그가 할 수 있는 것 중 두 번째로 좋은 것은 흉내내기였다. 세상 모든 이들이 흡수한 것을 흉내낼 줄 알지만 그것은 그랑테르에게 주어진 탁월한 재능 중 하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헛소리라고 불렀다. 길고 긴 방백 속에 이것과 저것을 뒤섞어 자신이 마셔댄 모든 것을 단숨에 토해 내는 주정뱅이의 기술. 그랑테르는 일순 정말로 자신의 혁띠에 손을 대어 풀어제껴 보았으나 그것에 기겁하는 이도, 휘파람을 불어 대며 부추기는 이도 없었던 탓에. 도로 그 손을 내리고야 말았다. 취기가 없으므로. 그는 망설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어느 활기라는 것은, 작은 집단 내에서 발휘되는 것에 가까웠으므로. 젊은 이상가들의 틈바구니에서 버릇처럼 떠들어대던 것들은 사람 없이는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파리의 거리는 텅 비어 있으므로. 그랑테르는 정말이지 무엇이라도 한 잔 들이키고 싶은 생각에 휩싸였다. 목마른 주정뱅이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는 웃는다.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다시, 농담이 구사된다. 모든 것은 수레바퀴처럼 돌아갔다. 그랑테르의 버릇이란 그런 것이었다.

뭐 하자는 짓인지 잘 알겠으니 어서 여기 유령 점원이라도 불러와 주란 말이지, 난 슬슬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 이는 더 이상 뽑아낼 것이 없는 우물과 같아서 여기 두어 보았자 하등 쓸 데가 없으니 어서 무어라도 주란 말이야.

그가 포석을 발로 한 번 연극적으로 굴러 낸다. 다시, 그 소리는 어둠에게 먹혀드는가 싶었으나. 저 멀리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랑테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애썼다. 정말로 점원이 나타날까에 대한 주정뱅이적인 궁금증으로, 그러나 그는 어느 점원 대신 붉은 조끼를 보았다.

마셔라.

그가 지붕 위에 있다. 병 하나를 내던진다. 그것이 깨진다. 비참한 소리가 났다. 포석 위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포도주 병. 그 안에 담긴 약간의 적대감조차도 주정뱅이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그랑테르는 그대로 서서 자신의 발치 대신에 뮈쟁의 가장 높은 곳에 선 이를 목도하고서 놀란 채 굳어진다. 방금 짙은 남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하늘 앞에 태양 하나가 나타났다. 그랑테르의 태양이라고 정정해야 좋을 것이다. 그는 앙졸라스였다.

...나의 태양! 대리석 조각께서 오셨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랑테르는 고개를 든 채로 양 팔을 활짝 벌린 채 너스레를 떨었다. 깨진 병 따위는 그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랑테르는 손쉽게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첫 번째 재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농담. 그러나 그가 막 '태양'에 대한 또 다른 귀절을 떠올려 냈을 때에 그랑테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붕 위에 선 앙졸라스는 그에게 경멸하는 표정조차 내어놓지 않았으므로. 문득 그랑테르는 자신의 혁띠가 풀려 있었음을 깨닫고 손을 놀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도로 채웠다. '아무렇지 않음'을 가장해 보았으나 실은 그 행위가 앙졸라스에게 일말의 영향이라도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앙졸라스는 그 자리에 못박힌 채 서서, 차갑게 불타는 푸른 눈으로 그랑테르를 조준이라도 하듯 내려다볼 뿐.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맨정신의 주정뱅이는 조금 더 깊이 불안에 잠겨들었다. 이것은 흔히 앙졸라스가 그에게 내어 놓는 무시라거나, 어느 냉랭함과 결이 다른 것이지 않은가. 분명히 그 엄중하기 짝이 없는 얼굴은 그 회의주의자에 주정뱅이이며 헛소리꾼인 자신을 보고 있으나, 그저 보고 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랑테르는 잠시간, 아주 드문 상태에 휩싸였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앙졸라스는 그런 그랑테르를 내려다 보다가 그 지붕 위에서, 일부간 슬픈 태도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퍽 두터운 존중이 담긴 손짓이었다. 그랑테르는 다시 한번, 놀라 굳어졌다. 그는 약간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고, 앙졸라스는 그런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 이제 말해.

무엇을? 그랑테르는 물어 보려 했다. 그는 혼란 속에서 눈을 깜빡이기만 한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앙졸라스의 금발은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구는 눈은 어두운 하늘과 떠오르는지, 혹은 지고 있는지조차 모를 태양의 빛을 비추지 않는다. 오로지 그랑테르 한 사람을 향해 뻗어 있으며. 주정뱅이는, 아니, 맨정신의 회의주의자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앙졸라스는 그를 다그치듯 한 마디를 더 꺼낸다.

