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패배.
닥터후X레미제라블, 10대 닥터와 아베쎄의 벗들 크오.
폭풍이 이길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0.
닥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지나온 이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경험한 바가 있다. 때로는 가장 힘센 폭풍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닥터는 그것을 자신의 두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새기고 있었다. 시간과 역사는 흘러가면서 때로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타임로드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공간을 넘나들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야만 하는 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타임로드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닥터는 자신이 1832년의 언저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패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
아직은 폭풍이 오기 전이었다. 뮈쟁의 뒷방은 여느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총기를 다듬고, 담배를 피우고, 와인과 압생트를 들이키며 이상과 조국에 대해 떠들었다. 혹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논하며 지도를 성마르게 가리켜 대고 있었다. 그네들의 수장은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 내일 할 연설에 대한 글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변할 것도 없어 보였다. 단지 아직 폭풍의 전날 밤이었을 뿐이다. 아니, 폭풍이 오기 전의 순간이었을까? 즈앙은 문가에 앉아 동지들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끄적였다. 잠깐 콩브페르가 밖으로 나가려 하는 길을 내어 주려 푀이가 일어났을 때, 문이 왈칵 열렸다. 모두가 잠시 눈을 올리고 이 뒷방을 침입한 이가 누군지 보려 했다. 푸른색의 기이한 신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 내가 방해했나요? 신경쓰지 말아요! 여기도 벽난로가 있군요."
정적. 그리고 앙졸라스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문가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즈앙은 눈을 껌벅이며 이 낯선 -낯설다기보다는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할- 사람을 쳐다보았다. 콩브페르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바로 곁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앙졸라스는 으레 그렇듯 단호한 눈동자로 그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시민동지,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자기소개를 안 했던가요? 닥터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닥터요? 의사십니까? 의사... 누구요?"
"예상은 했지만 프랑스어로 들으니 더 즐겁네요! 그냥 닥터요. 반가워요. 어... 빨간 코트! 멋지네요!"
"시민동지, 여기는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누가 들여보내 줬습니까?"
"어, 저기, 쟁반에 와인 병 다섯개를 들고 가는 아가씨께서 들여보내주셨죠. 저런 실력은 우주 어디서도 찾기 힘들겁니다. 병 다섯개를 한 손에! 말도 안 되게 멋진 장소에요. 여기는."
그들의 수장은 이 사내를 수상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딜 가나 저런 옷을 입은 사람은 만나볼 수 없었다. 신발은 가죽을 이리저리 꿰메어 파랗게 물들인 것에 줄을 달아 묶어 놓았고, 줄무늬가 그어진 옷은 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즈앙에게는 그것이 다르게 다가왔다. 이 수줍은 청년은, 내심 자신보다 옷을 못 입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저, 그러니까, 닥터?"
"오! 네, 맞아요. 닥터! 반가워요. 곱슬머리 친구!"
"제 이름은 장입니다. 장 프루베르. 동지들은 다들 저를 즈앙이라고 부르지요."
"장, 즈앙, 즈앙? 그거 멋지네요. 중세적인 이름이에요! 즈앙,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사내는 대뜸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즈앙은 불쑥 들어온 그의 손에 잠시 놀랐다가 조그만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네, 저도 반가워요. 바로 알아차리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즈앙이 말하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손을 단단히 붙잡고 두어번 흔들었다가 놓아 주었다.
"세상의 모든 이름에 대한 기원을 알고 있는 사람 본 적 없죠? Voilà ! 제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거, 참 멋진 일이긴 한데."
앙졸라스가 둘 사이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아주, 아주 탐탁치 않은 얼굴로. 그리고 즈앙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무언의 몸짓을 해 보였다. 아마도 그는 즈앙이 위험에 처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즈앙이 느끼는 바는 조금 달랐지만. 방금 전의 대화가 시인 안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리라. 기이했지만 현자처럼 번뜩이는 재치를 엿본 즈앙은 그 사내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지금은 앙졸라스 덕에 불가할 것 같을 뿐이었다.
