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차, 헤인 님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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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주제 <유령이 된 나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


오늘을 마지막으로 저지르는 숨바꼭질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하자 너는

평생에 걸친 다짐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둔다

퇴근을 하면 늘어나는 목덜미

주름마다 척척한 한숨이 흐른다

찌든 냄새가 나는 고백을

유황처럼 발라 주어야지

그대의 허심한 속을

손이 없는 둥지로 덮어 주어야지

변방의 넋두리가 될 테야

나는 숨을 테야

그대 펄펄 끓는 열

그대 불면의 시

그대 치우친 방향

나는 아주 천천히 부서지고 말 테야

거짓을 횡령하고 끈적한 수배꾼이 될 테야

호흡이 가쁘게 차올라

겨드랑이를 간지럽힌다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도 있느냐고 물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청력을 편애하고

친구가 전하는 안부를

몰매질해 내쫓고

저녁이면 현관에 침을 뱉는다

끌끌 창궐하는 욕설들

나는 온 세포의 횡사로 범벅이 된 점액질

외로워 사람이 아닌 것에

종을 치며 반긴다

땅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을 찢어

손톱 사이에 끼우며

긁어 부스럼이라는 속담을 떠올린다

영혼에도 부피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죽을 것 같아 슬픈 게 아니라고 해명한다

슬퍼서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사라진다

꼭꼭 숨어 면사포로 눈을 가리는

잡귀신이 한 가닥 자라나는 불치

가시나무로 만들어졌다는데

전혀 매달릴 수 없고

헐벗은 채 옷장의 마지막 주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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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4


  • 토닥이는 앵무새

    이렇게 좋은 시를 쓰는 분께 남기는 피드백... 이 이번이 마지막이라, 제 그간의 나태가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사실 이 시는 꼭 우리의 이야기 같기도 했습니다. 첫 문장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헤인 님의 시들은 숨바꼭질이었을까요. 잘 숨어 누군가가 찾아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들통나기 마련이라 옷장의 나무 무늬가 되어서도 누군가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무척 외로운 말이자 다정한 괴롭힘을 가하는 모습들이 이어지는 줄의 면면이 드러나 좋았습니다. 어떤 넋두리가 되었든 듣는 귀가 되고 싶습니다. 편애하는 귀는 제게도 달려 있나 봅니다. 어디선가 또 문장을 쓰게 된다면 꼭 먼 우리에게도 쫓겨난 안부를 마저 그러안고 느리게 치우쳐 흔드는 우리에게도 알려 주세요. 그것을 희망합니다. 다음에도 술래가 하고 싶은 글이었습니다. 고마워요, 헤인 님!

  • 즐거운 새우

    청력을 편애한다는 문장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이런 좋은 표현들을 이곳에선 더 이상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네요 ..ㅜㅜ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마지막에 화자가 옷장의 마지막 주름이 된다고 했는데 앞과 연결해 보면 헤어질 수는 없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청자의 한숨이 되겠다고 하는 다짐(?)은 혹시 죽음과 연관이 있을까요? 꼭 마치 헤어질 수 없으니 죽어서 영영 어두운 부분으로 살겠다는 말 같기도 해서요 ㅎㅎ... (사실 저는 좋았어요) 후일에 어떻게든 다시금 만나 뵐 수 있길 염원할게요!

  • 수집하는 나비

    역시 이번 회차도 너무 놀라워요... 헤인 님은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장면을 새로운 언어로 바꿔서 묘사하는 데에 탁월하신 걸까요 너무너무 좋은 문장들을 매주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답니다 그래서 떠나시는 게 진짜 아쉬워요 ㅜㅠ 하 그냥 이번 주 헤인 님의 시는 모든 문장을 긁어다가 삼켜버리고 싶네요 커비가 되고 싶게 하는 시였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저지르는 숨바꼭질 '평생에 걸친 다짐을 벗어' '변방의 넋두리가 될 테야' '거짓을 횡령하고 끈적한 수배꾼이 될 테야' '영혼에도 부피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 부분들이 가장 좋았어요!! 나중에라도 시간이 나신다면 다시 함께 글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 HBD 창작자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지만 헤인 님 역시 5회차만에 쓰시는 솜씨가 훌쩍 발전하셨군요. 이미지가 다소 산발적으로 튀어 하나로 묶어지지 않는 점을 잘 극복하신 것 같습니다. '그대 펄펄 끓는 열'에서는 오래 멈춰있었답니다.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꼭 저희와 함께하지 않으시더라도 어디서든 빛나실 것을 잘 압니다. 비록 저희 스터디에서 볼 수 있는 헤인 님의 마지막 시가 되었지만, 더 넓고 더 광활한 세계에 비하면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헤인 님의 시를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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