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疑敏 : Higher
형, 정말이야. 우린 그렇게 될 거야.
luvtea - autumn keys
“나도 언젠가는 저런 높은 곳에서 살고 싶어.”
“그렇게 될 거야.”
“너는 늘 거짓말만 하는구나.”
비쩍 마른 손을 꼭 붙잡아 품에 안는다. 내내 바깥에 있어 온기 뺏긴 체온이 미지근하다. 오랫동안 저 기다리느라 바깥에 서있던 탓이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가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형, 많이 춥지. 피부 위로 미적지근하게 어른거리는 열기를 꼭 붙잡는다. 기다린 거야?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되묻는 목소리. 희끄무레 묻어나는 기대감이 선연하다. 무어라도 해주고 싶어 얼음장처럼 꽁꽁 언 손을 제 입술로 옮겨 녹인다. 그를 대신해 제 온기가 뺏기는 줄도 모르고 그리 행복한 얼굴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원망할 것이라곤 저 하늘과 바람, 폭설밖에 없으므로, 제 형제의 온기를 뺏어가는 자는 필시 눈 없고 거죽 없는 그들이었다. 작은 손이 꿈지럭꿈지럭 형제의 체온을 붙든다. 그러나 그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이나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본다. 아, 익숙한 상황이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가 적당히 굳어진다. 또 시작이네. 꿈지럭거리던 손 안에서 미세한 떨림이나 망설임이 살갗을 타고 올라온다. 그의 눈에 가득 차오른 붉음이 한 번은 어둑하게 푹 꺼졌다가, 한 번은 그늘에 진 빛을 탐하듯 짙어진다. 말하길 고민하는구나, 싶었지. 허나 재촉하는 법 없이 얼어있는 손을 제 숨으로 녹여주며 시선을 맞추듯 눈 흘긴다.
온갖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 나와 쏙 빼닮은 그의 눈동자가 좋았다. 내가 당신의 피이자, 동생이라는 착각 속에 살 수 있도록 만드니까. 하여 무얼 담고 있어도 마냥 좋았지. 비록 그것이 경멸이더라도. 저와 마주친 눈이 크게 떨리는 것을 보노라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다정하고 착한 동생인 양 웃음 짓는다.
형, 정말이야. 우린 그렇게 될 거야. 되도 않는 속삭임과 무던한 어조. 정말로 그리 될 것이라는, 의심조차 없는 목소리. 고개를 들어 그에게 제 이마를 얹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곳은 푸른 땅, 따뜻한 햇살, 싱그러운 잎사귀로 가득한 세계. 온몸으로 존재함을 느끼듯 깊은 숨을 들이쉬면 팽창된 폐부와 내쉬는 호흡 사이로 꽃향기가 남는 듯했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 늘 이 세계에서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형은 우리만의 세계가 적잖이 힘든 듯했다.
“그만둘 수는 없어? 이제 괜찮잖아.”
“무얼?”
그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한 번쯤 되묻는 건 듣기 거북하다는 반증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된 문답 앞에서 나올 반응이라곤 뻔하지. 대답이 끝나기 무섭도록 그의 안색이 분노로 가득 차올랐다가 하얗게 질리길 반복한다. 떨리는 어깨와 간헐적으로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선명하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대에 올라온 배우 같기도 하다.
너는, 언제까지 날. 발음을 짓씹어 내는 목소리가 고통으로 사무친다. 결국 꼭 쥐어냈던 손을 단박에 뿌리치고서, 어쩌면 악스럽기까지 한 고함을 내지른다. 단숨에 잡을 수 없는 거리로 멀어지는 듯해 한 발짝 다가서면 오지 말라며 뒤로 물러났다. 뒤엔 차가운 벽돌만이 그를 반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들썩거리는 어깨, 흥분으로 다소 거칠어진 숨. 외치는 목소리 사이사이로 깊은 겨울이 스며들어 입김을 만들었다. 아아, 목도 아프면서 또 이리 소릴 질러. 외치는 목소리 틈새로 갈라진 음색이 들렸다. 집에 돌아가면 물이라도 따뜻하게 데워줘야지. 그가 괴로워할 때면 제 속에 칼이 꽂힌 듯 아파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야?”
“형을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가늘게 웃으며 다시금 그의 손을 붙잡는다. 봐, 또 차가워졌지. 다행히 이번에는 뿌리치는 법이 없었다. 힘 빠진 손이 고이 제 손바닥에 들어차면 그제서 눈가에 기꺼운 웃음이 돈다. 느슨한 손의 몫까지 꼬옥 붙들어 집으로 향하는 길. 반쯤 켜진 가로등 아래로 작고 위태로운 그림자가 기울어진다. 앞서 걸을 때서야 한 발짝씩 푹 파이는 눈 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의 걸음, 뚝 멎어버린 발소리. 바스라지는 눈길. 곧 꺼질 듯이 암전을 반복하는 가로등. 걸음을 재촉하려 고갤 돌리면, 그림자에 가려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돌연 그게 참 무서워서. 형, 얼른 가야지. 잔떨림을 누르고 말을 건넸을 무렵, 채 자리지 못한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을 꿰뚫는다.
“널 보고 있으면 내가 싫어져.”
‘“……아.”
퍼뜩 눈을 뜨자 불 꺼진 천장과 고요한 거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보다 만 영화 한 편, 은은히 켜진 주홍색 수면등, 창 너머로 번쩍거리는 야경. ―아무래도 선잠을 잔 모양이다. 하필 그런 꿈을 꿔선. 뻐근한 눈두덩을 손으로 꾹 짓누르며 앓는 소릴 내었다. 허공을 유영하듯 붕 떠오른 이성이 어색하다. 때마침 영화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당신을 사랑한 건 운명이었어요. 새삼 진부한 대사나 지껄이는 영화가 거슬린 탓에, 옆자리에 널부러져 있던 리모콘으로 꺼버리곤 아무렇게나 던져버린다.
진득하고도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마른 세수와 짙은 한숨이 소리의 전부일 만치 긴 정적이 거실을 메운다. 단순한 호흡 이상의 것들,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진 것들이 목구멍에서부터 깊숙한 속을 돌아 나온다. 리이민, 리이민. 내 불쌍한 동생. 네가 싫어. 깨질 듯이 울리는 두통에 눈두덩 위로 손등을 올리면, 그제서 손가락 사이로 자잘하게 빛나는 밤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둑한 밤에도 반짝거리는 조명과 네온이 그날, 겨울의 하루와 비슷하다. 세차게 내리던 폭설과 한 발짝 내딛기도 어려웠던 길목과는 다르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런 높은 곳에서 살고 싶어.
“뭐야, 별 거 없잖아.”
조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잇새로 샌다. 새벽이니 자긴 해야 하는데. 어째선지 목소리는 선명해지고… 있을 리 없는 겨울 바람이 뺨을 스친다. 번쩍이는 가로등, 빛의 경계, 원망스럽게 읊조리던 입술의 움직임. 그 모든 것들의 윤곽이 떠오른다. 그때 난 뭐라고 했었지.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감겨든다. 울었던가, 웃었던가. 혹은 모른 척했던가. 떠오르지 않는 그날의 자취를 쫓아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죄를 찾아서. 오늘도 어둑한 겨울 바다에 뛰어든다. 젖고, 젖어버려 가라앉을 때까지.
형, 약속 하나면 돼.
……무슨 약속?
날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난 그거면 충분해.
- 카테고리
-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