"시민동지, 우리는 당신의 소속을 밝히기를 요구합니다. 어디서 오셨고,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시지요."
"저는, 어, 소속된 곳이라면, 오! 타디스 가에 위치한 꽃 가꾸기 연합에서 왔어요. 증명서를 보여 드리죠."
앙졸라스가 팔짱을 끼고서 사내 앞에 버티고 섰다. 사내는, 그러니까 닥터는, 검은 가죽으로 된 무언가를 꺼내 자못 당당한 품으로 펼쳐 보였다. 뮈쟁의 모두가 그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꽃 가꾸기 연합? 저 주소는 뭔가? 그런 게 있었나? 수근거리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닥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온 방안의 온 방향으로 휘둘렀다. 자, 자, 보이시죠?
"말하자면... 가물가물하네. 아, '생도'!"
"생도?"
그 말에 쿠르페락이 고개를 들었다. 새 생도인가? 이제는 쿠르페락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팽팽히 긴장해 있었던 카페 뮈쟁의 뒷방은 일순간 먼지 가라앉듯이 차분해졌다. 먼 곳에서 우리들의 동지가 왔다는 말인가? 그 말에 푀이도 흥미를 보이는 듯 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라니.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들의 뜻에 동조하고, 또 배우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라는 말이 아닌가. 이 행동으로 일부의 의심은 풀어지고 오해는 내려졌다.
"내가 새 생도를 데리고 왔네! 네, 거기서 왔어요. 보고 배우는 건 늘 중요하니까요."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소! 이거,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신 생도인데 뭘 하는가! 환영회를 해야지!"
쿠르페락은 즐거운 투로 닥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힘차게 악수를 받아들인 닥터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오, 그럼요. 아주 먼 길이었죠! 앙졸라스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얼굴이었다. 수장이 해야 할 일이 늘 그렇듯이,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예리하게 날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그렇지만 자신이 요구한 사항을 모두 털어놓고서 증명까지 보여 준 닥터에게 더는 예민한 태도를 들이밀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손님의 자격으로 뒷방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앙졸라스는 그렇게 자신의 이성을 납득시키고 표정을 푼 채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수장의 악수는 모두의 눈에 올라가 있던 의심의 휘장을 내렸다. 닥터는 뒷방의 새로운 누군가로 자리하게 되었다.
"웃으며 대할 수 없는 일에 사과하겠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닥터."
"항상 웃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찌푸릴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표정 풀어요, 친구!"
앙졸라스는 마치 이 사람에게 자기가 패배한 것 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단지 한 오만함과 날카로운 분별력이 부드러움에 묻혀 버린 일이었다. 통상 자신의 무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였을 뿐이다. 닥터는 그 당당하게 머쓱한 모순적 태도를 보다가, 몸을 돌려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테이블과 저 테이블 사이를 마치 공간을 꿰뚫는 움직임으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앙졸라스는 그저 헛웃음을 짓고 말아 버릴 수 있었다. 닥터가 품 안에 숨긴 것이 무엇인지는 그들 누구도 모르지만 -아직은 말이다.- 적어도 그는 그것을 꺼내 들 용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
그렇게 닥터는 패배할 것이었다. 뒷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 위대한 타임로드는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규율로서 지은 것을 어긴다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항상 패배했다. 그는 무언가를 사랑했으며, 무언가에게 다가가기를 서슴치 않았다. 분노할 줄 알았으나 그는 차라리 구원하기를 택하는 입장이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선택권이 쥐어져 있었으나, 그는 늘 한 가지 선택권만을 바라보고 달려갔다. 그것은, 그가 오랜 옛날 자신의 이름을 '의사'로 선택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여기에는 거울이 없군요."
닥터는 또 한 번의 패배를 선택했다. 앙졸라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때, 그 수장은 막 고찰의 늪에 너무 깊히 빠져 버린 자신을 끌어내려 애쓰던 중이었다. 그래서 닥터는 그가 얼마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자신의 위엄스러운 소년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울을 둘 공간이 없지 않습니까. 동지."
