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후 여선 殞候 茹善

虎夢 호몽 一

우레와 비바람,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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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叶落无声 - Yu-Peng Chen


짙은 밤, 비명 지르는 잎사귀와 타오르는 강줄기를 내달린다. 코끝을 스치는 연기는 시큼하고 들이켠 목구멍은 매스껍다. 기실 오래도록 맡아온 화마의 잔향이었음에도 유독 속이 따가웠다. 높다란 나무와 줄기가 우거진 산이라서, 그 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친우의 육신이라서일까. 거대한 우레와 컴컴한 먹구름이 뿌리 하나까지 태워버릴 듯이 밤하늘을 드리우는 광경. 가슴을 저릿하게 당겨온 숨을 겨우 삼키고, 마침내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의 근원 앞에 마주서면 어느덧 바다에 구멍 뚫린 듯 새까맣게 죽어버린 대지가 한눈에 들어찬다.

 

“아….”

 

자령, 널 삼킨 대가로 이 산을 지키리라 약조했건만.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던 동공이 치솟는 불길을 따라 위로 오른다. 저멀리 뜬 달무리를 향해, 평생토록 닿지 못할 하늘을 향해. 오랫동안 심장 아래 묻어둔 상념과 꼭 닮은 창공. 그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달을 감싼 용을 향해서.

 


 

“일어나거라.”

 

가시 돋힌 숨을 덜컥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또다시 악몽이다. 불안하게 떨리던 동공이 옆에서 자릴 지키며 깨워주던 이에게 향했다. 조심스럽게 그러쥔 손과 꼭 맞게 껴안은 품. 하얀 비늘 닮은 인상과 단단한 손아귀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차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스라쳐 움켜쥔 손을 내쳤다. 우습게도 다정하게 안아주던 이의 얼굴 위로 맺힌 건, 붉게 타오르던 불씨를 삼키고 하늘을 한가득 메웠던 용이었기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천계의 유일무이한 태위이자 대장군. 그리고 오랜 친우의 묘비를 불태운 자. 비록 전쟁에 휩쓸린 결과였고 그가 과거의 참상을 되풀이할 만큼 잔혹한 이가 아님을 저 또한 알고 있었으나 머리와 달리 한 번 달궈진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미안, 미안해. 조금만.”

“얼마든지.”

 

최근 부쩍 늘어버린 사과. 그는 늘 그랬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쇄골 부근에 이마를 내린 채 가슴을 옥죈 감정과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치 끊어진 실처럼 탈력감으로 점철된 몸뚱이가 몇 번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으나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자령의 위패와 무덤을 잃고 산중 메아리가 울리도록 울었던, 그날의 악몽. 아직까지도 뜨거운 화마의 기운이 뺨을 그을린 듯해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그는 아이라도 대하듯 등 언저리를 부드러이 쓸어주며 연신 괜찮다고, 그 나지막하고 고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정말 괜찮아지는 것만 같아서, 조금씩 잦아드는 떨림을 느끼며 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과거의 악몽이 낮이고 밤이고 뒤따라붙는 그림자처럼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령, 네가 보내는 질타인가. 감히 천계에서, 널 죽이고 네 묘비를 불사른 자와 어울리는 내게 보내는 질타. 우레와 비바람, 꺼지지 않는 불길 속에서 서슬퍼런 눈으로 내려다 보던 이에게 마음을 내어준 죄. 아니, 단지 빛바랜 과거 속 죄책감이 자질구레하게 남아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지독한 상념과 과거의 메아리 속을 가르며 들려온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평이할 뿐이다. 낮은 목소리와 달리 여전히 부드러운 기색으로 등을 쓰다듬는 손길 또한.

 

"이제, 이제 괜찮아."

그의 목덜미 부근에 얹었던 이마를 들어올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고민 어린 표정이 앞을 스쳤다. 그는 나지막한 어조로 이름을 불렀으나 답지 않게 아주 느릿했고 그러면서도 제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몸을 진정시키려는 듯 목덜미를 부드러이 감싼 손길이 턱선을 잘게 문지른다.

