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의 끝
-싫은 게 없는 거 아니야?
언제였더라.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그 무렵까지는 좋아하는 것을 고르거나 싫어하는 것을 밀어낼 만큼 여유롭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좋아하는 과일, 간식, 그리고 많은 것들. 그런 것을 물어오던 목소리들. 물음에 답하기 위한 고민 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건져내진다. 사과, 샌드위치(간편식이기는 하지만 햄이나 양상추, 토마토와 빵을 쌓은 것이 싫지 않은 것도 맞는 것 같다.), 병아리나 밤 하늘, 아직 낯설던 바다와 짧은 물놀이, 가벼운 산책과 숲의 정경. 공부하는 것이나 책을 읽는 것도 싫지 않았고…,
가장 좋아한 것은 떡갈나무 숲이 있는 어느 집의 풍경. 잔잔할 날 없이 떠들썩한 아이들의 집. 그래서 제 ‘부탁’에 형질이 변경된 ‘열쇠’가 열어준 문 너머에 그 집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애초에 제가 바란 집은 그곳뿐이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이른 아침. 아직은 조금은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여름. 유진은 천장에 그려진 나무에 피어난 작은 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이고 잠자리에 들 무렵에는 메마른 가지 끝이 비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 마법의 그림은 시계를 대신하는 건가. 어른 마법사의 집은 이런 식인가 싶지만, 그게 썩 잘못된 방향의 편견이라는 것은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면 약간 삐꺽이며 열리는 문. 바깥으로는 몇 개의 방이 있는 2층 아래로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이 나 있다. 어린애들에게는 위험할 법한 계단이지만.
“…….”
그런 종류의 걱정은 더 할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유진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툭 발에 닿은 것을 향해 눈을 내리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를 꾸러미 하나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몰아쉬고 무릎을 내린다. 노끈으로 묶인데다 종이로 둘둘 감긴 뭉치는 아마 몇 권의 책이 아닐까. 왜 책이 이렇게 놓였는지는 모르지만. 다만 주위의 모습과는 꽤나 잘 어울린다고, 꾸러미를 안은 채 발을 옮기며 생각한다.
거실로 설계되었겠으나 지금은 간이 서재로 쓰이는 듯한, 트인 공간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책상이 있다. 온갖 책이 놓인 위로 쓰러지지 않도록 꾸러미를 올린 유진의 발은 소파가 놓인 중앙으로 향한다. 볕을 받기에는 좋은 자리지만, 그래서 커버가 상할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조금쯤 미간을 좁히는 것은 스스로는 모를 일.
이미 겉옷이며 책, 왜 놓였는지 모를 커피포트로 가득 채워진 소파 온갖 책과 잡동사니가 쌓인 여기에 나는 어쩌다 있게 되었을까?
마법 학교의 신입생이 된 열 다섯. 학교에 다니면서 돌아갈 집으로 떠올린, 열쇠가 향하는 방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옛 집이 되었다. 부지런히 일하는대신 공부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쩌면 제가 받은 편지는 행운의 편지인 모양이라고. 게다가 오직 배우고 익힐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친구를 만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욱 많은 것을 얻게 하였으나.
…그러나 긴 방학에 돌아가는 집에서는 다시금 현실과 재회하기 마련이어서. 늘 잔잔하고 달가운 날이 연속되기는 어려운 법이지.
도로를 낸다던가 건물을 세운다던가. 작은 시골 마을에 뭐 그리 지을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어른들의 이유로 집이 허물어지기로 결정된 것은 겨울이 지난 무렵의 일. 잠시 거처가 불분명해진 탓에 학교에 남게 된 것도 잠시, 곧 적당한 임시 보호자를 찾게 되었다.
유진은 저자의 이름이 쓰인 책 한 권을, 어쩐지 주방 바닥에서 주워 테이블로 옮기며 표지 위 글자를 따라 눈을 옮긴다.
샤를로테 밀러. 혹은 로지. 이 집의 주인이자 머무를 집을 잃은 소년의 새 보호자가 가진 이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저를 가만한 눈으로 관찰하듯 보던 여자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고.