그 고집스런 호칭에 닥터는 입을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공간은 좁았다. 늘 열대여섯명의 사람이 서성이면 꽉 들어차는 곳이었으니. 앙졸라스의 대답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공간, 그럼요. 공간이 없죠! 사람이 꽉 들어차 있고, 담배 연기하고, 와인 냄새하고, 잉크 냄새, 펜 굴리는 소리, 떠드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가스가 오가는 소리... 오! 벽난로에 불을 피우지 않는 건 좋은 선택 같아요. 왜인지는 나중에 설명해야겠군요. 무엇보다 여기는 생각, 생각, 생각이 너무 많아요! 와글거리는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울을 둘 공간은 당연히 없는 거에요. 맞는 말이에요. '동지'."
닥터의 말은 합리적인 것과는 멀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 속에서 앙졸라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행동이었다. 산만하게 흩어지는 소리 사이로 그 또한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아니, 보았다고 하기에는 어려울, 그저 눈치채었다는, 그런 직감적 표현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을. 닥터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한 형상으로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까, 그의 말이 비유일까, 아니면 진실로 그가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매일같이 이 공간에 가득한 고찰과 싸움과 합의의 과정을 그는 이미 다 읽어낸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앙졸라스는 그의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 말에 기꺼이 대답할 수 있었다.
"우리 모습을 비추어 볼 만한 거울은 없지만 남의 모습을 들여다 보기에는 용이한 곳이지요. 말이 거울이 아니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론이에요! 나 말고 누군가를 보는 것 말이에요."
"앞으로 일어날 혁명을 향한 과정에서, 나 자신은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겠군요."
"오, 앙졸라스."
닥터는 눈썹을 들썩이고 웃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환한 웃음이 아니라, 가히 씁쓸하다고 할 만큼 슬픈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도 실수를 하는구나. 앙졸라스는 그렇게 느꼈다. 그 미소 속에서 그는 상실을 잃어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실은 분명 아주 거대한 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수많은 상실, 그리고 폭풍. 앙졸라스는 잠시간 그 미소 속에서 낡고 지친 군인의 형상을 보았다. 앙졸라스는 책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책을 덮고서 입을 열었다. 닥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앙졸라스 또한 상실을 예감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때로는 정신을 올곧게 한 곳에 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 말고 다른 것에. 그래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기꺼이 그러고 싶어 질 때도 있지요. 나는 감히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마주할 변화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조국이 더 나은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하기에. 잠시 나는 나를 잊는 것 뿐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감정과 과거는 내게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런 일 아니겠습니까."
"알아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수많은 반항, 반항과는 다른 저항을 보았죠. 생각해보니 웃기네요! 당신들은 왜 끊임없이 싸우려 드는지."
"인류가 왜 저항을 하느냐고 물으면 드릴 말씀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해야겠군요. 그리고 웃기다는 말은."
"아, 체념이라는 게 이런 거라고 말하겠어요."
닥터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툭 뱉어놓고서, 앙졸라스를 바라보았다. 청년이되 청년이 아닌 얼굴로. 혁명이라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자명했다. 아니, 이전의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혼돈과 피바람은 이미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종결할 만한 거대한 폭풍 하나가 더 필요했을 뿐이다. 파리를 혼돈이 아니라 칭하지 말자. 그것은 도시에 대한 모욕이다. 혼돈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창조와 같은 것. 창조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뒤따른다. 새로움을 위한 일이 때로는 가장 폭력적일 수 있는 법이다. 닥터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크던 작던 간에, 전쟁은 전쟁이다. 혁명은 전쟁을 그 몸 안에 품고 있다. 그것은 닥터와 똑같은 존재였다. 혁명의 심장은 두 개. 하나는 전쟁, 하나는 사랑. 닥터는 어쩌면 타디스가 이 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체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군요."
"내가요?"
"네. 당신 말입니다. 닥터."