“…여선, 낮에 이완이 찾아올 것이다.”

“…그 놈은 왜?”

“아무래도 한 달은 이상이 맞는 듯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는 아주 오래 산 자이니 네 상황에 대해 알 지도 모르겠군.”

 

삼족오 이완. 태양 안에서 산다는 삼족오로서 현재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앉아 빛을 실 꿰어 먹길 즐기는 자였다.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이나 천제한테도 그 지혜를 인정 받아 희희낙락 지내는 신수. 요괴로서 속세에 살 적엔 속세는 햇살 짱짱한 천계와 달리 너무 춥다며 그 잘난 깃털 하나 보여주지 않았더라지. 항상 병든 닭처럼 골골대며 수천 년은 잠으로 보낸다던데, 요새는 영 잠을 자지 않아 기이하다는 평이 도는 자였다. 속세에서 우연히 만났을 적엔 얼마나 재수 없던지…. 아무튼, 그 고매하신 삼족오는 아무리 태위라 불리는 이라 하더라도 속 편한 대가를 요구했을 리 없었다. 그가 정녕 날 돕기 위해 남에게 아쉬운 소릴 했단 건가. 타인에겐 고작 악몽에 불과하여 적당히 넘겨도 모를 일을…. 그때, 침실에서의 대화를 들었는지 잔잔히 묻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퍼뜩 깬 정신에 불쾌감이 섞였다.

 

“기침하셨습니까. 세숫물을 들일까요.”

“… 들어오지 마.”

 

달그락. 문고리를 잡고 대기하던 중에 비죽하게 날선 목소리가 먼저 쏘아졌다. 화들짝 놀란 시종이 소리없이 갈무리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서 여선, 하고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엔 자중하란 의사가 섞여있었다. 그렇지만 쟤네 들어오면 넌 나가잖아. 퍽 칭얼거리는 소릴 내며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그의 온기를 안았다. 한밤의 악몽으로 인해 떨리던 몸은 그의 체온 아래서 가라앉은 지 오래였고 지금은 그저 온기를 내어주는 이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가 별 사족 없이 어르듯 손길을 내리면 그제서야 못내 아쉬운 양 힐긋 보곤 얌전히 놓아준다. 자신이 아니어도 그는 바쁜 이였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들어와라."

그의 명령에 문짝 가까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세숫물을 들이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희게 내려온 머리칼을 단단하게 묶을 장식을 건넨다. 이런 아침 시중은 천계에 올라와 그의 침소에서 지내기 시작하며 매일같이 본 광경이었다. 점차 바깥 사람들이 알고 있는 '태위'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할 즈음, 문득 시종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보통 제 주인은 물론 자신과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들이. 역시나 서둘러 고개를 내린 채 그의 소매를 다듬는 태도가 퍽 알량하다. 그의 몸에 닿는 수많은 손길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베개를 끌어안고 시큰둥하게 턱이나 괴고 있던 차, 어느덧 그의 준비가 끝났다.

"잘 다녀와."

"내가 없더라도 이완은 찾아올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손님 접대 정도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원래 그런 놈이잖아. 얌전히 있을 테니까 얼른 오기나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을 허리에 찬 그가 돌아설 때, 빠뜨린 게 문득 생각이 나 손을 뻗어 옷을 붙들었다. 뒤돌아 본 그의 시선에 의아함이 맺힌 것도 잠시, 이내 알겠다는 양 희미하게 입꼬릴 올린다. ―얼른. 곧 가버릴 그가 내내 아쉬운 듯이 보채는 투로 중얼거렸다. 최근엔 악몽 때문에 꽤 잊어먹기도 했지만 본래 제 일과였던 걸 언제까지고 빠뜨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올리는 힘에 유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벌리면 이내 그의 입맞춤이 이어진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은 채 녹녹하고 말랑한 살덩이의 감촉이 밀려온다. 신음 어린 습기가 오돌토돌한 혀를 감싸며 타액을 흘려보내면, 붉고도 되바라진 열감이 숨결을 죄 긁어먹고 들어와 목구멍 부근까지 데웠다.

