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지나간다
마침내 뱃고동이 울리고 푸른 바다로 나가기까지.
Rain - Ed Carlsen
슈샤이어의 한파는 한 시도 멈추는 날이 없었다. 눈 쌓인 바닥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푹푹 꺼져 발길을 잡아끌었고 펑펑 내리는 눈만이 죽은 이의 무덤을 만들었다. 매서운 바람, 앙상한 나뭇가지조차 날짐승이 되어 이를 드러내는 북부는 누구라 해도 편히 살 곳이 아니었다. 슈샤이어의 주민은 이런 땅에서 태어난 게 죄라며 신세 한탄을 하거나 묵묵히 제 앞날을 걱정하는 게 하루의 일과였으며 그건 어린애에 불과한 나 또한 다를 바 없는 현실이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나무 싹이라도 꺾어다 몸 녹일 방도를 찾는, 그런 나날의 연속.
낡아빠진 목도리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고 칼날 같은 숨을 내쉬었다. 작은 품에 꽉 끌어안은 나뭇가지가 여러 번 생채기를 만들었다. 따끔따끔, 바늘을 한 아름 안은 느낌이련만. 혹여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가누는 것조차 힘든 팔에 힘을 준다. 그렇게 집까지 계속 걷고 걸어 나뭇가지는 미처 아물지 못한 곳에 새로운 상처를 냈고 오랫동안 이어진 흉터는 자연스럽게 온 피부를 채웠다. 쩍쩍 얼어붙는 피부와 따끔한 통증이 겹쳐 눈살을 찌푸렸다. 다듬지 않아 시야를 가득 채운 앞머리가 눈가를 찔러댔다.
이미 눈이 덕지덕지 붙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장화를 끙끙 눈밭에서 뽑아내며 겨우 마을 언저리에 도착했다. 집기가 널부러진 오두막과 부서진 분수대, 피가 눌러붙은 흙더미. 정적과 고요만 흐르는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었다. 북부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불과했던 마을은 얼추 짐작해 스무 가구가 근근이 살아가던 지역이었다. 그런 마을에 거대한 마수가 나타났더란다. 대부분이 죽어버렸고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전부 짐만 급하게 싸서 떠나버렸다고. 이곳에선 흔한 이야기였다. 뭐, 그 덕에 내가 눈치 보지 않고 살게 됐지만. 무거워서 대피할 때 미처 챙기지 못한 냄비는 빈 집에 몇 개 있었으니 나름 도움이 됐다. 부족한 건 가끔 뭍에 흘러들어오는 물건을 끌어 올려 생필품으로 쓰는 게 일상이었고.
그렇지만 슈샤이어를 비롯한 어느 곳이나 그렇듯 고아에게 있어 삶이란 그리 안락한 것은 아니었다. 어른의 보호라는 어떤 울타리도 없었으며 아프다면 아픈 대로 혼자서 살아가야 했다.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나뭇가지를 새까맣게 탄 숯 옆에 얹어놓고 주변을 주억거렸다. 저번에 강에서 구한 물이 있을 텐데. 얼음을 깨고 겨우 떠 와 펄펄 끓여놓았던 양동이엔 어느덧 살얼음이 다시 껴있었다. 또 끓여놓아야겠다. 얼음장 같은 물을 조심스럽게 한 손에 떠올려 상처를 씻었다. 혹시라도 체온이 내려갈까, 조심스럽게 씻어내는데도 시린 한기가 올라와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얼른 옷자락을 끌어내려 차가워진 살결을 덮었다. 작아진 불씨에 마른 가지를 넣어 키우고서 그 곁에 앉았다. 타닥타닥, 붉은 화마가 굳은 얼굴을 녹인다. 한숨을 내쉬는 것도 이젠 습관이었다.
“이제 빵가루도 떨어져 가는데.”
추위가 심해질수록 걱정거리는 늘어갔다. 동물은 사라지고 맹수는 포악해진다. 이곳을 덮친 마수의 횡포처럼 또다시 재앙이 마을을 덮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눈치 없게도 주린 배는 뱃가죽을 박박 긁으며 고을 울렸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안 먹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하지만 식량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버티는 게 나름 살기 위해 스스로 내건 조건이었다. 입술을 꾹 닫고 혹시 모를 불평을 삼켰다. 불평한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 힘들어지니만 할 뿐. 오늘의 마지막 일과는 절벽 아래 뭍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만 하고, 배를 채우자.
그곳엔 가끔이지만, 생필품이 파도에 쏠려 들어오곤 했다. 그 덕을 받아 지금까지 쓰고 있는 물건도 여럿이었다. 갈퀴, 물통, 주걱… 하여튼 연관성이라곤 하나 없는 각색의 물건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미끄러운 얼음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곧장 뭍이 나왔다. 익숙한 전경이었다. 푸른 빛깔의 바다와 여전히 흰 눈이 쌓인 모래사장. 그리고, 그리고….
“사람……?”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혔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긴 했지만, 하도 조용하게 엎어져 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헛것일까, 얼른 뛰어가 그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 바지 등을 더듬더듬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안타깝지만 슈샤이어에서 시체를 보는 일이란 신발코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많았다. 널린 게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시체 밭인 이 북부 땅에서 중요한 건 황금, 즉 돈이었다. 이 시체엔 미안하지만 하필이면 이딴 쓰레기 같은 북부 땅에 흘러들어와서 안 됐다는 마음만 언뜻 들 뿐이었다. 하다못해 조금만 남쪽으로 흘러갔다면 어떤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장례라도 치러줬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리저리 손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뭉툭하고 큰 물건 하나가 손에 잡혔다. 꽤 단단한 것이 철제라면 단연코 일주일치 식량 걱정은 해치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어떤 간덩이 부은 새끼가 사람 물건에 손을 대….”
입에 바닷물을 잔뜩 먹어선. 쿨럭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시체가 제 손을 덥석 잡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몰골로 보면 다 죽어가는 사람인데. 손목을 잡아챈 힘만큼은 장정 셋은 날려버릴 만큼 억셌다. 시체가 말을 하는 상황엔 익숙하지 않던 터라. 놀란 토끼 눈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문. 요즘 죽은 망자가 사람을 뜯어먹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일어난다는데. 리겐스 마을에 장작을 팔러 가서 들은 소문이었다. 실제로 마을 바깥에서부터 피부가 뜯긴 채 실려오는 이도 적지 않았다. 얼굴이 핼쑥한 낯빛으로 물들고,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던 스패너를 들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근데 뭔 도적 손이 이렇게 작…, 씨, 발….”
뭔가 쓰러지면서 욕설을 내뱉은 것 같기도 하다. 손목을 부여잡던 힘이 빠르게 사라지자 그를 밀치곤 빠져나왔다. 몇 번의 큰 숨을 삼키고 공황의 공황을 달리던 머리가 점차 가라앉자 그제야 눈앞이 조금씩 분간되기 시작했다. 방금 말했지. 말… 한 거지. 어정쩡한 자세로 쓰러진 그의 머리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툭툭 건드렸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로 쓰러진 듯했다. …그럼 내가 죽인 건가? 아무리 시체에 익숙하고 죽음에 둔한 지역이라 해도 살인은 용서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심지어 포악한 영주, 바에단의 눈에 띌 땐 이걸 빌미로 이번에야말로 노예 각서를 쓰게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안 돼. 내가 어떻게 도망쳤는데. 머릿속의 종이 댕댕 울리며 어떻게 시체를 유기해야 잘 유기한 건지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다시 바다로 떠밀어버리기엔 이 절벽만 흐르고 흐르면 ‘얼어붙은 바다’ 항구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이런저런 결과를 도출한 결과, 일단 제 집까지 끌고 가야겠다는 결론이 났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체력만 온존하는 몸으론 부축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끙끙거리며 겨우 둘러업자 등 뒤로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딘가의 기사나 혹은 그에 준하는 훈련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못된 상황이란 것이다. 앞날이 캄캄해졌다. 이건 이 사람이 눈을 떠도 문제고 안 떠도 문제다. 바닥에 끌리는 그의 신발이 신경 쓰였지만 챙겨줄 여력은 못 됐다. 집에 도착하자 불씨가 사그라지기 시작한 화롯불 옆에 그를 눕히곤 짐짓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잔가지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따스하게만 느껴졌던 불씨가 따끔거렸다.