그리고 앙졸라스는, 마치 거대한 한 얼굴처럼 닥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닥터는 오랜 위엄을 목격한 기분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앙졸라스는 숭고한 예언자의 태도를 취했다. 잔인함과 희망을 동시에 전달할 말을 하기 위해 준비된 존재처럼. 마치 역사와 시간이 그러하듯이. 닥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체념이 쓸모없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잔인한 처사 같으니 말입니다. 허나, 닥터. 나는 당신 앞에서 감히 그러지 말라 부탁할 만큼의 확신이 있습니다. 투쟁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체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싸우는 것은 지쳐요."
닥터가 그렇게 내뱉었을 때, 앙졸라스는 웃었다. 그리고 닥터의 두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건 아니잖습니까."
"내가요? 오, 내가?"
"당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특히 나와 내 동지들은 더더욱."
"그거 참... 끝내주네요."
그리고, 앙졸라스는 닥터의 어깨를 다정한 손길로 토닥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 거리 선전에서 돌아온 자신의 동지들에게로 향했다. 소년 같은 금발이 그의 눈 앞에서 흔들려 지나가고, 닥터는 잠깐의 미소와 함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가 알던 금발과는 다른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같은 빛을 지니고 있는 것. 앙졸라스의 손이 닿았던 자리가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닥터는 그것과 비슷한 순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3.
그들은 패배할 것이었다. 닥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이 거대함을, 닥터 그 자신이 감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그 프랑스에 머무르는 동안, 가끔씩 자신의 타디스 앞문에 기대 앉아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 누구도 없이 홀로 존재하는 시간은 참으로 느리게 흘러갔다. 그 날은 달빛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 분자 사이로 흩어지는 저 빛을 내가 전달받을 수 있다니. 닥터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
"닥터?"
그리고 누군가 그 감상에 동참하기 위해 등장한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 안녕, 친구!"
"여기서 무얼... 이건 뭔가요?"
푀이는 푸른색의 박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다랗고 네모난, 작은 박스. 마치 그 안에 가구 비스무리 한 것이 들었을 법한. 하지만 그곳에는 문이 있었다. 문. 푀이는 닥터가 그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치 디오게네스처럼 달빛을 쬐고 있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그 모습은 아주 이국적이었다. 아니,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어디선가 온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 타디스에요."
"타디스요?"
"네! 타디스요! 이걸 타고 움직이는거죠."
"그렇습니까? 움직이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게다가 좁고 말이에요."
푀이는 막 공장에서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나온 참이라, 닥터가 하루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주 좁은 처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절로 걱정하게 되었다.
"동지, 혹시 그 안에서 머무르시는 건 아니지요? 저희 집도 그리 넓지는 않지만."
"오! 세상에! 이건 말이죠."
그리고 닥터는 아주 비밀스러우면서도, 신이 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이는 것보다 안이 넓어서 말이죠. 푀이는 저절로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동화처럼 즐거웠다.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믿고 싶어 질 정도로.
"문이 아주 좁아 보입니다만."
"원하신다면 구경을 시켜 드릴 수 있어요. 물론, 직접 제가 이 문을 열어 드리는 영광과 함께."
"이런."
푀이가 무어라 말을 얹기도 전에, 닥터는 냉큼 그 푸른색 상자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푀이에게 손짓했다. 들어와요! 푀이는 저항 없이 그 손짓에 이끌려갔다.
"아, 어지러운 걸 용서해 줘요. 여기 오기 전에 심각한, 어, 그리 심각하지는 않지만 타격을 입을 만한 충돌이 좀 있었거든요! 물론 고쳤습니다. 하! 늘 있는 일이죠. 이런저런 접촉 사고."
"닥터."
그 곳은 공장의 아가리처럼 두려웠다. 수많은 기계 장치와 철로 된 구조물, 선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나는 저 무언가. 그러나 동시에 다정했다. 공장과는 달랐다. 푀이가 놀라움과 당혹감을 함께 담은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것을 아는 일은 늘 그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혹시 마법사입니까?"
"마법사? 아, 세상에! 당신 정말 제대로 된 마법사가 무얼 하는 지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군요. 그렇죠?"