어서, 그랑테르. 정할 것이 있어.

...하지만, 무엇을?

그가 처음으로 새를 본 두꺼비의 목소리처럼 딸꾹이는 소리를 내었음에도, 앙졸라스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랑테르를 향해 뻗은 손이 내려간다. 그랑테르는 앙졸라스의 얼굴이 아주 끔찍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떤 죄악이라도 짓고 있는 사람이 된 것마냥. 그러나 그가 아는 앙졸라스는 결코 죄인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이라면 모를까.

누가 여기서 죽을 것인지를.

그랑테르는 큰 소리로 그 말을 비웃었다. 주정뱅이는 깨진 병조각이 늘어진 포석 위를 발로 서너 번 구르며 배를 잡고 듣기 싫은 깔깔대는 소리를 냈다. 부러 조롱하려 들 때에 그러듯이. 우스운 소리였다. 앙졸라스가 죽음을 입에 담고 있으며 그에 대한 허락을 자신에게 구한다니. 어느 끔찍한 악몽이 내게 이런 것을 주었단 말인가? 그랑테르는 다시 한 가지를 확신해볼 참이었다. 이곳은 파리이며, 저것은 필경 앙졸라스가 아닐 것이라고.

이봐, 이봐! 그 실력으로 파리 극장에 데뷔하기는 글러먹었어. 차라리 내가 아는 술집 주인 과부가 훨씬 더 나은 연기를 하겠군. 그러니까,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야. 회의주의자에게 이상주의자가 그런 말을 할 일은 법정 외에는 없다. 그러니까 사형이 걸린 곳 같은 데 말이다. 그건 그리고 30년 전에만 이루어졌던 일이야. 오! 위대한 교수대여! 로베스피에르 식 조끼를 입었다고 해서 그와 같이 처형될 수는 없어. 지금 바라는 것은 그런 것 아닌가? 회의가 이상을 처형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나? 세상 그 누구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존재한 적 없는 일이고, 인류라는 족속이 평생 저질러 온 함정이며 나는 그것에 빠지지 않을 무지렁이기 때문이야. 멍청한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끔 믿어야 할 때가 있지, 그것은......

그랑테르가 한바탕 떠들어 대기 시작했을 때, 지붕 위의 앙졸라스가 몸을 숙였다. 한 발은 앞으로 내딛고, 그 무릎 위에 자신의 팔을 얹으며. 그들의 얼굴 사이에 바람 한 줄기가 흘러갔을 때 그랑테르는 말을 멈추었다. 붉은 향기가 흘러간다. 피비린내. 그레브 광장에서 한때 사시사철 명물처럼 풍겨대던 그 피비린내. 그러나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하나의 머리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주정뱅이조차 그토록 많은 죽음을 상상한 적 없을 만큼 거대한 무게가 그 사이를 갈라 놓고, 그랑테르는 그래서 말을 멈추었다.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어서,

.....

그랑테르,

앙졸라스의 목소리가 나직해진다. 그랑테르가 단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것들로. 그랑테르는 자신의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는 일에 익숙했으나, 이러한 것은 알지 못했다. 그는 방금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두 가지의 것을 모두 구사해 버린 것이다. 농담과 헛소리. 그는 갈 길 잃은 아이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가짜 날개처럼 벌려졌던 두 팔이 내려간다. 주정뱅이는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너무도 많은 두려움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주정뱅이 회의주의자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랑테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비틀어진 건물 지붕 위, 붉은 조끼를 입은 앙졸라스, 거리를 가득 메운 파도 같은 피비린내, 화약, 부서진 나무의 시체 냄새. 아무도 없는 이 조용한 파리의 거리. 여전하다. 변하는 것이 없다. 자신의 두 가지 재주는 이것들에 그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으나, 이제 그랑테르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된다. 그래서 그랑테르는 더 이상 비웃지 못했다. 대신 그는 물었다.

왜 네가 죽어야 하지?

나는 진실이거나, 거짓이거나. 그것들 중 하나이니까.

앙졸라스, 아니, 앙졸라스의 형태를 한 그 것은 여전히 몸을 숙인 채로 그랑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한다. 그랑테르는 단 한번도 그가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본 적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부정하기에는 그는 지나치게 맨정신이었다. 손 끝이 떨린다. 이제 그랑테르는 불안 속으로 술병 두 개의 길이만큼 잠겨든다. 그는 앙졸라스의 말을 알았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너는 내가 진실로 앙졸라스라는 어느 한 인간이라고 확신하고 있나?