갑자기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나타난 남자는 제 조용하던 삶을 비웃듯 뒤흔든 것도 모자라 산사태까지 내버렸다. 그것도 눈발에 불리고 또 불린 최악의 형태로. 하아, 또다시 습관 같은 한숨이 터졌다.
남자가 깨어나기 전까지 하던 일을 끝내야 했다. 원래는 쉴 예정이었지만 어느덧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이 멎은 탓이었다. 사내 한 명을 절벽 위까지 끌고 올라와 체력이 닳았지만, 날씨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부들거리는 몸으로 일어나 시작한 일은 숯을 만드는 것이었다. 고작 어리기만 한 몸으로도 할 수 있는 돈벌이 수단이었다. 그마저 팔리지 않으면 쫄쫄 굶을 수밖에. 딱딱하게 굳은 땅을 삽으로 파내 나무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웠다. 이따금 따스한 열기에 시린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기도 했다. 바람이 옅은 날에 해야 차곡차곡 저장할 수 있었으니, 오늘은 그 기회였다. 여러 구덩이를 파고 숯을 만들어 놓았기에 한 번 빙 둘러보며 다 만들어진 구덩이는 꼬챙이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품에 천으로 감싼 숯이 점점 많아질 무렵 바람이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센데. 칼날처럼 뺨을 스치기 시작하는 바람결에 읏, 소리를 내며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웅크렸다. 이럴 때면 작은 체구가 원망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날아가기에 십상이니까.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뭇가지가 위협하듯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시끄러워. 품에 꼭 껴안은 숯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온기로 세찬 바람을 버텼다.
하지만 일이 그리 쉽게 풀리는 법은 없었다. 어느 때나, 항상 척박했다. 삶에 미움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마을을 한 번에 휩쓸었다는 마수는 아니었지만 내리 굶어 뱃가죽이 홀쭉해진 늑대가 바로 눈앞에서 불을 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마수에 버금갔다. 등 뒤는 커다란 나무에 바람은 세고 바닥은 눈밭. 그리고 제 앞엔 갈비뼈가 훤한 흰 늑대가 입에 고인 침도 가누지 못한 채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으…….”
당황하고 절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이, 늑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벌려 달려들었고 가까스로 바닥을 기듯 공격을 피했다. 순전한 요행이었다. 늑대는 단단한 나무에 얼굴을 박자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느려진 게 보였지만 그런 걸 가늠할 여유는 없었다. 품에 안고 있던 숯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바로 등을 돌려 뛰었다. 제 뒤에서 뒤따라오는 맹목적인 식욕이 금방이라도 제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아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곧장 뛰었다. 다리를 움직이는 게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집까지만 들어간다면 바로 문을 닫고 버틸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뛰고 뛰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눈밭이 문제였다. 항상 제 발을 늪지대처럼 붙잡고 끌어내리던 눈밭은 이번에도 다름없이 발목을 잡았다. 더러운 바닥에 몸이 쓸리고, 제 앞에서 우위를 점한 늑대가 마치 승리의 웃음을 짓듯 목 울림을 냈다. 슈샤이어, 이 북부 땅 자체가 저주처럼 느껴졌다. 시리우스라니, 빙결의 신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내게 이 모든 건 저주의 시작이었으며 원망의 시초였다. 어렸을 적, 이야기 속에서나 들었던 녹색 지대가 펼쳐진 땅에서 태어났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흰 늑대의 침방울이 뺨 위를 그을렸다. 눈을 감으려는 찰나.
“야, 꼬질이. 여기 항구가 어디야.”
제 심정과는 달리 아주 한산하고도 무료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곧이어 타앙, 하는 굉음과 함께 늑대가 옆으로 쓰러졌다. 부산스럽게 흩어진 핏방울이 옷 위로 스며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입만 벌리고 있자 그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려왔다. 눈밭을 저벅저벅 밟는 발소리도.
“안 들려? 항구 어디냐니까. 척 보니 슈샤이어란 건 알겠는데, 이렇게 깊은 숲까진 처음이라.”
고개를 올리자 그곳엔 뭍에서 주워왔던 남자가 춥지도 않은지 겉옷만 대충 껴입은 채 한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총신에 금박을 입힌… 상당히 비싸 보이는 권총이었다. ……가만. 아까 내가 만지려고 했던 게 저건가? 방아쇠에 한 손가락을 건 채 빙빙 돌리고 있던 남자는 터벅터벅 걸어와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날 고작 한 손으로 눈밭에서 꺼냈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한 남자는 단지 눈만 떴을 뿐인데 기절해서 쓰러져있을 때의 분위기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미남자였다. 은발에 푸른 빛이 도는 눈을 가진, 퍽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30대 초반의 사내. 그냥 기절해 있었을 땐 웬 흰머리 시체인가 했는데.
“…얼어붙은 바다 항구는 서쪽으로 걸어가야 해요. 리겐스 마을을 거쳐서.”
“거긴 또 어디래. 하여튼 서쪽? 좋아, 고맙다. 달리 줄 만한 건 없고, 거기 늑대 고기나 해 먹어.”
제 머리를 톡톡 건드리곤 휘파람까지 불며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난 삶이 되돌아볼 정도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는데 그에겐 고기 하나 만드는 시간에 불과했다니. 자신과는 완벽히 다른 생을 가진 사람이란 느낌이 들어 씁쓸했지만 나름 그를 구해준 목숨 값이라 치부하기로 했다. 숯 대신 늑대 고기를 얻었으니 가죽과 살코기를 도축해서 마을에 팔면 값은 후하리라. 비록 빼빼 마른 덩치였지만 그래도 늑대라고, 무게가 남달랐다. 오늘 참 힘쓰는 노동 많이 하는구나. 놓쳐버렸던 숯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눈앞의 늑대를 보고 있자니 그런 마음도 쑥 내려가 버렸다. 이 근처는 나밖에 안 사니까. 나중에 가져와도 늦지 않는다. 그때까지 이 지독한 눈밭에 파묻히지만 않는다면.