특유의 꿰뚫어보는 시선으로는 제 속을 파헤칠 듯 보다가도 금세 관심이 떨어진 듯 눈을 떼고 책을 읽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른. 그렇지만 이해하기 위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것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탓이다. 그럴만큼 저 사람에게 관심이 가지 않기 때문일까, 혹은 그러기에는….
-지쳤니, 꼬마야?
어린 게 세상 만사 지치고 허망한 얼굴을 하는구나. 거 참 시시하기는.
꼬마 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꽤나 비틀린 웃음을 실실거린 여자는 한 번 치켜 올린 안경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제 낯을 향해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관심을 받고 싶어?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은 마음이 있니?
임시 보호자에게 흘러온 사연. 그런 것이 서럽고 버겁고, 넘치는 걸 누구라도 나눠주었으면 싶은가 하면. 유진은 제 속에 바람이 드는 까닭이 그와는 다름을 알았다. 별로 괴로운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다. 조금 늦게 고개를 저으면,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가볍게 픽 흐르는 웃음소리. 그럼 말야, 꼬마.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지.
-시선과 관심을 받는 방법은, 어설프게 웃거나 아니면 아예 웃지 않는 거야. 너는 어때?
그때 제 답은 어땠더라. 주방의 식재료를 살피고 채소 몇 종류를 꺼내 씻어 도마 위로 올리며 떠올린다. 아마 자신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기를,
-누구의 걱정도 사고싶지 않으면요?
시선도 관심도, 걱정도. 그런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아. 이전에도, 그리고 내가 누구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지금조차. 아직 직선으로 바라보던 소년의 눈을 휘인 시선으로 굽어보던 여자가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제대로 웃어. 알겠니? 어설프게 구는 어린애는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법이란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웃을 수 있는데요?
그런 질문을, 누군가에게 듣지 않았던가? 기묘한 기시감은 스쳐가고, 여자는 작게 키득거린다. 여러모로 좋은 보호자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야, 당연-하잖니? 재미 있으면 웃음이 나겠지. 그럴만큼 재밌는 일을 찾아보렴. 즐거우면 웃는 게 쉬워질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말-고.
무책임한 어른이 말을 마치고 휘적이며 잠을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 그 밤의 일. 썰어낸 채소를 팬에 몰아넣고 볶아 간단한 식사거리를 만들어두고 등을 돌리면, 창문을 넘어오는 햇볕은 어느새 조금 기울어 있다. 이제는 낮의 볕도 그렇게 따갑게 들이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러면 창가를 향하던 눈은 느리게 감았다 뜨이고, 가만히 깨닫는 것이다.
방학이 끝나가는구나. 그럼 다시 만나게 되겠지.
가장 좋아하는 것도 몹시 뚜렷했던 목표도 없는 지금, 마치 제 돌아갈 곳처럼 여겨지는 그 학교를. 그곳에서 만났던 모두를.
싫어하는 것을 여전히 찾지 못한 지금, ‘가장 좋아하는 곳’이 사라졌어도 ‘싫지 않은’ 곳이 남았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
그곳에서 제대로 웃는 것과, 즐거울 만한 일을 찾는 것. 어쩐지 학교에도 가기 전에 숙제가 생긴 것 같지만.
다시 느리게 감았다 뜨이는 눈.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가만히 보던 입꼬리가 아직은 약간 어색한 채, 느른하게 휜다.
다만 따분하지 않고 즐거운 일을 찾고자 하는 것이 새 목표와 다름 없게 된 제가 얼마나 휘영청 느긋한 한량으로 거듭나게 될지는 아직 모르던 어느 여름의 일. 가장 좋아하는 것을 잃은 불안정을 그저 덮어두기로 한 때. 심지어 그를 위해 흉내낼 인물이 저 영문 모를 새 보호자였다는 것도…. 그 모든 선택이 제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는 역시 가을과 겨울, 그리고 몇 차례의 여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여름이 지나고 있었고, 돌아갈 날이 머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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