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고정틀 샘플 01
감기몸살, 4000자 내외, 지인 선물
지끈. 침대 매트리스가 그를 아래로 잡아끄는 듯하다. 보통 몇십 분이면 끝난다는 악몽 속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밤 새도록 헤맨 K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찝찝했고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체온이 높음을 스스로도 알 지경이었지만 신기할 만큼 한기가 들었다. 추워. 겨울 이불을 품에 그러모아 멍하니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프구나, 내가. 올해는 그냥 넘어가나 했으나 이걸로 다섯 번째니 그 상처 완전히 치료하기 전까지는 계속 반복될 연말의 열병이다. 방 안은 그 어떤 소음도 없이 조용했으며 방 밖도 마찬가지라, K의 귓가를 때리는 거슬리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쁜 이명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슬렸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두통이 점점 심해져 이 소리들 덮어 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상할 만치 그리웠다. K가 이리도 어리광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무슨 말이라도 해 달라고, 내 옆에서 이 괴로운 이명을 네 목소리로 지워내 달라고. 다만 목소리 내어 방 밖의 누군가 부를 힘조차 없어 그는 이마를 짚은 채로 앓는 소리만 흘렸다.
아파. 분명히 어제 밤까지는 괜찮았는데. 아니, 진짜 괜찮았던가……. 이렇게 앓아 보는 것도 꼭 일 년 만이니 적응하려고 해도 도무지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분명 온몸이 달아올랐을 텐데도 이마에 닿은 손바닥에선 꽤 심한 열감이 느껴져서 K는 엉뚱하게도 어젯밤을 되짚었다. 밤새 이렇게까지 안 좋아질 수가 있냐고. 내가 또 착각을 했던 거려나.
실없는 생각도 오래 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살짝만 움직여도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돌아왔고, 앞을 간신히 보고 있어도 세상이 제 멋대로 회전하여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열이 많이 나는구나, 하는 짤막하고 단순한 생각들만 할 수 있을 뿐 머리가 멍하고 누구 한 사람 이름만이 자꾸 떠올랐다. 과거의 상처에서 도망하려는 듯 모든 신경이 몸부림쳤다. 그래서 이리도 아픈 걸까….
“시간이 몇 신데 아직까지…….”
지독하게 머리를 달구는 열감이 이 세상과 그의 정신 사이를 엉망으로 해리해놓았다. 아직 몽중에서 벗어나지 못한 K는 현실과 꿈을 헷갈리고 있었다. 너, 정말 내 앞에 있어? 이것 또한 악몽이어서는 안 되는데, 눈 앞의 너는, 너는….
“K.”
H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초점 풀린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그의 상태가 엉망임을 알아차렸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조용하기에 피곤해 보였으니 조금 더 자게 둘까 싶어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이 시기의 K가 어땠는지 한두 해 본 것도 아니면서. 방 안의 공기는 버석하고 건조했고 K의 입술도 그랬다.
실책도 잠시,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이럴 때마다 지독한 무력감을 느끼지만 지난 몇 년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은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연말이라는 시간은 K의 상처를 들쑤셔놓더란 것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랍시고 분위기가 온통 들뜰 때면 제자리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밑으로 밀려난다. 네가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녹색의 눈동자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의 표정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물들더니 허둥대며 성치도 않은 몸 억지로 일으켜 앉으려 애를 쓰기에 H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힘주어 불렀다.
“... K.”
그는 성큼 다가가 K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눕혀 주었다. “나 여기 있으니까 누워 있어.”
담담한 어투였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를 걷어 내고 이마에 손바닥을 대어 보면 열이 꽤 심했다. 아프지 않게 해 줄 수는 없더라도 덜 아프게 해 줄 방법은 있겠지. H는 미리 사 뒀던 비상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짤막하게 고민하면서 굽혔던 허리를 폈다. 거실 캐비닛에 뒀던가.
H……. 거실로 나가 약을 찾으려던 H는 K의 입에서 앓는 소리와 함께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행동을 멈췄다. 거의 동시에 손목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제 몸 가누기도 어려운 와중에 겨우 손 뻗어 H의 손목 붙들 정신은 있었다.