늑대의 목덜미 털을 어떻게든 잡고 낑낑거리며 집까지 끌고 와 마당에 눕히자 그때서 피비린내가 훅 풍겼다. 그냥 두면 피 냄새를 맡고 맹수들이 꼬일 테니 얼른 도축해야 했다. 하지만 토끼나 여우만 겨우 도축해봤던 내게 갑작스러운 늑대 도축은 험난한 여정이나 다름없었다. 늑대 주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어찌어찌 날붙이를 들었지만. 몇 번 칼질을 해보니 실력도 실력이고, 힘 자체가 부족했다. 칼을 툭 떨어뜨리며 피 묻은 손바닥을 눈에 쓸었다. 이렇게 질을 해칠 바엔 차라리 기술자와 돈을 나눠 가지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가져도 쓸모가 없다니. 그나마 살덩이를 떼어 고기 수프라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내가 먹을 고기라면 질이야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살덩이만 떼어내고 남은 부위는 따로 모아놓았다. 아까운 마음이 몰아쳤지만, 추후의 안전을 위해 짚단을 덮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요즘 짚단 구하기도 힘든데. 우연히 얻은 요정 버섯 하나에 호들갑을 떨며 짚단 묶음 서너 개를 품에 안겨준 상인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아직 몇 포기가 집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풀어헤친 짚단을 내심 아까운 눈으로 몇 번인가 돌아보다 으슬으슬해진 추위를 피해 집 안으로 홀랑 들어갔다.
얼마만에 먹는 고기인지 몰랐다. 운 좋으면 겨울 토끼를 잡아다 먹곤 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었다. 고기가 둥둥 떠다니는 묽은 수프가 보글보글 방울을 내뿜으며 얼굴을 덥혔다. 고기 속에서 배어 나온 기름기가 퍽 먹음직해 보였다. 이 빠진 그릇에 국자로 수프를 뜨고 입안에 넣으려는 찰나,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도 지랄 맞다. 이런 가장자리 유령 마을에 누가 온다고 문을 이렇게 두드리나 싶었다.
“꼬질이, 안에 있지! 그, 내가 옷을 좀… 놓고 가서 그래!”
자칭 눈칫밥 3년이었다. 폭군 같은 바에단의 아래에서 3년이나 살아남은 눈치는 가히 재빠르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저 변명도 못 하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사내는, 필시 옷가지란 목적 때문에 온 게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제 목숨 빚진 게 무어라고. 모르는 척 문을 열어주며 눈가를 게슴츠레 떴다.
“옷?”
“…… 옷.”
주변을 대강 훑어보니 여전히 축축한 옷가지가 집 모퉁이에 흐지부지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집어 그에게 건네주고 문을 닫으려 하자 빠른 손놀림이 문턱을 잡았다. 이럴 줄 알았어. 늘 타인에게 그랬듯 무시와 냉대로 일갈할 생각이었으므로 무시하고 마저 문을 닫으려 하자 무슨 힘이 이런지. 바위를 미는 게 쉬울 만큼 문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졌다. 그 덕분에 얻은 고기였지만 눈앞에 두고 먹지 못하는 지금, 날카로운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날 선 눈빛이 그를 쏘았다.
“…… 사실, …잃어버렸어.”
“옷을?”
“…지갑을.”
……. 그래서 어쩌라고. 듣자마자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대답을 겨우 씹어 삼켰다. 제 속은 이미 저 냄비 속의 수프처럼 부글거리다 못해 짜게 식어가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듯 입술만 옴질거리던 남자는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혼자 열이 올라 이런 저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 베른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한파에 난파됐다느니 자신은 원래 케나인이라 아르데타인으로 돌아가면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 보답하겠다느니. 극지방에서 자라나고 제 안위에만 급급하며 살아온 탓에 슈샤이어를 제외한 다른 대륙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가끔 바에단이 루테란이나 애니츠에서 질 좋은 노예를 구했다는 자랑만이 자신이 듣던 지식 전부였다. 그중에는 아르데타인이란 지역도 있었는데, 케나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단지 방금 변명 어린 이야기로 ‘슈샤이어인’ 같은 느낌이라 대충 알아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잠시만, 아주 잠시만 머물게…. 응? 여기 숲이 어지러워서 길도 모르겠고 나침반도 잃어버렸고 정기선도 못 탄단 말이야. 여기, 이 장치 보이지? 이거 고쳐서 신호만 보내면 아르데타인에서 구조선을 보내줄 테니까, 그때 보상도 많이 줄게. 얼마 안 걸릴걸!”
그는 능력도 있어 보였고 밥값만 충실하게 해준다면 같이 지내는 건 상관없었다. 어린애 혼자서 살아가는 게 더 험한 세상이니 마다할 리가. …하지만 그는 모르는 점이 하나 있었다. 난 얼마 전까지 바에단의 하인 노릇을 했지만 그건 명령받은 그대로 따르는 일이었다. 타인을 만나 내 의지로 이야기하는 건 아주 어색했으며 동시에 탐탁지 않았다. 즉, 타인을 대하는 것 자체가 어렵단 뜻이었다. 난 신경 쓰지 않겠지만, 상대만 불편해할 상황이 눈에 훤했다.
…그건 그때 가서 정하면 될 일이고. 문을 끼익 움직여 안쪽으로 열어주자 비 맞은 강아지 같던 처연한 표정이 금세 활짝 펴졌다. 그냥 보면 영락없이 차가운 인상인데 하는 짓은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수북하게 쌓인 머리 위 눈덩이를 털어낸 그는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일어난 곳인데 살펴보지도 않고 나왔던 거구나, 싶었다.
“빨래는 윗줄 써요. 전 키 때문에 아랫줄 써야 하니까. 살림이 어려워서 일도 같이 해줘야 해요. 밥 먹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일 끝나면 먹는 편이니까 그렇게 알아두시면 되고. 기술 같은 거 있어요?”
우수수 쏟아지는 제 지침에도 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경청했다. 그러다 문득 제 안내에 물음표가 달리자 엉뚱한 표정을 짓다가 아, 하며 씩 웃었다. 케나인 하면 요리지! 라며 호언장담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이거 감이 안 좋은데. 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알약 같은 걸 짜잔, 하며 꺼내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영양 만점 케나인표 특식 완성!”
먹어볼래? 제 의사는 듣지도 않고 노릇노릇하게 김 오르기 시작한 수프 냄비 안에 퐁당 떨어뜨린다. 자신도 처음 보는 터라 제지할 틈도 없었고 뭘 알지도 못하니 막지 않았지만, 수프의 색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쭈뼛거리던 불안감이 이번엔 뿔이라도 단 듯 가슴을 쿡쿡 찔러댄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눈으로만 훑고 있을 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는 얼굴을 보자니 맛은 믿을 만한 모양이었다.
“…먹어볼게요.”
숟가락으로 국을 떴는데. …주르륵. 그 맑던 국물이 왜 젤리처럼 진득해졌는지 모르겠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채 바들바들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고기 같은 게 씹히는 것 같기도 하고. 젤리가 뭉텅뭉텅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맛은 쓰고 떫고 달다가도 매워지고 마지막은 톡 쏘기까지 한다. 읍, 한 손으로 입을 막곤 바깥으로 나가 에퉤퉤 뱉어버렸다. 이걸 저 인간은 맛있게 먹는단 말이야? 언제 안에서 나왔는지 괜찮냐며 등을 토닥거리는 그에게 난생 처음 눈꼬리가 아플 정도로 눈시울을 치켜세웠다.
“요리, 절대 금지야. 냄비에 손이라도 댔다간 다시 뭍으로 떨어트려 버릴 줄 알아.”
결국 그날 늑대 고기 수프는 비린 잡내도 참고 삼키던 제 입에서 빛도 발하지 못하고 환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남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괴이한 색상의 수프를 전부 해치웠다. 역시 음식은 영양 가성비가 맞다야 한다며.