......내가? 나는 그런 인간이 못 된다. 믿음은 내 것이 아냐.

그렇다면 너는 나를 거짓이라고 생각하나보군.

그리고 앙졸라스는 느린 손길로 삼색기 하나를 들어 자신의 허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 손길이 마치 어느 시신을 염하는 정성스러운 장의사의 것과 같아서, 그랑테르는 일순 등골 사이로 파고드는 그 불안에 혀뿌리가 잡아채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가 창 아래를 가리킨다. 뮈쟁의 불이 켜 밝혀진다. 그곳에 앙졸라스가 있다. 둘, 하나는 지붕에, 하나는 예의 그 뒷방 창문 앞에. 그랑테르는 말 대신 헛구역질을 한 번 했다. 지붕 위의 앙졸라스가 그것을 묶은 채 지붕 위에 몸을 세운 채 섰을 때 그랑테르는 자신이 아주 떨고 있음을 알았다.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같은 이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금발에 푸른 눈, 돌아선 옆얼굴, 붉은 조끼, 허리에 매인 삼색기.

뭐 하는 거지?

자, 네가 나를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말해.

그러한 기이함에 달려들 수 있는 이는 순수한 미치광이뿐이다. 풍차를 마주한 돈키호테와 같은 이. 일부의 멍청함과 과감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그 누군가뿐이 거대함과 어우러진 어느 선언 같은 말에 달려든다. 그러나 그랑테르는 불행히도 그 모든 것을 그저 흉내낼 뿐이었다. 그는 순수함을 흉내내었고, 광증을 흉내내었으며, 멍청함을 흉내내고 과감함을 흉내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러니까, 그랑테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훔쳐 내어 온 것일 뿐. 그것을 잘 갈고 닦아 연마하여 남들의 얼굴에 불쾌함을 드러내게 하는 데에나 썼던 이는 결코 돈키호테가 될 수 없다. 그랑테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감히 정면으로 창을 든 채 그것에 돌격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휘어진 정신의 척추를 가지고 있는 인간답게 굴었다. 약간의 뒤틀림 앞에서도 농담을 하여 보는 것이다.

나는 게리온이고, 너는 헤라클레스인데. 어떻게 내가 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아니, 그 말은 틀렸다, 그랑테르. 나는 나이고 너는 오로지 너일 뿐이다. 우리는 시민들이며, 네가 내게 경멸되는 것은 오로지 네가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이야.

정말이지 앙졸라스처럼 말하는군!

그랑테르는 다시 한 번 비웃음의 소리를 낸다. 그는 한번 더 회의주의자처럼 굴어 보려 했다. 취하지 않은 정신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들 때에도.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누구인지 모를 너 말이야, 네게 말하는 거야.

그랑테르,

그래, 내 이름을 그만 불러. 정말로 그 목소리 같으니까! 물론 결코 앙졸라스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아. 내가 잘 아는 사실 중에 하나지. 암, 그래!

그리고, 그는 비웃음 끝에 약간의 울음소리를 내었다. 이제 정말로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그랑테르는 이제 완전히 불안 속에 잠겨 버린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냉소하고, 또 논박하려다 방향을 틀어 앞뒤 맞지 않는 헛소리나 해댔으나, 결코 그러지 못할 존재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앙졸라스였다. 그랑테르는 정말로 믿지 않을 참이었다. 지붕 위의 앙졸라스는 그가 울음 소리를 낸 채로 뒤돌아 서 버리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잘 된 셈이군.

그리고, 앙졸라스는 허리춤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는 것이다. 그랑테르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향해 총이 한 번 발사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회의주의자의 맨정신 속으로 너무도 깊게, 또 날카로우며 파괴적으로 가 박혔다. 마치 앙졸라스가 하늘 아닌 그랑테르를 향해 총을 쏜 것처럼. 그랑테르는 소리를 내질렀다. 길게. 앙졸라스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앙졸라스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것은 나를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셈이겠지.

총구는 관자놀이에 대어진다. 거대한 성문을 노크할 작은 공성추 하나가 장전되어 있다. 화약과 함께 흩뿌려질 것이다.

자, 말해라.

그리고, 다시 반복되어진다. 그랑테르는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눈을 뜬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 광경을 결코 보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아니, 그는 정말로 그런 광경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뮈쟁의 뒷방에 앉아 있던 앙졸라스가 일어선다. 그 또한 권총을 들고 있다. 다시 하늘에 대고 총알 한 방이 쏘아졌을 때 그랑테르는 양 얼굴을 감싼 채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얼굴이 같은 방향을 본 채 그랑테르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 기이함, 마치 두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 깨진 병조각이 천 너머로 파고든다. 그러나 고통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는 혼돈의 한 가운데 몰아넣어지고, 취하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떨며 무릎 꿇은 처지가 되었으므로. 그것은 어느 속죄자의 태도이다. 그가 떨며 고해하려 했다. 그 진실이 영향을 끼치지를 바라며. 아무 것도 아닌 사실들을, 그러나 그에게는 가장 사소하고 작은, 뱉어내기 가장 어려운 것들을.