"사실, 전 살면서 이런 걸 볼 기회를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푀이는 차분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알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는 처음 보는 것에 놀란 얼굴로 기꺼이 안내자의 손길에 따라 그 공간을 돌아다녔다. 닥터는 그에게 새로운 공간을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이 기쁜 것 같았다. 푀이는 복잡한 숫자와 버튼이 가득한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네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어때요, 어, 푀이? 푀이! 네. 어떻게 생각해요?"
"신기하군요."
푀이는 자랑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두 팔을 벌려 그 공간의 소개를 마치는 닥터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푀이의 얼굴은 마치 매혹당한 사람과도 같았다. 이 낯설음, 그리고 새로움. 그는 갑자기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해 또 다시 배우고픈 생각에 휩싸였다. 탐구에 대한 그의 본능적 성질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게 움직인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닥터..."
"그럼요! 움직입니다! 공간으로! 시간으로! 저 멀리 우주의 에너지 속으로! 심지어 달빛과 당신의 과거 속으로까지! 내가 그 과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니! 말해야겠군요. 그건 정말로, 정말로 멋진 일이에요. 친구."
"여행을 한다는 건 그런 일입니까?"
그리고 푀이는, 그가 여행, 이라는 말에 미소짓는 것을 보았다. 아주 즐거운 얼굴로. 행복하게.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닥터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그 공간 -타디스라고 불리우는 것의 바닥-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는 닥터와 자신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실, 푀이 또한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여행은 실제적 공간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는 사유와 언어 사이를 부유했고, 활자를 타고 상황을 그려냈으며 또한 대화를 통해 확장하는 이였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닥터는, 글쎄. 그가 인간일까? 그러나 푀이는 그가 자신과 일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사실은 저 또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요? 예를 들어 봐요. 친구! 난 사람들 이야기 듣는 일도 좋아하는데."
"처음으로 글을 배웠을 때 그랬지요. 닥터. 저는 글을 몰랐습니다. 누군가는 그 앞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부끄럽지만.' 하지만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배워 나갔으니까요. 그건 정말로, 음, 멋진 일이지요."
닥터의 말을 따라하며, 푀이는 웃었다. 그는 손으로 타디스의 바닥을 두들기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이것도 태엽을 감아 움직입니까? 닥터는 늘 그렇듯이 푀이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다가, 아주 습관적이기 짝이 없는 돌출적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태엽이라니. 그런 발상도 나쁘지 않아요. 실제로 태엽으로 움직이는 타디스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원래 타디스들은 스스로... 스스로요? 맞아요! 당신 친구이자 그 뒷방의 대장 같은 이야기를 나눴었거든요. 스스로를 들여다 볼 필요성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 말이에요. 물론 시작은 거울이었지만."
"그 친구와 저는 다르지요."
푀이가 못박았다. 그러나 그 말이 앙졸라스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하면, 푀이는 분노할 것이었다. 그 말은 그저 그가 개별의 존재이며,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음을 단단하게 증명하는 말이었다. 닥터는 그것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마주한 수많은 객체의 정체성을 떠올리게 했다. 푀이는 그의 자부심을 드러내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와 저를 비교한다면 저는 불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보쉬에가 웃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닥터.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내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앙졸라스가 연설가라면, 나는 그 연설에서 배우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연설을 만들어 내려 애쓰는 이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들여다 볼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학생이라는 거군요? 늘 배울 준비가 되어 있고 또 발전하는 것 말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데."
"그래요. 하지만 알아 두셔야 할 것은 말입니다."
'생도'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푀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당한 몸짓으로. 닥터는 그가 공간을 한번 더 둘러보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그 자부심 가득한 노동자는 타디스의 내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그 공간에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례는 아닙니다. 닥터. 당신이 스스로를 생도로 칭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규율을 잠시 따라보아야만 하는 생도와 나 자신의 규칙을 세워야 하는 학생은 다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학생이고요. 푀이."
"그럼요. 그게 제가 정한 제 또 다른 역할입니다."