첫 만남은 피차 거지꼴, 소금물에 푹 젖어 구리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함께 지내게 된 뒤로 알게 된 점은 그는 퍽 능력 있는 사냥꾼이란 것이었다. 어떻게 얼어 죽을 것 같은 이 한파 속에서 나갔다 하면 한 마리씩은 손에 쥐어오는지. 별로 찾지 못했다, 미안하다 하면서도 들고 오는 건 살이 포동포동한 토끼였다. 처음은 쫓겨날까 두려운 마음에 가까운 마을에서 훔쳐오나 싶었는데 뒤를 잡아 쫓아가 보니 또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능숙하리만치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조그만 날붙이를 던져 토끼 머리를 관통시키는 게 아닌가. 그 후, 바로 들키고 말았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기하지? 라며 큰 나무 뒤에 숨어있던 내게 자연스레 말을 건넨 걸 보면. 지금 생각하면 특출나다 못해 굉장한 실력이었는데 그땐 그의 고향에선 알아주는 실력자인가보다, 하고 생각을 거뒀었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에겐 어린아이의 소소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에겐 알게 모르게 힘 쓰는 일 대부분을 맡겼다. 난 마을 장사와 살림 쪽에 비중을 두기로 했다.
여우와 토끼 가죽쯤은 능숙하게 도축할 수 있었기에 살코기와 가죽은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물건을 사고 식사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삶의 질이 바뀌는 동안 그와 나의 관계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제 예상과 달리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문 앞에서 열연하던 모습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수다쟁이처럼 보였는데, 그 이후 일이 끝나고 식사를 챙긴 다음엔 구석에 틀어박혀 이상한 기계를 만지는 게 이 갑작스러운 동거 전부였다. 함께 살지만 온전한 타인.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묘한 관계. 그래서인지 나 또한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다. 내겐 이런 관계가 더 편했고 가벼웠다. 하지만 가벼운 관계도 한계가 있었다.
“언제까지 당신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잖아요. 없어요? 이름.”
“왜 없어. 버젓이 페란타, 라는 이름이 있는데. 넌 없어?”
“……비비.”
바에단의 노예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바로 노예라는 신분에 갇혀버렸고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어머니와 바로 떨어지게 됐다. 그러니 어떤 이름도 없었다. 야, 너, 잡일꾼. 등등 많은 호칭이 이름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메꿀 하위 직급에 이름을 궁금해할 사람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몰라야 했을 이야기지만 바에단의 악명에 치를 떨던 사용인들이 알게 모르게 숙덕거린 탓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타인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랬구나, 하는. 먼 감상만이 뒤따랐다. 그런 내게 ‘이름’을 준 건 웃기게도 불행의 첫 단추를 낀 바에단이었다. 그에게 있어 노예란 큰돈을 갖다 주는 상품에 불과했다.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드나드는 노예의 이름 따위, 무슨 관심이 있으랴. 이는 곧 숫자놀음으로 이어졌다. 그런 바에단이, 큰 건수를 잡았는지 호기롭게,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떠들어대다 술김에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었다. …고양이한테나 붙일 법한 이름을. 그래서, 바에단의 저택에선 늘 비비라 불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이름도 없으니 어쩔 수 있나.
“……되게, 고양이 같다.”
“닥쳐요.”
성질 나쁜 목소리가 단숨에 으르렁거리며 제 성격을 여실하게 드러냈다. 나름 1인분 역할은 잘해서 있는 예의, 없는 예의 싹 다 긁어모아 대우해줬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 그날 저녁, 그의 수프 그릇에 매운 소스를 넣은 건 작은 복수였다. 그런데 도대체 케나인이란 종족의 미각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그는 맛있게 잘 먹었다며 웃었다. 답지 않은 어벙한 얼굴로 자러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릇에 묻은 수프 방울을 맛보고 한동안 눈물이 안 멈췄더라는 사소한 웃음거리가 밤을 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또 몇 주가 지났다. 겨울만 계속되는 이 척박한 땅에서 계절을 세는 건 무의미한 일 중 하나였다. 손에 꼽지도 못할 시간이 지났고 그와 나의 관계에 진척이란 조금, 아주 조금 말이 트였다는 사실 정도였다. 이 작고 고요하기만 했던 유령 마을에도 규칙이 정해졌다. 첫째, 늦어도 해가 지기 전까진 들어올 것. 둘째, 일이 끝나면 서로에게 참견하지 말 것. 셋째, 수익금은 7대3으로 나눌 것. 배분율이 악덕 사장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는 언젠가 이곳에서 나갈 사람이었고 난 계속해서 살아갈 사람이었기에 서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외에도 사적인 질문은 피하기, 나가기 전에 통보하기 등등 여러 사항이 있었다. 지금까지 생존에만 급급했던 터라. 처음으로 정해본 규칙에 엉성한 게 있을 때마다 그와 함께 고쳐나갔다.
나는 그에게 버섯이나 약초를 구분하는 방법, 나무를 오르는 법 혹은 밧줄을 만드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그는 내게 마테체를 정확하게 던지거나 총을 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벌써 다 배웠다며 호언장담으로 가슴을 팡팡 치더니 다음날 독버섯을 먹고 쓰러져있던 걸 발견한다든가. 나무에 올라가다 잔가지에 얼굴이 한껏 긁혀서 아껴뒀던 약초를 갈아 문질러줬다든가. 나갔다 하면 문제를 한 아름 품고 들어오는 그에게 종일 자리 잡고 잔소리한 적도 있었다.
“아, 그거 뜯지 말라니까. 이파리가 둥근, 이거. 이게 약초예요.”
“다 똑같아 보여….”
“…….”
그에게 한심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자니 붉어진 얼굴로 그가 너도 만만치 않거든, 라며 소리쳤다. 앞으로 곧장 던져야 하는 마테체를 자꾸 아래로 던져서 바닥에 처박아버리는 날이 얼마나 많았느냐며 외치는 그를 뒤로하고 싹 무시했다. 뒤에서 왕왕 짖어대는 소리가 생생했지만 제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지금은 이 모든 게 나쁜 느낌은 아니라. 낯설고도 소소한 일상이 지나간다.
눈발이 예사롭지 않은 날이었다. 지독한 추위가 꽉 동여맨 목도리 안으로 기어코 새어들었다. 하얀 입김이 폴폴 날아 흩어졌고 오랜 직감이 오늘은 움직이지 말라며 빨간 불을 윙윙 울렸다. 괜히 하루 장작을 찾겠다고 나갔다가 조난이라도 당하면 그나 나나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강에서 식기를 씻느라 퉁퉁 부은 손에 더운 김을 불었다. 하룻밤 새에 꽝꽝 얼어버린 강이 복병이었다. 타닥타닥 타는 불 옆에서 몸을 녹이며 저녁 준비로 국자를 휘젓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뒤편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슬슬 저녁 시간도 다 됐고, 태양도 저물어갔다. 들어와야 할 텐데.
“페란타, 얼른 들어오지 않고…….”
말소리가 뚝 끊겼다. 그를 데리러 간 뒷문엔 아무도 없었다. 횅한 자리엔 그가 쓰던 녹슨 도끼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반쯤 팬 장작 또한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었다. 어디 갔지? 의문 모를 눈빛이 주변을 싹 훑어도 그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늑대가 와서 물어가는 게 아니라 늑대 굴로 쳐들어가도 전부 바싹 탄 고기로 만들 실력자니 스스로 이동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 조용히 사라질 리가 없었다.
“페란타?”