......나는 할 수 없어.

무엇을.

네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어. ... 나는 오로지 앙졸라스만을 믿는다.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뿐인가, 나는 인류를 혐오하고 모든 족속들에게 침이나 뱉지만 그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너를, 진실로...

이제는 내가 앙졸라스라고 생각하나?

아니, 아니... 몰라. 모른다. 알 수가 없어.

그랑테르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어느 연약한 정신의 결점이다. 취할 것이 없어 그는 너무도 나약한 인간 그 자체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자, 어서, 어느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말해.

그럴 수 없어.

그랑테르, 이건 아주 간단한 믿음을 가지는 일일 뿐이야.

나는 몰라.

다시, 피비린내가 불어온다. 앙졸라스는 지붕 위에 선 채 여전히 그랑테르를 보고 있다. 뒷방 창문 너머에 선 앙졸라스가 움직인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느 먼 해역에서부터 몰려온 파도처럼, 꿇어앉은 그랑테르를 덮친다. 취기 없는 눈동자는 그 풍랑을 맞은 조각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그랑테르는 잠겨든 불안 속에서 호흡하지 못해 헐떡인다.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앙졸라스는 속삭이듯 말하고 있으나 그 모든 단어들이 귓가에 대고서 움직여대는 입술이 소리내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은가. 두 앙졸라스가 똑같은 목소리로 각자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눈 채 묻는다. 말해. 그랑테르는 번뜩 눈을 뜬 채 피흘리는 무릎을 한 채 일어섰고, 이제 그 옷깃들이 천천히 어느 핏물과 화약으로 젖어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서 말해.

외마디 비명 하나를 지른 채, 그랑테르는 다시 얼굴을 감쌌다. 다시 떨어 대며 눈물을 흘린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우나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는 두려웠다. 저것이 진실일까봐.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이 모든 것이 거짓일까 두려웠다. 그는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어느 냉소와 회의의 정 가운데에 끼어 서서히 조여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맨정신의 회의주의자, 농담도, 헛소리도 통하지 않는다. 비틀어진 건물 앞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기이한 대리석 조각상 둘과 무릎 꿇은 회의. 그랑테르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떠 보았을 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앙졸라스가 ─혹은 앙졸라스들이─ 자신에게 진실과 거짓의 판별을 요구한다. 그랑테르는 아무 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냉소할 수 없었다. 그는 농담할 수도 없었으며 헛소리하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가지 뿐이었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러나 불신의 끝자락에 어떤 것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보통 때의 그랑테르라면 그것을 안줏거리 삼아 씹어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일 따위 믿지 않는 정신을 가졌으며 그것이야말로 주정뱅이의 핵심이다. 그러나 지금 그를 좀 보라! 저기 파리 거리 위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자를. 지붕 위의 앙졸라스는 그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대리석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지 않은가. 뒷방 창문께에 선 앙졸라스 또한 그 어느 기색도 비추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의 혈색은 분홍빛 장미색이며, 옷깃은 혈흔으로 젖어 있고, 이곳은 파리임에 틀림이 없다. 그랑테르는 이 모든 것이 진실일까 너무도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일이 이리도 두려운 것인지 그는 평생을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이제 그는 그것을 종용당한다. 짧은 말 한 마디를, 그러나 그가 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앙졸라스를 잃는 일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그는 이중 저울질을 한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믿었던 오직 한 가지가 두 갈래로 나누어진 채 서 있는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한다. 그는 무엇이 죽거나 살거나를 결정해 본 바가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결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든 정신의 기둥들이 낱낱이 해체된다. 그는 두려웠다. 이 미궁 속에서, 그토록 길던 헛소리가 멈춘다. 그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랑테르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만일 자신이 이대로 지쳐 확신과 불신 중 어느 것 하나를 영원히 내려놓게 된다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영영 확신할 수 없다면?

그렇게 그는 무릎 꿇은 채로 자신이 영영 알 수 없던 두려움 속에 파묻혔다. 헤어나올 방법마저 생각치 못한 채로.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어느 파리의 거리 안에 갇힌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그곳이 그저 어느 미궁 속 하나의 방과 같은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랑테르에게는 그것이 불신과 확신에의 혼돈이었을 뿐, 이 곳에 놓인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공포를 마주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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