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고정틀 샘플 02
감기몸살, 3000자 내외
눈을 막 뜬 직후엔 스스로가 얼마나 오래 잤는지 판단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불 꺼진 방안이 어두웠다. H는 오랜만에 정말로 오래 잔 것 같다고 느꼈다. 개운하다기보단 온몸이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둔했다. 분명 밤에 잠들었건만 어쩐지 오후라도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여전히 누운 채 무거운 눈꺼풀 깜박이며 어쩌면 열다섯 시간쯤 자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몸이 무거울 리가 없는데. 그러나 조금 뒤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움직인 그는 지금이 아침이며 이리도 온몸이 늘어지는 것은 지독한 몸살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뒷목의 둔탁한 통증과 함께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만큼 저릿한 근육통이 온몸을 괴롭혔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그렇게 편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게 그나마 제일 나아서, H는 그대로 누운 채 창밖을 가만히 내다봤다. 햇빛이 쨍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는 걸로 보아 어떻게 생각해도 밤은 아니었다. 조금 전엔 자다 깨서 정신이 없었구나. 힘겹게 팔 움직여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뜨겁나, 제법…. 손바닥에는 거칠거칠한 느낌이 맞닿는다.
분명 손에 닿는 자신의 피부는 뜨거운데도 적당한 온도의 방마저 지독하게 춥게 느껴져서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 데도 제법 의지가 필요했다. 으… 침대를 짚은 채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방의 구석에 놓인 침대, 몸이 옆으로 휘청하면 벽에 닿는다. 벽에 기대앉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픈데. 꽤 많이. 생각마저 뚝뚝 끊겨 단순하고 원초적으로 돌아갔다. 요즈음 무리했던가. H는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앉아 침대와 벽에 온몸의 체중을 맡겨놓았다. 웅크린 자세는 무거운 추 얹어놓은 듯 지끈거리던 머리가 무언가 후벼 파는 듯 아파오기 시작하자 더 쭈그러들었다. 윽. 시야가 밝아졌다 꺼지며 정신없이 점멸했고 두통 견디기 위해 바르작거리는 움직임마저 어지러움을 가중할 뿐이었다. 눕지도 서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앉은 H는 조금 견디기 힘들다고 느꼈다.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조금이라도 몸 일으키니 제 몸뚱이마저 감당키 어려울 만큼 어지러웠다.
그가 겨우 고개를 든 건 달칵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한쪽 손으로 이마 짚은 채 천천히 심호흡하며 두통과 고열로 울렁이기까지 하려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웅크렸던 H가 C를 마주하고 손을 뻗는다. 마주한 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 확인할 겨를도 없어 그저 이쪽으로 와 달라는 답지 않은 어리광부터 튀어나왔다.
“C…….”
몇 시간 만에 처음 내는 목소리. 조금 전 C가 H의 방 문을 열었을 때 그 방은 늘 보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적당히 새어 들어오는 햇빛, 거슬리지 않는 온도와 습도 같은 것들. 오직 H만이 평소와 달랐다. 머리카락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이마를 짚은 채 끙끙 앓는 모습 같은 건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 아프더라도 옮기면 안 된다며 C가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금했던 이 아니던가.
하지만 오늘은… 눈이 마주치면 그가 저를 향해 손을 뻗는다. 뻗은 손이 힘없이 떨리다 금세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 작은 움직임으로 H는 균형을 잃고 반대쪽으로 휘청했다. 쓰러져 봤자 침대였으나 놀란 C는 서둘러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들어 받쳐 안았다.
“…! 괜찮아?”
C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우선 옅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괜찮다고 말할 상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몸에 배인 습관 같은 거였다. 괜찮냐는 질문에 괜찮지 않다고 대답해본 적이 드물었으므로. 하지만 벽에 기댔음에도 불구하고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몸은 어떻게 보나 전혀 괜찮지 않았다. 거의 C의 품 안으로 몸이 떨어지는데도 H는 자세를 갈무리하지 않고 그렇게 무너지도록 두었다. 그럴 힘도 마음도 없었다. 괜찮지 않았으므로.
“H, 열 나네. 하나도 안 괜찮잖아.”
거의 무게 전부 떠안은 채로 이마에 손을 대어본 C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조용히 타박하자 H는 으응, 하는 대꾸를 하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많이 아픈가 싶어 걱정이 된 C가 무어라고 입을 떼려 하면 그는 그 정도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온몸에 닿는 그의 체온이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가지 말고 있어….”
“잠시만, H…”
C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높은 체온, 뜨끈하게 달아올라 붉어진 피부와 힘겹게 찌푸려진 표정이….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H의 뒤통수를 살살 쓸어주었다. 어떻게 해 줘야 하지. 붙든 팔을 살살 밀어내보는 것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휘청이는 온몸 전부 제게 맡겨버리고 앓는 그를 강하게 밀어내기에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 알겠어. 불편하게 구겨져 있지 말고 누워, 같이 누울게.”
결국 C는 지금부터 잠시간만은 그에게 져 주기로 결정했다. 어쩌겠어…. H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C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라던 바였는지 두어 번 고개 끄덕이더니 제대로 눕도록 이끄는 그녀의 손길에 고분고분 따른다. 물수건이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아 잠시 벗어나려고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베개를 베고 똑바로 누운 뒤에는 무어 기다리는 듯 C를 올려다보았다.
… 알겠다니까. 못 이기겠다는 듯 내뱉고선 좁은 침대를 비집고 H의 옆에 몸을 뉘였다. 올려다볼 필요 없이 눈높이에 C의 얼굴이 놓이자 그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굴었다. 머리 아프니까 안아 줘….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뱉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얼굴과 얼굴 사이 거리가 워낙 좁아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미 그에게 져 주기로 마음먹은 C가 품을 내어주자 꾹 끌어안곤 잔뜩 찌푸려졌던 미간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한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주기성을 띨 때까지 그녀는 H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내 앞에서라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슬슬 온몸이 저릿하다고 느끼기 시작할 즈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 속삭여 물었을 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들었구나.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C는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수건에 찬 물을 적셔 와서는 H의 이마에 덮어주었다.
아프고 힘들 때 나를 찾는다는 건 내가 네게 꽤 의지가 된다는 의미겠지. H가 붙잡지 않았더라도 C는 어디 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가 편안한 잠에 빠진 동안 물수건 갈아주며 손깍지 낀 채로 계속 침대 옆에 머무른다.
금방 좋아져야 할 텐데. H니까…….
完.
신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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