그의 이름을 나직이 되부르며 저벅저벅 집 근처를 빙 돌았다. 하지만 그의 얄팍한 그림자 하나 눈에 밟히지 않았다. 갑자기 불쑥 의심이 들었다. 혹시, 아주 혹시. 자신도 모르게 기계를 고쳐서 가버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난 그냥 하던, 대로. 그렇게 살면 되지만. 마음 한 편이 수초가 얽힌 듯 어지럽게 뒤엉킨다. 무언가가 커다란 게 걸리고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허한 속을 문질렀다. 이래서 남과 같이 살기 싫었다. 단지 몇 주 같이 지냈을 뿐인데 빈자리가 쓸쓸하고 황량했다. 익숙해지지 않으려 했지만 처음 느껴본 살가운 관계는 밀어내기 힘든 부류의 것이었다.
“페란…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러보며 흔적을 찾아봤다. 마테체 연습을 했던 공터, 흰 눈이 쌓인 고요한 광장에서부터 마을로 가는 길목, 그를 처음 발견했던 뭍까지. 하지만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어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마침내 숲 속 입구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 눈 위를 적신 몇 방울의 핏자국을. 그 순간, 지금까지의 의심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속을 채운 건 불안과 걱정이었다. 핏방울이 이어진 곳을 쫓자 나무가 수북하게 섞여 어둑한 그림자만 만들고 있는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엔 마수가 짓밟고 들어간 숲이라 들어 얼씬도 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없는 듯 생활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에게 주의를 시켰어야 했는데. 후회는 언제나 뒤늦은 법이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실력가라 하더라도 동물에 불과한 맹수와 어둠에서 태어난 마수는 격이 달랐다. 모험가 길드에서 이름난 모험가 여러 명을 모아 겨우 물리칠 만큼 그 존재란 압도적이었다.
페란타, 페란타! 어떤 일에도 발길을 들이지 않았던 숲속으로 달려들 듯 뛰어들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더 깊숙하게 들어가기 전에 멈춰야 했다. 어서 데리고 나와야 해.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점철된 머릿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가시를 세운 잔가지가 손등을 긁었고 무른 피부가 금세 긁히고 까져 핏방울을 몽글거렸다. 햇살에 반짝거리던 은발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비비?”
그의 이름을 목이 터지도록 몇 번이나 불렀을까. 제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그는 한 손에 핏방울을 뚝뚝 흘리는 여우를 잡은 채 멀뚱멀뚱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숲속 입구에 있던 건 저 여우의 피였나 보다. 한순간의 긴장이 탁 풀리며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굉장한 실력자니까. 그가 피를 흘릴만한 일은 마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마수에게 끌려가서 잡아먹힌 건 아닌지, 겨우 도망쳐서 피를 흘리며 길이라도 잃은 게 아닌지. 온통 걱정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고이 맑아진다.
“…간다면, 간다고 통보라도 하자는 규칙은 어디로 갔어요.”
“아, 아니. 그러면 바로 눈앞에서 놓칠 것 같아서. 가까운 숲이고, 음, 어제 사냥감을 못 찾았으니까. 그래서…, ……미안해.”
순순히 미안하다며 고개를 푹 수그리는 그에게 더는 화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화를 내기에도 지쳤다는 말이 더 들어맞았다. 여기서 얼른 나가자며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고 집에 도착해서야 왜 그 숲이 위험하고 자신이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끄덕거렸지만 이어 마수도 자신에겐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며 외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한주먹에 때려버렸다.
그는 본연의 일도 열심히 했지만, 최근엔 첫날 내게 보여줬던 작은 기계가 아닌 새로운 기계 발명에 온갖 신경을 쏟아붓는 듯했다. 배분한 수익금 대부분을 리겐스 마을에서 부품을 사오는 데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취미인가 싶어서 그냥 놔두고 있었는데, 장작을 줍고 있는 내게 와서 자꾸 자랑했다. 저번에는 원격 조종이란 걸로 덫을 작동시키는 기계였고 이번에는 웬 날개 달린 고체를 가지고 왔다.
“비비! 드론 만들었는데 봐볼래?”
“드론인지 드릴인지 모르겠고 바쁘니까 장난감은 뭍으로 가져가서 노세요.”
시무룩한 표정이 된 그는 장난감 아닌데… 혼자 속살거리며 터덜터덜 기계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드론이란 것에 발까지 만들어서 가져왔다. 연신 조잘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노동요 삼아 장작을 줍고 다녔다. 그와 함께 지내며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말수가 없는 줄 알았더니, 몰입하면 입을 닫는 유형이었을 줄이야. 그러다 주변에 동물이 나타나면 그날은 고기 파티였다. 이젠 늑대도 나름 손질할 수 있게 됐으니 좋은 일이었다. 질이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얻는 수익금도 늘었고 생활에 여유가 생겨 쓸만한 가구도 들여놓았다. 먼지가 가득한 이불은 버리고 보송보송한 솜이 들어간 겨울 이불과 그의 온갖 무기를 보관하는 수납장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폭탄이며 표창이며 그리 많은지.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된 지금, 알 수 없는 용도의 무기에 대해 의심보다 질린 기분이 먼저 들었다.
“뭔가 부족하다 했는데 거울이 없네.”
수납장을 가볍게 들고 온 그는 집안을 쓱 돌아보더니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순간 움찔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가 아끼던 노예, 제 어머니는 온전한 인간이셨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소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남들과는 다른 눈동자 때문에 다르구나, 싶었을 뿐이었다. 왼쪽 눈은 밝은 자색 눈동자로 단지 조금 색이 묽을 뿐인 눈동자였지만 오른쪽 눈은 새까만 안구에 악마 같은 동공을 가진, 금색 홍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데런이겠거니 누군가는 기형이겠거니. 나보다 더 내게 관심이 많은 이들 중 하나는 단연 ‘나’라는 노예를 소유한 바에단이었다. 용역 노예들과는 값이 다르다며 저택에 가두고 가두다 3년이란 세월을 훌쩍 보내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저택의 세세한 길을 다 외우고 나선 바로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이 유령 마을이었다. 이후, 이목을 끌지 않으려 일부러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번에 얼굴에 약 발라야 하는데 너 없어서 막 바르다 입으로 먹었던 거 기억 안 나?”
“그건 페란타가 바보니까.”
혀를 베, 내보이고 무시하자 또 길길이 날뛰는 페란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정확히는 그 상황을 무마하고 싶었다. 아직은 제 얼굴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 마음도 모르고 제 어깨를 잡고 흐늘거리며 거울 사자, 사자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보면 자기가 잘생긴 것쯤은 알고 있는 듯했다. 상당한 자부심도 함께.
“머리도 잘라야 하고.”
“미용 값을 줄게요.”
“약도 발라야 하고.”
“내가 발라주면 되잖아요.”
“…내 얼굴도 봐야 하고!”
“강 수면도 잘 비춰요.”
거의 철옹성에 가까운 답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렇게도 거울이 필요할까. 그를 만나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까지 졸라본 적은 없었다. 거울만 아니었다면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듯 들어줬을 텐데. 그걸 생각하자 하필 조른 가구가 거울이라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는 내가 계속해서 반대하자 이번엔 이유가 궁금했는지 기어코 내 주변을 돌아다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멍한 얼굴이 꼭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강아지를 연상시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까 항상 얼굴 가리고 있네. 처음엔 잘 못 씻어서 그렇겠구나 싶었는데.”
“콤플렉스라서요.”
“흐음.”
점점 그의 시선이 제 앞머리 안쪽을 향하는 게 느껴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유독 눈가가 짙고 눈꼬리도 길게 빼어난 편이라 그런지 집요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왜 이래, 자꾸. 미처 내뱉지 못한 목소리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난 괜찮아 보이는데. 눈 때문에 그래?”