푀이는 타디스의 문을 열었다. 닥터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닥터는 그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노동자이자, 배움을 사랑하는 한 사람은 다시 자신의 집으로, 자신의 길로 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기꺼이 떠나기로 한 것이다. 푀이는 그제서야 피곤이 몰려오는지 잠시 하품을 했다. 그는 할 일이 있어 보였다.
"갈 건가요? 오, 잠시만, 이건 태엽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 잊었어요!"
"저런, 제 시계보다 낫네요. 전 어서 가서 시계 태엽을 좀 감아 주어야 할 것 같아서."
푀이는 친절하게 그 말에 농담으로 답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서서 닥터에게 손을 흔들었다. 닥터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가야 할 길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닥터는 푀이를 말릴 수 없었다. 그가 타디스 문 밖으로 나서는 일을 말릴 수 없듯이. 그들을 만류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누군가 타디스를 벗어나겠다고 스스로 말했던 순간처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닥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가요. 태엽 감는 거 잊지 말고! 시계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닥터는, 푀이에게 가벼운 인삿말을 던진 채로 타디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닥터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설득조차 시도해서는 안 되었다. 실은, 닥터는 패배하지 않으려면 그들과 만나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닥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길을 택했다. 그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기꺼이 타디스의 안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그는 이제 정말로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으나,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닥터는 되뇌인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 온전히 시간과 역사에 기능하는 존재들이었으므로. 닥터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4.
닥터와 그들은 패배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그들은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위험에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 날이었다. 닥터가 만났던 모든 이들은 거리로 나간 지 오래였고, 닥터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는 너무 오래 머무른 것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그 때 파리의 시민들은 막 바리케이드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닥터는 자신이 타디스의 문을 닫고 그저 떠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닥터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타디스의 문을 닫아 잠그고, 그저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사방에서 나무가 그 몸체를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도끼가 움직이고, 발걸음이 포석 위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화약과 폭발의 소리도, 가끔씩 비명도 들렸다. 닥터는 자신이 있는 골목이 어디인지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리케이드의 안에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타디스의 문을 왈칵 열어 젖혔다.
"왼쪽으로!"
외침이 들려왔다. 왼쪽으로 돌아! 닥터는 번쩍이는 칼날을 보았다. 기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말발굽이 그의 심장처럼 뛰었다. 두 박자로. 두근, 두근. 타디스는 순식간에 그 발굽에 걷어차였다. 무려 여섯 마리의 말들이 그 작은 -작다고 해야 할까?- 푸른 박스를 걷어차고, 흔들며 지나가는 것이다. 닥터는 소리를 지르며 문을 닫으려 했다. 타디스가 흔들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닥터는 타디스가 어디론가 이동하려 하는 엔진 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몰라! 닥터는 지푸라기와 진흙이 잔뜩 묻은 말발굽이 타디스를 숫제 짓밟으려는 것을 막으려 문을 쾅 닫았다.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군! 무슨 일이지, 내 친구?"
닥터는 타디스의 계기판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활기찬 움직임으로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바리케이드의 가장 뒤쪽, 어두운 골목에 떨어진 자신의 타디스를 보았다.
"이건 아니야. 좌표가 아주 조금밖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이건 아니야. 난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뭐가 잘못된 거지? 아까 그 말발굽들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징기스칸의 군대도 뚫지 못한 문이란 말이 쓸모가 없어지려고 하잖아. 얼른, 얼른! 뭐가 잘못된 거야?"
닥터는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은 그가 생각을 하기 위한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입으로 무언가를 파악하려 애쓰면서, 손으로는 타디스의 계기판과 버튼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닥터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바깥에서는 한 차례의 소요가 지나갔는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는 되도록 빨리 이 장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닥터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막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을 때, 조용히 타디스의 문이 열렸다. 닥터가 잠그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여기 아주 좋구만."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닥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기서 좀 자도 되면 잠드려고 하는데. 잠깐, 그 양반이잖아. 당신도 도망을 왔나 봅니다. 아니면 쫓겨났던지."