“H, 나 아파 ……”
숨소리가 색색거리며 방안을 채웠다. 늘 웃으며 괜찮다던 사람이 부리는 어리광은 상당히 파괴력이 크다. 빨갛게 충혈되어 겨우 뜨고 있는 눈과 창백한 낯. 온몸을 흠뻑 적신 식은땀과 지독하게 앓고 있는 K….
“약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빨리 가져온다고.”
“아니, …… 가지 말고 있어. 있어 줘….”
힘겹게 내뱉는 음성은 안타까울 만큼 갈라져 있었다. 성치 않은 목이 그 짧은 대화조차 견디지 못하여 기침이 터졌다. 온몸 들썩이며 토할 기세로 기침하면서도 끝내 붙든 H의 손목 놓아 주진 않아서 그는 다소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언제 H가 K에게 이겼겠냐마는 아픈 상태의 그는 전의조차 상실하게 만들었다.
“… 많이 아프냐.”
K가 상대적으로 시원한 H의 손을 끌어다 제 이마와 눈에 덮어 두었으므로 H의 손바닥엔 그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까지 전부 느껴졌다. 제 얼굴 반절 가량을 덮은 손 위에 제 손을 포갠 K는 호흡을 진정시키고는 중얼거리듯이 대꾸했다.
“힘들어…….”
“힘들겠지, 열이 높으니까. 해열제를 먹어야 좀 내릴 거다.”
“몰라, 자꾸……. 자꾸 생각난단 말이야….”
손을 내맡긴 채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대꾸하던 H는 잠시 멈칫했다.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 H가 손을 빼내어 K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면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감추었다. 두 손으로 H의 손 붙잡은 채라 얼굴을 가리는 손이 총 세 개. 평소 가릴 필요도 없이 감추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세 겹 너머로도 표가 났다.
“… 그래. 생각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겠지.”
나라고 그 기억이 없겠냐. 스물두 명 우리 중에 그 일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허나 살아가야만 하는 나와 달리 너는 잠시 눈 돌리면 사라지고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 일 네가 입에 담으니 유독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기도 해. H가 침묵하자 K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꿈 아니지…? 잠들면 자꾸, 꿈에 나와…….”
K가 안식을 빌어줬던 사람들, 잃었던 모두가. H는 입술을 꾹 깨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쓸었다. 무어라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을 거란 말 한 마디가 지금의 K에게 대체 무엇을 보장해줄 수 있는가.
그가 잠에 들자 조심스레 손을 거둔 H는 해열제와 수건을 가져왔다. 잠시 일어났다 다시 앉는 기척에도 깰 만큼 얕은 잠이었다. 눈을 느릿하게 떴다가 감았다가, 정신이 깜박 흩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내 물수건을 갈아주었지만 고열은 내릴 줄을 모르고, 달뜬 정신이 자꾸 과거로 회귀하며 잠가 두고 싶었던 기억들을 제멋대로 끄집어낸다.
K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옆얼굴을 타고 베개를 적셨다. 아프다, 몸이 지독하게 아파서 느끼는 괴로움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다. 늘 이성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던 그는 지금 온몸의 열기에 온몸을 내맡기면서 그것들을 조금 미뤄 두고 싶다고 느꼈다. 눈을 떠도 시야가 흐릿하고 눈을 감아도 똑같이 어지러웠다. 아, 다시 눈을 떴을 때 네 모습이 여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는…….
“… 흐, H…….”
눈물 차오른 눈으로는 사람의 형체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눈꺼풀은 왜 그리도 무거운지. 손 잡아 줘, 곁에 있어? K가 덜덜 떨리는 손목에 힘을 주어 까딱대면 곧이어 누군가 힘있게 붙잡았다. 앓는 네 모습 보고 느껴지는 불안함과 두려움 같은 건 전부 묻어 두고 네게 확신만을 주고 싶었다.
“그래, 나 여기 있다.”
담담하고 심지 있는 목소리가 불안한 물음에 대꾸한다.
너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흐려지고 체온이 내릴 때까지 몇 번이고 대답해줄 수 있다. 네가 늘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픈 연말은 앞으로도 수 차례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지켜보며 속이 꽤 쓰렸지만 그럼에도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 그저 네가 나의 곁에서만큼은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상처가 완전히 낫기까지 얼마가 걸리더라도 나는 네 옆에 있을 테니까.
完
자관 빌려주시고 샘플 사용을 허락해주신 지인 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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