“……알고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바람결에도 흔들리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런데 난 분명 콤플렉스라고 말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제 말을 한 귀로 흘린 건지. 가자미눈이 돼선 그를 징하단 듯이 보고 있자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뒤늦게 두 손을 위로 올리며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도리질까지 한다. 그 본새가 웃겨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눈 때문에 그래요. 흔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진 않잖아요. 이게 뭐라고.”
“아마 데런…….”
“혹은 악마겠죠.”
그가 조심스러워하는 게 뻔히 보여 잇지 못하는 뒷말을 담담히 이어줬다. 이 짧은 생 동안 질리도록 들어온 말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최근, 화염의 악마가 나타나 슈샤이어 일대를 위협했다는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사람들의 경계는 한층 날카로운 촉을 세웠다. 이런 시기에 제 콤플렉스를 들킨다면, 조심해야 할 정도의 문제로 끝나진 않으리라. 악마로 몰려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머리가 좀 크고 바에단의 눈을 피해 찾아간 그녀는 이미 옛날옛적에 어딘가로 팔려간 뒤였다. 아주 멀고 먼 지역이라 얼핏 들은 듯했다. 아버지는 왜 어머니를 혼자 뒀을까. 정말 데런, 혹은 악마라서. 그들에게 인간은 한순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아서? 이젠 알 수 없는 과거였고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심심한 술안주로나 제격이겠지. 모르는 게 나은 현실도 있는 법이었다.
“…다음엔 안대라도 사야겠네요.”
“응, 검은색으로. 디자인은 내가 추천해줄게.”
“싫어요.”
“케나인의 미적 감각을 무시하다니, 크라테르께 벌 받는다.”
신 안 믿는다면서요. 진화는 우리의 긍지라니 뭐니 하면서 툭하면 크라테르라는 신을 찾는다. 신성 왕국 세이크리아가 울 정도로 신앙 바보가 틀림없었다. 제가 콕 꼬집자 그는 입술을 오리마냥 삐죽 내밀었다. 그 도톰한 입술을 제 손으로 잡아 늘이자 아야, 엄살을 부리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팔다리를 대자로 벌려 누운 꼴이 항의라도 하는 듯했다.
“혹시나 말하는데. 난 악마의 자식이라느니 저주라느니 안 믿어. 눈에 보이는 걸 믿지.”
“존재하잖아요. 악마. 저주. 마법이나 정령도.”
“아, 아니, 존재하긴 하는데 그, 뭐냐. 미신 같은 거. 까마귀가 불행을 몰고 온다는 그런 이야기?”
그가 하는 말의 속뜻은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그러면서 선뜻 받아들이긴 어색했다. 그래서 논점을 비스듬히 흘렸다. 낯부끄럽고 쑥스러운, 차갑기만 하던 속이 화하게 변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마주하기가 원래 이렇게 어려웠는지. 괜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신이 그에게 무얼 바라고 있는지 입안이 씁쓸해지도록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는 건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편해졌다. 마치, 이건 마치… 가족처럼.
그는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읏차, 상체를 일으켰다. 어수선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그의 은빛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장렬하게 벌어지던 농성이 끝을 본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포기한 그가 날 배려한 건지도 몰랐다. 그의 알 듯 모를 듯 묘한 배려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다 조그만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요. 거울.”
“응?”
언젠가는 이랬어야 했다. 단지 그 때문에 시일이 앞당겨졌을 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그를 대동하고 마을까지 가서 둔탁한 장식의 거울을 하나 장만했다. 재료가 구하기 쉽지 않은 가구라 가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넉넉해진 살림에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서 부드러운 안감을 덧댄 가죽 안대까지 얻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어디 다쳤느냐며 한번 봐 보자는 아주머니의 호들갑에 괜찮다며 손사래 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랐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벽면엔 동그란 거울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빛을 냈다.
이게 무어라고 그리 결정하기 힘들었을까.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젖어있는 와중, 거울을 안고 뒹굴고 있는 페란타를 저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도 거울을 들여놓으며 힘들인 일 중 하나였다. 이후 그의 손에 이끌리듯 머리칼을 정돈하고 인상이 깔끔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실, 난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바에단에게서 도망친 주제에 한 마을에 안주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며 그건 굉장히 불편한 점이기도 했다. 가끔 살림을 위해 마을까지 나가 장사를 해 오지만 일과를 되돌아보면 그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혹시라도 가까이에 바에단의 마차가 가까워진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빠르게 줄행랑치는 게 일상이었고 빠른 몸은 생존율을 높여주는 데 한 몫 거들었다. 마을 주민들도 제 행동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 바에단의 심부름꾼이라도 마을에 들릴 때면 제게 먼저 귓속말로 알려주곤 했다.
요즘은 페란타의 드론이란 것이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짐을 나르고 보수를 받아오기에 적절했다. 그의 기계가 제 삶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슬슬 이쯤이면 의아하기도 했다. 결국, 그 궁금증이 터진 건 오래지 않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홧홧한 열을 내뿜는 냄비에 달곰한 향이 풍겼다.
“페란타. 처음 그 작은 기계. 아직 못 고친 거예요?”
“으, 응? 아, 그, 그렇지? 작은 기계가 더 어려운 법…이거든.”
그는 예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얼굴에 다 티 나는 성격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말을 더듬거나 어색하게 답을 회피하거나.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만 아마 한다면, 아주 심하게 티가 나리라. 바로 지금처럼. 그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 건진 모른다. 다만 저 반응이라면 이미 그 작은 기계는 고치고도 남았다는 소리다. 혹시 자신과 정이 들었다든가, 그런 이야기는 사치라며 슬그머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거짓말이 들켰다는 걸 깨달은 그는 한동안 입술을 지그시 꾹 깨물고 있다가 조금씩 말문을 텄다. 그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는, 제 예상과 같았고 또 다르기도 했다.
“…내가 없어도 네가 잘살아야지. 내가 할 역할, 내가 했던 역할. 그걸 대신할 기계를 만들고 있었어.”
“……드론, 원격 함정. 그런 것들 전부?”
“…응.”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언제부터 저 작은 기계를 다 수리하고, 이곳에서 그런 기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단 말인가. 그건 그와 함께 한 몇 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이었으므로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관계에 진척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부터 날 위해 여러 기계를 고안하고 설계하고 만들어내고 있었다. 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목구멍을 얼얼하게 붙잡는다.
“왜?”
“걱정됐으니까. 이런 험난한 곳에 어린아이 혼자 살고 있잖아. 처음에는 부모님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렇게 성큼성큼 목숨만 구해주고 떠났구나. 조금씩 맞춰지는 과거의 조각과 일면이 저 너머에서 빛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조용히 그가 하는 이야길 듣고 있자 제 눈치를 보던 페란타가 조금씩 이야기를 더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냥 은혜 갚기쯤이라고 생각했어. 당장 수익이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어려운 살림에도 날 받아들여 줬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둔탁하게 이어졌다. 서로 피차일반으로 입맛이 사라진 건 같았다. 그나 나나 애꿎은 식기만 그릇에 톡톡 건드리며 서로의 눈과 입에 촉을 세운다.
“이것만 만들어주면 되겠지. 여기까지만 만들어주면 좀 편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놓고 떠나기엔 이 넓고 고요한 곳에 혼자 있을 네가 생각나서 쉽게 신호기를 켜지 못했어.”
“…그런 걸 동정이라고 해.”
“이건 걱정이야, 비비.”
