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포도주 한 병.
- R의 짧은 독백.
(조명이 환하게 켜진다. 긴 테이블 왼편에는 의자, 오른편에는 술 세 병이 놓여 있다.)
(젊은 이가 천천히 걸어 나와 의자에 앉아 이리 저리 자신의 매무새를 들여다 본다. 긴 바지에 긴 장화를 신고, 헐렁한 재킷을 입고 초록색 조끼를 걸쳤다. 매무새를 대충 훑어본 그는 일어나 테이블 한켠에 있는 술병을 집는다.)
그랑테르 : 보르도란 저주받은 공간이야. 저주받은 고약이나 다름없는 썩은 곳이지. 헌데 포도주는 기가 막히게 맛있단 말이야. (중얼거린다.) 그 고약을 상처에 처바르면 아마 같이 곪아갈걸. 대신 포도주는 속을 소독해주고. 아이러니야. 아이러니. (병을 따고서 손에 들고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헛소리를 하기에는 딱 좋은 게 포도주야. 내 썩은 상처의 고름 냄새를 덮어라, 향기로운 포도주야! 지하도에 숨어 살은 마라처럼 짓물러 가는 내 정신이여. 이것을 어찌 하나.
(비틀비틀 걸어가 의자에 앉고서, 한 모금 들이킨다.)
그랑테르 : 내 이름은 그랑테르올시다!
(어둠을 향해 크게 외친다. 따라 낄낄 웃으며 말한다.)
그랑테르 : 다른 이름으로는 대문자 R이라고도 하지. 들어 보았을 거요. 안 그러면 굳이 내 주정을 들으려고 거기, 거기 앉아 있지도 않았겠지. (손가락을 뻗어 휘적거리는 몸짓을 해 보인다.) 주정뱅이의 헛소리는 세 페이지를 넘어가는 책으로 충분하지도 않았는지 거기 또 앉아 있어! 참으로 우습네, 이런 소극에 와서 무얼 하려고 있는지. 그래, 유령들이여. 오늘도 나를 보러 왔구만. 허연 조명 아래서 나를 들여다 보고 있는 자네들 얼굴이 딱 유령이야. 유령이다. 나는 이제 술을 마시다 못해 절어 버려서 이런 것들도 보는구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으러 왔을 테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주지. 여기 술 세 병이 있어. 보르도 포도주 한 병, 압생트 두 병. 다 해치우기 전까지 자네들이 여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나 해 줌세. 입은 다물게. 나 홀로 떠드는 것이 좋아. 누군가에게 대답을 받을 시절은 한참 지났으니까. 알겠나? (포도주 한 모금)
(다시 비틀거리며 걸어 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옮겨다가 주저앉는다.)
그랑테르 : 내 이름은 그랑테르올시다. 당신네들이 올라오거나 내려온 저 위, 아니면 저 밑의 어딘가에서 (위 아래를 휙휙 가리키며) 오신 댁들과는 좀 먼 곳에서 왔지. 보르도라고 들어 보셨나? 1645년에는 정식으로 프랑스가 되었고 1716년에는 항구를 짓기 시작했고, (술을 벌컥, 들이키며 입을 슥 닦는다.) 라 로셸, 그 항구 이름이야. 1814년에는 부오나파르트 반군들로 가득 차 있었던 항구 도시지. 별명은 초승달의 항구지. 그 이름에 담긴 아이러니함이 뭔지 아나? (술병을 발치에 내려 놓는다.) 초승달이라는 거야. 초승달은 뭔가, 아직 다 차지도 않은 미숙한 달 아니야? 응? 초승달이 아니고, 그믐달이라면 또 어때. 어쨌거나 그 달은 다 차지도 않은 풋익은 미숙함이나 너무 오래되어 썩어버린 늙음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겠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에는 영영 멀었거나 너무 일찍 전성기를 보내버린 이지러진 달이라니. 내가 만일 도시였다면 그 별명을 한사코 거부했을 걸세. 하지만 듣지도 않고 나를 그렇게 부르니 어쩌겠나. 포기하고서 받아들이겠지. 나는 초승달이다, 하며. 그리고 그 자리에 죽치고 앉아 마음에도 들지 않는 초승달이라고 계속 불릴 걸세. 곧 기울어버릴 보름달을 동경하면서 말이다! (가슴을 툭툭 치며 자랑스레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품고 있는 사람이지. 설익은 미숙함과 너무 늙어버린 노인과 같은 사람이 나란 말이야. 오, 인간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비소를 띄며 팔을 활짝 벌린다.) 나라는 인간은 일찍이 깨달았다네. 이 안에 말이야. 노인과 어린아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것은 비유적인 것이니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팔을 내리고 발 밑의 술병을 집으며) 나이가 어려도 원숙할 수 있고 노인이어도 풋풋할 수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드라마적인 면에서의 비유란 말일세. 하, 내 친구가 생각이 나는구만, 시적인 언어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냐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는데, 그 친구는 여기 없으니. (술을 들이킨다.) 주정뱅이는 무한정의 언어가 허용되지! 아닌가? 취한 사람에게는 말이야, 일종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네. 신들에게도 넥타르를 마실 권리가 있지 않던가? 저 어딘가의 신들에게는 황금 사과를 먹고 젊음을 유지할 권리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들이라면 마땅히 젊음을 유지해서 그 위엄을 뽐내며 누군가를 억압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권리지, 암, 일종의 권리야. 그런 의미에서 주정뱅이에게는 딱 세 가지의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네. 자연권이지. (낄낄 웃는다.) 첫 번째는 술을 주문할 수 있는 권리이고, 두 번째는 다 마신 술병을 내던질 수 있는 권리이고, 세 번째는 무한정의 언어로 떠들어 댈 수 있는 권리다. 신들이 젊음을 유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취급하는 것처럼 나는 주정뱅이기 때문에 내 이 세 가지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네. 마치 아카데미에서 펜대나 놀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야. 철학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야.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대면 그것이 철학이지. 주정뱅이란.