"이봐요!"
그랑테르. 닥터는 뮈쟁의 한 구석에 드러누워 항상 취해 있던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취한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술병에서는 지독한 압생트의 냄새가 풍기고, 그의 앞섶에는 나무 조각들이 들러붙어 있는. 마치 지쳐 버린 예술가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랑테르는 타디스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취한 사람의 냄새와 옷깃에서 나는 화약 냄새가 함께 기이한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닥터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얼른 나가요!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어, 당신도 나를 쫓아 내려 하는 거요? 할 말은 없는데. 난 할 일이 없어서 나가기 그닥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닥터. 바깥은 지금 숭고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스의 비극장이니까. 아니, 희극장이던가? 웃을 수 있으면 웃는 게 좋을 만큼 비극이라 해야겠습니다. 난 이 상황에 할 일이 없어요. 내 가면이 준비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원래 하나 달라고 했는데, 제기랄. 내게 줄 건 없다는 말을 들었단 말이에요."
"이 주정뱅이. 좋아요. 당신이 나보다 말을 많이 할 수 있을 테니 난 이제부터 질문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어요?"
"알겠다는 뜻에 대해서 내가 대답할 수 있게 허락한다면, 기꺼이 대답해드립지요."
닥터는 그랑테르를 바닥에 내던지다시피 놓았다. 그랑테르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약간 흐린 눈으로 타디스의 바닥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영혼이 다 빠져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몸을 늘어뜨린 채, 닥터가 자신을 찔러 보든 말든 손에 든 술을 들이키기만 했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닥터."
"난 한 마디도 안 한다고 했어요."
"질문을 안 하겠다고 했지, 한 마디도 안 한다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주정뱅이는 원래 중요한 건 잊고 사소한 것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잖습니까. 그건 그러니까..."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난 어디론가 갑니다. 중요한 건 여기 있으면 안된다는 사실 뿐이에요."
닥터는 순전히 그랑테르의 입을 막기 위해 말을 내던졌다. 타디스가 고장이 난 것 처럼 보였고, 그는 약간 히스테릭해져 있었다. 물론 그랑테르는 그의 말을 어떠한 공격이나 차단의 의사로 볼 생각이 없었다. 그 청년은 지금 타디스의 바닥을 들여다 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닥터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감흥을 받았는지. 자신 또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고백처럼, 고해성사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여기가 고해실인 줄 알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그저 상자였던 게 실망스럽네. 내게 단 한순간의 기회라도 줄 수는 없었나? 나는 여전히 회의주의자의 영혼을 가졌는데, 나는 고귀해 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너의 경멸이 아니라 내게 기회를 주면 어땠을까. 나는 너에 비하면 비참하다. 평범하다는 말도 그저 넘쳐난다. 나는 살지도 못하면서 죽지도 못하는가보군. 닥터는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닥터의 귀로 흘러들어 왔을까?
"이봐요."
닥터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랑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닥터는 어디선가 그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변덕을 부리기로 했다. 아니, 즉흥적으로 굴기로 했던 것일까? 이 주정뱅이가 타디스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여행 직전 순간에 잠시간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름에 그랑테르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소리일 수는 있지만, 내 말 좀 들어 봐요."
"주정뱅이에게 이상한 소리란 건 없는 법이라서요. 의사 양반."
"이건 움직입니다. 어디로든. 미래, 과거, 당신이 아직 가보지 못한 별들, 은하와 도시들에 갈 수 있을 겁니다."
"당신도 취했나보구만."
"나랑 같이 가겠습니까?"
그리고, 잠시간. 그랑테르는 취기 속을 헤메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들은 말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적어도 닥터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두 발로 올곧게 서서 닥터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내가 여기를 떠날 수 있다고."
"그럼요! 물론 당신은 나와 여행하기 위해 술부터 줄여야겠지만."
"닥터. 당신은 아무 것도 몰라요."
"내가? 아니, 나는 알아요!"