무엇이 동정이고 걱정인지 모른다. 남과 서투른 내가 제대로 아는 이해관계란 주종이 전부였는데 이제 와서 뭘 깨달을 수 있겠어. 하지만 세상은 각박하고 참담하며 암담하다는 사실만은 뼈에 아리도록 새겼다. 내가 태어난 이 척박한 땅이 문제였을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노예매매상이었다는 게 문제였을까. 사실 전부 문제였고 애초에 태어난 것도 문제였으니 그냥 죽으라며 낄낄 웃어버리는 게 더 편했다. 두 눈이 느릿하게 감겨든다. 풀린 듯 힘없는 목소리가 흐른다.
“…동정처럼 보였다면 미안해.”
“됐어. 됐어요. 거기까지만 해요.”
더 듣고 있다간 머리가, 마음이 이상해질지도 모른다. 진짜 부모가 멀리 사라져 생사도 알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땐 그저 덤덤했는데. 단지 몇 달 같이 산 그가 날 걱정하며 눈에 밟혀서 못 떠났다는 이야기엔 가슴이 울렁거리며 뜨뜻미지근한 묘한 온도의 감정이 도화지처럼 스며든다. 쿵쿵, 울리는 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얼른 그를 보내야, 보내야만 한다는 일념이 모든 걸 가득 채웠다.
“…가요. 그럼 이제 떠날 때가 된 거잖아요.”
“……가도 돼?”
“얼른 떠나는 게 피차 좋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그러면 헤어짐은 질긴 악연처럼 미련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국이 그대로 든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갔다. 저 또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무른 입술을 짓이겼다. 이게 뭐람. 이게 뭐야. 한참 복잡한 마음이 뒤숭숭하게 섞여 뭔지 알 수도 없게 될 무렵, 바깥에서 기계음이 났다. 처음 듣는 기계음에 삑, 삑 거리는 신호음이 뚝뚝 끊기며 일어난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음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고개를 돌려오던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삐이- 뚝. 신호가 길게 한 번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끊겨도 밖에서 들어오려는 발걸음 소리는 조금도 없었다. 그도 나도 많은 생각이 섞인 탓이겠지. 그가 들어오기 편하도록 일부러 소리를 내 뒷문으로 나갔다. 나나 그나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발견했던 뭍은 본래 쓰다 버린 물건이 가끔 흘러들어오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를 구한 후로 주워서 쓰는 게 아닌, 제대로 살 수 있는 형편이 됐다. 맹수를 만날까 전전긍긍 두려워하던 숲은 그가 한 번 돌아다닐 때마다 풍족한 사냥터로 변모했고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만들어 팔던 숯은 집안용 땔감이 되어 냄비를 뜨뜻하게 밝혔다. 그가 온 이후, 많은 게 바뀌었다. 어떻게 되돌아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없다면, 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날 걱정하며 자신의 빈자리를 메꿀 기계를 만들고 있던 건 순전히 날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수고는 오로지 그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거품이나 진배없었으니까. 그냥 한순간의 꿈이었다 치부해야 할까. 웬 고아가 어느 날 바다에서 뚝 떨어진 케나인 한 명을 만나 정이 뭔지 깨닫고 또 헤어짐의 슬픔을 배운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시간은 가고 어느 이야기에나 결말은 있는 법이었다.
“으, 정리가 안 돼.”
정리하려고 나왔건만 제 마음과는 달리 계속 뒤숭숭해지기만 하자 복작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들이켰다. 얼른 그와의 관계를 호전시키고 싶었다. 떠나보낼 때 보내더라도 기분 좋게 보내야지. 얼어붙은 두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곤 마을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사탕을 좋아했으니까 사탕 두 개라도 사서 돌아갈까, 싶었다.
마을은 웬일로 웅성거리다 못해 쥐 죽은 듯 고요하기까지 했다. 이따금 화염의 악마 때문에 손해 입은 사람들을 추모한다고 하던데, 오늘이 그날인가 싶었다. 그런데 약간… 시기가 이른 것 같기도 하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그나마 사람이 북적였던 광장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지나치는 상인이나 집배원의 표정이 나와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일그러져 불편한 얼굴을 지었다. 오랜 직감이 머릿속을 쾅쾅 두드렸다. 일단 숨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인지 몰라 벽 뒤에 숨어 상황을 살피고 있자 문득 경비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쉬, 쉬 하면서 얼른 도망가라는 눈짓을 했다. 이런. 뒷걸음질치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다 어째서인지 광장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엉망진창으로 무너져있는 남자와 시선이 교차했다. 그 남자는… 가죽을 사주던 무두장이였다. 이따금 작지만 따스한 음식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혈안이 되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울어댔다.
“너, 너어어어! 바에단 님, 저기 있습니다! 저기 있다고요!”
맹렬한 눈빛으로 피눈물이라도 맺힐 듯 노려보는 그를 얼얼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그는 항상 내게 웃어주며 어서 오라고 반겨주던 이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를 발견한 사람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바로 ‘바에단’에게.
뒤늦게 커다란 건물 뒤에서 말을 타고 나온 바에단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거만함과 오만함, 세상의 온갖 권력을 쥔 듯 가소롭다는 코웃음까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제 기억 속의 악마 같은 작자와 똑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바에단’이었다. 공포와 긴장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상황이 파악도 되기 전에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로 뛰었지만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던 그의 하수인들에게 붙잡혀 무릎이 꿇려졌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저벅저벅 돌길을 걸어 다가왔다. 갈색 장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검은 곱슬 머리, 어린애, 보라색과 금색의 오드아이. 이 괴상한 신체 조건으로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용케 숨기고 다녔나 보군. 최근에 안대를 샀다 했나? 도박장에선 카드 하나에 인생이 팔리는데 그까짓 안대 하나에도 팔릴 수 있지, 암.”
“…….”
“현상금이 아니라 내 손으로 잡아서 다행이야. 돈이 굳었어. 아직 어려서 값도 더 칠 수 있으니 그것도 행운이로군.”
검은 머리의 어린애가 안대를 샀다는 이야기가 그에게 흘러간 모양이었다. 역시, 괜한 짓은 하지 않는 거였는데. 늦은 후회가 잇따라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렇게 매우 급한 상황에도 계속해서 그와 말다툼한 일이 떠올랐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어제 사탕이라도 실컷 사줄걸. 그랬다. 바에단이 황금은 자신의 편이라며 낄낄거리는 천박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지금까지 잘 피해 다녔는데, 이 짓도 이제 끝물이었다. 그의 턱짓에 하수인이 제 팔을 꽉 붙잡고 분수대에 제 뒤통수를 짓눌렀다. 자연스럽게 무릎이 바닥에 다시금 꿇려졌다. 단단하게 얼은 바닥에 그대로 부딪힌 무릎이 아팠다.
“이번엔 도망도 못 치게 바로 팔아버려야지, 안 되겠어.”
은혜를 베풀어줬더니 기어오른다며 제압당한 내 앞에서 늘 가지고 다니던 몽둥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의 눈동자가 팔, 다리를 번갈아가며 시선을 굴렸다. 그의 성정을 오랫동안 봐왔던 감각이 위험하다며 솜털을 쭈뼛 세웠다. 그가 몽둥이를 매만지며 입맛을 다실 때면 항상 일어나는 일이 있었다. 그건-.
“경매장 가서 완벽하게 붙여줄 테니까. 참아라.”