"하아…. 조금 더, …응?"

"지난 밤에도 이리 보채지 않았느냐."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렇게나마 닿는 게 겨우라. 매일 서로의 살갗을 탐하고 삼키듯 굴었던 밤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리 보채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퍽 이성적인 소릴 하며 참는 듯했지만. 하여 고작 접문에 불과한 지금이 너무도 애달프기만 했다. …조금만, 응? 그리 조르며 막 입을 뗀 고양이가 그러하듯 닿은 하순을 느리게 물고 핥으며 온기를 찾았다. 그의 차가운 무복이 한 올 걸치지 않은 피부에 닿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서늘함이 기분 좋아서 그만 웃음소리가 흐른다.

희고 긴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묶은 뒷덜미에 팔을 감싸며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의 팔뚝이 침상을 짚으며 더욱 고갤 비틀어 입술을 눌렀다. 발갛고 촉촉하게 물든 입안 깊숙히 살덩이를 밀어넣는 움직임. 이대로 그를 끌어 당겨 침상에 눕히고 안아 달라 속삭이고픈 심정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아랫배까지 저릿하게 울리는 간지러움을 참는 일이란 퍽 익숙한 과정이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남몰래 들썩거린 골반을 점잖은 척 내리누르며 그의 목덜미를 품에서 놓아준다. 짙은 주홍빛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마주하고서 입맞춤을 마무리하듯 그의 입술에 쪽, 하는 소리가 나도록 가벼운 접문을 남긴다. 백운, 그 역시도 마냥 욕구를 내리누르는 게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지막이 신음하며 목울대를 잠갔다. 하지만 어쩌겠나. 오늘은 그 존귀하시다던 천제께서 호명한 날인데.

"다녀와."

"얌전히 기다리도록. …이만 가지."

빈틈 한 부분도 보이지 않는 무복을 입은 주인과 매일 얇은 침의로 그를 배웅하는 이라. 오늘도 시종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 주인의 유희를 함구하기로 한다. 이는 때때로 요괴인 궁기가 어떻게 이리 긴 시간 동안 천계에 머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입 없고 눈 없는 이처럼 침묵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의 일정한 걸음걸이와 뒤따르는 종종걸음 기척까지 멀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이불을 둘러 안았다. 솜을 그득히 채워 넣어 포근하게 감싼 온기와 옷감에 묻어있는 그의 체취에 옥죈 신경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듯했다. 이대로 잠든다면 다시 악몽이겠지. 느른히 눈꺼풀을 내리감았으나 한 번 술렁이기 시작한 감정은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무릇 무형의 기운을 빌어 태어난 요괴에게 꿈이란 불길하거나 길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제를 모방한 꿈이 한 달이나 지속되니 불길할 뿐이지. 저 또한 천계의 신수 만큼은 아니나, 요괴로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지내온 자였음에도 원인을 알 수 없어 어지러울 따름이었다. 베갯잎에 긴 머리칼을 파묻은 채 몸을 웅크리던 찰나. 미미한 온풍과 함께 불어온 기척이 창가에 나붓이 내려앉는다. 온종일 볕을 받아 금빛이 감도는 까만 깃털과 딱 기분 좋을 만큼의 온풍을 몰고 다니는 새. 굳이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온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왜 멀쩡한 문짝 놔두고….”