(술병을 들고 다시 벌컥벌컥 들이킨다. 입을 닦고서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그랑테르 : 아직 거기 있는가? 그래, 어디까지 했지. (의자에서 골몰하다가) 그래, 초승달. 내 고향이지. 게다가 나는 운이 좋은 것인지, 운이 나쁜 것인지는 몰라도 그 항구를 닮았다. 노인과 어린아이. 늙음과 젊음이 이상하고 기괴하게 뒤틀려 공존하는 정신을 물려 받았단 말이야. (술병을 손에 들고 어둠 속을 향해 손을 뻗으며) 듣고 있는가? 그래, 자네들 말이야. 잘 들어 보라고. 나는 일찍이 늙었고. (술을 들이킨다.) 철학적 죽음을 맞고 있는 인간이야. 내 정신은 이미 어릴 적에 늙어가고 있었어. 내 이야기를 하나 해 줌세. 우리 어머니가 말이야. 내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네. (목소리를 흉내낸다.) 얘, 너는 대체 무얼 그리 생각하는 거야? (어린 아이 목소리로) 어머니, 죽음에 반항하는 법이 있나요? (몸을 홱 돌리며 의자를 잡고 앙칼지게 외친다.) 넌 또 뭘 그리 고민해! 어서 이리 앉아! 죽음이니 반항이니,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는거야!
(잠시 정적, 의자에서 몸을 천천히 돌리며)
그랑테르 :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내 어린 시절의 심판자이자 신이 내게 선고한 그 말 한 마디를 곱씹어 보았다.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일까? 죽음에 반항하는 것이? 아니면 그런 것들이? 내 머릿속을 채우던 것들이 전부 소용이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삶이? 나는 질문이 너무 많았어. 너무 많았지. 생각도 많았고, 예민하고, 연약하고, 그렇게 태어나 늙음을 선고받은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게. 그리고 젊음을 가지게 되니 그 때부터는 죽어가고 있더군. 내 죽음에 감히 반항할 생각은 안 했네. 나는 착한 아이였거든. 자네들, 듣고 있나? (술을 들이킨다.)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그 때 이미 죽음을 선고받았어. 내 정신이 그 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한거야. 너무 예민했던게지. 너무도 예민했고 연약했었다. 나는. 멍청했던 거지! 멍청했어. (술병을 흔들다가) 거의 다 마셔 가는구만. 자네들, 아, 나더러 건강을 조심하라 말하던 친구가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우는 것은 조약돌을 씹어 삼키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했는데 말이야. 나는 요즘 매일같이 조약돌이 아니라 바윗덩어리를 씹어 삼키고 있겠군! (낄낄 웃다가)
(병을 들고 의자를 질질 끌어다가 테이블 반대편에 놓는다.)
그랑테르 : (의자를 짚고 서서 흘러나오듯이) 늙은이가 진정한 젊은이를 만났을 때 느끼는 기분이 뭔 줄 아나? 시기, 질투, 아니면 소유욕? 아니, 아니, 진정한 젊음을 만나면 말이야. 동경이라는 감정밖에 남는 것이 없네. 치밀어 오르는, 신성한 젊음에 대한 존경, 경외, 그런 것 말일세. 죽어가는 이가 진정 살아가고 있는 이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또 뭔 줄 아나? 숭배일세. 이미 선고받은 삶을 살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이에게 바칠 만한 감정은 그런 것이지. (마저 남은 포도주를 다 들이킨다.)
(의자에 앉아 병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엎드린다.)
그랑테르 : 나의 태양. 그래, 내 압생트를 마저 마시면 자네 생각이 좀 날 걸세.
(가만히 잠들며 팔을 테이블 아래로 떨구며 병을 건드려 빈 병을 쓰러뜨린다. 조명이 꺼진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