노예의 몸을 못 쓰게 만들 때. 경매장에 들어가면 치료사를 고용해 말끔하게 흉터도 남지 않도록 치료하게 하지만 그전까지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란 끔찍했다. 주변에 둥글게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제가 익히 아는 이들이었다. 이불을 팔던 아주머니와 가구를 갈아주던 아저씨. 바에단이 올 때면 소곤소곤 알려주던 경비병 사람들까지.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몽둥이가 들어 올려지고,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처음으로, 몸속을 타고 울렸다.
몇 번의 몽둥이질이 한 부위만 노려 휘둘러졌다. 바에단이 땀방울을 훔치며 핏물 어린 몽둥이를 내려놓았을 땐 여린 발목은 그저 발목이었다는 것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하게 부러져 있었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몸속을 역류하며 피부를 괴사시켰고 비명도 지르지 못해 움찔거리기만 하는 작은 몸을 하수인이 품에 안아 옮겼다.
하수인의 어깨너머로 집을 향해 난 작은 길이 눈에 밟혔다. 아직 인사도 못 했는데. 그것만이 까무룩 쏟아지는 어둠과 짧은 순간에 든 마지막 미련이었다.
바에단의 저택 지하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일어날 수조차 없으니 이전처럼 도망을 치지도 못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끔 철창 안으로 들여보내는 배식으로 기별만 갈 만큼 배를 채우는 것뿐이었다. 팔 하나 겨우 집어넣을 만한 창문으로 어둔 밤 별빛이 들어온다. 항상 보던 밤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멀게 느껴지는지.
“벌써 갔으려나.”
문득 그에게 통보하고 가라며 마수의 숲속에서 잔소리를 하던 날이 생각났다. 그러게. 통보라도 하고 나올 걸 그랬다. 그랬다면 미리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차갑게 식어있는 돌 바닥을 한 번 쓸어보다 몸을 웅크렸다. 이왕 팔린다면 아르데타인이라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물씬 들었다. 페란타를 통해 들은 아르데타인은 굉장히 신기하고 놀라운 곳이었다.
혼자서 움직이는 철판, 바닥을 가득 채운 거대한 시계, 파란 피를 가진 사람들. 상상 속에서 존재할 법한 그런 것들이 실제로 가능한 곳. 굶주린 땅 위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깨달은, 기술의 도시. 어쩌면 내 부족한 상상력에 불과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누가?”
당연히 페란타…. 익숙한 목소리에 대답하려는 순간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여기서 이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내가 드디어 헛소리를 듣게 된 건가. 고개를 홱홱 돌리자 철창 너머로 얄쌍한 인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아니, 어떻게?”
“네가 안 보이길래 마을에 갔더니 비비가요~, 비비가~ 하면서 엄청나게 떠들어대잖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던데.”
한 눈에도 어두운 지하였기에 유일한 달빛이 그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등지고 선 탓에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유로운 목소리와는 달리 톤은 평소보다 낮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한숨을 푹 내쉬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냐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리 아들 구해주러 왔지.”
“뭐? 누구 아들?”
저게 정신이 나갔나. 그래도 이 고단한 하루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심 안심이 가슴에 퍼졌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살갑게 눈웃음 짓는 모습이 미약한 빛 사이로 보였다. 그리고 한 발로 가볍게 철창을 밟더니, 힘주어 밀자 그대로 와장창 무너진다. 미친, 이게 말이 돼? 그가 가진 무시무시한 괴력이나 반응 속도를 봐도 얼추 굉장하겠구나 싶었더니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 저번에 마수의 숲 들어가도 그냥 놔둘 걸 그랬다. 저 정도면 맨손으로 때려잡고도 남을 터였다.
“나 많이 고민했거든.”
“……뭘.”
“널 여기 두는 게 나을지, 데려가는 게 나을지.”
날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발목과 그를 돌아보고 안 된다는 의사를 표하자 눈에 띄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아 들어야 한다는 선택지가 아닌, 제 발목 상태 자체에 대한 분노 같았다. 결국,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그가 단단하게 제 몸을 꽉 안았다. 생각보다 좋은 승차감에 부드러이 그에게 고개를 뉘었다.
“그런데 오늘 이걸 보니까 알겠더라고.”
“데려가려고?”
“응. 너도 케나인 하자.”
어째 나보다 어린 것 같은 대답이 웃겨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 케나인 하자. 평소 같으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핀잔이라도 줬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날 밤 바에단의 저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떻게 깊은 지하감옥까지 뚫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오기까지, 고요와 정적에 휩싸인 저택으로 그러려니, 상상만 더할 뿐이었다. 오늘 이후, 바에단은 아마 길길이 날뛰다 현상금을 걸고 애꿎은 노예에게 화풀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러나저러나 정말 그의 아들이라도 된 듯 품에 조용히 안긴 채 멍하니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꿈 같다, 꿈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꿈이 아니었으면 싶었다.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는 하루가 아니었으면.
피곤함에 절어 잠에 빠져서, 슬그머니 눈을 뜨자 샛별이 밤하늘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구조선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신호기로 부른 구조선이라는 게 저 괴상한 철판을 다닥다닥 붙인 선박 같았다. 문득 의구심이 들어 그를 톡톡 건드렸다.
“발목은 어떡해?”
“보통은 의족을 사용해. 요즘 기술이 좋아서 내 다리나 네 다리나 비슷한 느낌일걸. 하지만 네 경우엔 치료사를 부르는 게….”
“의족이 좋을 것 같아. …그러고 싶어.”
그는 입술을 꾹 다물다 그렇구나, 하고 아무 말 없이 수긍해줬다. 그리고 아르데타인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에 대해 열렬한 토론의 장이 열렸고 난 그 과장 섞인 배려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 대단하네. 그의 대답에 기분 좋은 얼굴로 끄덕거리다 가슴 안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총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첫만남과 달리 굳이 제 손을 제지하지 않았고, 난 금박을 덧댄 고급스러운 총을 제대로 만져볼 수 있었다. 전에는 급한 느낌이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무거웠다.
“도착하면 나도 총 쓰는 법 알려줘.”
“내 핸드건 훔쳐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손 작은 도적 새끼는 간땡이가 작아서 그런 짓 못해요.”
진짜 속 좁네.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게 다 너한테서 비롯된 합당한 의심이라느니 뭐라느니 별 변명이란 변명은 다 늘어놓는다. 시답잖은 농담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쯤 구조선이 그를 발견했던 뭍에 다다랐다. 직접 눈앞에서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어 시선으로 돌아봤다. 특이한 의상을 입은 사람이 페란타의 이름을 확인하고 타시라며 안내했다. 안내인은 내게 시선을 머물렀지만 페란타가 날 꽉 안고 있자 이내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면 새로운 이름도 지어줘. 케나인이잖아, 이제.”
“비비 싫어? 귀여운데.”
“그 새끼가 애완 취급하던 이름이란 말이야.”
덧붙이니 이참에 온세상에 출생 신고도 해버리자고 이를 갈며 벼른다. 마침내 뱃고동이 울리고 푸른 바다로 나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지금까지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새삼 가슴 한편이 저렸다. 떨리는 눈동자가 지독한 한파로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던 동토를 바라본다. 혼자 살 땐 세상 끝까지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테사 어때? 고심 끝에 심플하고 화려한 이름으로 정해봤다.”
“심플하기만 한 것 같은데.”
이게 정말. 한 시간 내내 고민하던 이름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사. 새로운 이름이자 새로운 출신으로 살아가기에 딱 맞는 기분이었다. 시선 끝이 마지막으로 그를 주워왔던 뭍에 잠시 머무르다 배가 나아가는 바다로 돌아간다. 샛별이 햇살을 머금고 새로운 수평선 위에서 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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