그리고 닥터는 그랑테르에게로 뛰어갔다. 그랑테르는 닥터가 그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이마를 양 손으로 꽉 쥐는 것을 알았다. 닥터는 그 불쌍한 주정뱅이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아는지 보여 주면 믿겠어요?
그랑테르는 잠시 닥터가 되었다.
닥터가 그에게 순간을, 우주의 순간과 시간의 순간을 열어 보여 준 것이다. 그랑테르는 그저 보았다. 아니, 느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나가는 순간에 서 있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우주를 보았다. 그는 자신과,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았다. 닥터는 그 주정뱅이 영혼의 눈이 잠시 선명한 곳을 바라보았다가 돌아오는 것을 알았다. 그랑테르는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당신이 된 기분이란 말이지."
"네. 그래요. 나는 알기 때문에 제안하는 겁니다. 알기 때문에!"
닥터는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랑테르는 그를 보다가, 손에 든 술병을 놓았다. 그리고 불길처럼 천천히 타오르는 발걸음으로 타디스의 문을 향해 나아갔다. 닥터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랑테르는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닥터가 외쳤다. 뭐 하는 거에요! 그랑테르는 거칠게, 그러나 차분히 대꾸했다. 내 할일을 하려고. 닥터가 그의 팔을 붙잡자 그랑테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닥터의 몸을 뒤로 거세게 밀어냈다. 닥터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그 움직임에 복종했다. 닥터가 계기판에 몸을 부딪혔을 때, 타디스의 문이 열렸다. 그랑테르는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문을 열고 나아갔다. 그리고 마치 닥터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은 사람처럼 매몰차고, 거세게 그 문을 닫았다. 동시에 타디스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엔진 소리와 함께. 닥터는 자신이 계기판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몰랐다. 그는 떠나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닥터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본디 혼자였던 자신을 자각했다. 그는 폭풍이었으나, 그 순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닥터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무기력함이 그를 덮쳤다. 마치 얼음 조각처럼 그의 두 심장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나는 이 곳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하는 것인데. 닥터는 조용한 타디스 안에서 얼굴을 감싼 채 자신이 떠나보낸 이들을, 그 청년들과 어딘가 닮은 이들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야.
0.
폭풍은 패배했다. 어떻게 패배했는가? 폭풍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몸을 숙이고 앉아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뿐이다. 버텨내야 할 뿐이다. 그러나 폭풍은 패배한다. 또 다른 폭풍에게 부딪히면, 그 둘은 어느 하나가 사라질때까지 서로 힘을 겨루다가 소멸한다. 둘 모두가 가진 힘을 전부 쏟아부어야지만 그 싸움은 끝난다. 어떤 폭풍은 그래서 싸움을 피한다. 제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 폭풍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폭풍은 그래서 기꺼이 부딪힌다. 나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다가오는 또 다른 폭풍을 마주해야만 하기에. 그래서 모두가 사라진 뒤 그 폐허의 공간에 햇볕이 들어찰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 주기 위해 기꺼이 그 존재를 전장터에 드러내야만 한다.
지금의 경우는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 패배를 보고 있다. 하나는 폭풍과 폭풍의 부딪힘이다. -예정되었고 또 예정되지 않은- 전쟁을 보고 있다. 하나는 제 몸을 비껴내어 피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패배다. 닥터가 만난 청년들은 기꺼이 또 다른 폭풍과 부딪히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싸웠으나 패배한 것이다. 그런 패배는 의미를 남긴다. 다른 경우를 보자. 싸우지 않았는데도 패배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닥터의 패배였다. 그는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는 패배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닥터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말, 그들이 가진 감정과 생각들에 사랑을 느꼈다. 때로 닥터는 아주 외로웠고, 아주 흔들렸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기꺼이 패배자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슬펐다. 그 타임로드는 슬픈 존재였다. 그렇게, 그는 그가 가진 시간에 비하면 정말 짧은 순간 동안 마주했으나 결코 작지 않았던 이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시 우주와 시간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술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들큰한 허브와 기름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문득, 아주 문득. 또 다시 패배자가 된 닥터는, 어디론가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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