딱딱. 창살을 부리로 두드리며 문 열라고 독촉하는 모양새가 꼭 재수 없는 천계 것들 꼬라지다. 심지어 아침도 막 밝지 않았나. 이는 손님 예의도 아니요, 환대 준비를 하던 시종들도 기함할 일이렷다. 적당히 모른 척 무시하면 문짝으로 오겠지. 내리감은 눈을 다시금 꾹 눌렀으나, …딱딱딱. 부리로 쪼아대는 소리가 예민한 귓가를 긁어놓았다. …딱딱, …딱딱딱. 마치 열지 않으면 아침이고 밤이고 계속 두드리겠단 듯이 쪼아대는 소리.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가 기어코 머리 끝까지 차올라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들추고 창을 확 열어버리자, 금가루를 흩뿌리는 새가 능글맞게 필요한 만큼만 뒷걸음만 치다 내부로 쏙 들어왔다. 까마귀 눈이 사람처럼 살갑게 휘어지는 꼴이란 참 얄미운 광경이다. 닭이라도 붙잡듯 금가루가 흘러내리는 날개까지 한 손아귀에 통째로 붙들어 든 채 시선을 맞부딪혔다.

“다리가 세 개라면서 매번 문짝도 못 여는 새대가리.”

“거 참. 다리 하나는 두고 왔다고 그리 일렀는데도.”

삼족오란 것이 겨우 두 개만 달린 다리 중 하나를 여유롭게 들어올리며 쯧쯧, 하는 모양새로 부리까지 흔든다. 이윽고 순식간에 발톱부터 깃털, 머리까지 불로 화하여 타오르자 일순간 훅 다가온 열기에 손을 내쳤다. 그렇게 공중으로 타오른 불씨가 바닥에 내려앉아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덧그리기 시작한다. 장작 타는 소리도 없이 그저 불로서 존재하는 이는 고요히 원하는 모양새를 갖춰갔다. 하필 화마에 가까운 악몽이 머릿속에 콕 박혀있던 탓에 그저 뺨을 따뜻하게 데우는 온기에도 은근한 불쾌감이 들었다. 느리게 눈살을 찌푸린 채 침상에 털썩 앉아 얼마나 지켜봤을까. 햇살을 머금은 듯 금빛 불길 속에서 일어난 이가 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여유로이 앉아 새까만 부채를 펼친다. 살랑살랑,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천으로 둘러싼 채 입꼬릴 올리는데, 길게 늘어뜨린 소매 끝자락이 흡사 그의 깃털처럼 금빛 가루를 은은하게 흩뿌렸다.

“도움 주려는 이의 사려 깊은 마음도 몰라주니 섭섭하구만."

"손님 취급을 받고 싶었으면 문으로 들어와야지."

"그건 맞는 말이로군. 헌데, 오랜만인데 반갑진 않으이?”

하늘거리는 검은 천 너머로 가늘게 접히는 눈매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저 능글맞은 영감탱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와 만났던 건 해가 아주 아프게 내리쬐던 산 봉우리에서 그늘 받으며 자고 있던 어느 여름. 웬일로 고매하신 분이 속세까지 마실을 나와 명당 자리를 내놓으라며 이마를 쪼아댔던 날이었다. 결국 그는 귀하다는 꼬리깃 세 개를 뽑히고 나는 이마에 큰 멍을 단 채 산봉우리를 쩍 갈라 선을 긋고 끝났지만. 재수 없는 새끼. 왜 하필 그 산에 온 거람. 다시 생각하니 뻔뻔한 낯짝에 열이 오른다.

“네가 백운한테서 뭐라도 받아 처먹을 것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

"하하, 태위께선 늘 배가 터지지 않을 만큼만 주시지. 걱정 말아. 그는 그대에게 보여주는 모습보다 훨씬 냉하고 칼날 같은 분이라네. 그래서, 내 간단히 듣긴 했네만 무슨 증상이라고?"

그는 역시나 악몽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을 기이하다 꼽으며 기다란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책자와 낡은 두루마리를 뽑아냈는데, 협탁이고 탁자고 구분할 것 없이 산처럼 쌓기 시작했다. 마치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실실 웃으면서 보란 듯이 책 몇 개를 집어 장을 넘기기도 했다. 엄지에 뭉텅이를 걸고 훑어내는 속도가 마치 천리마 달리는 속도보다 빨라 보일 지경이었다. 얼핏 보면 장난질처럼 보이는 몸짓이었으나 그의 속독은 천계나 속세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잠자코 있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 흐음, 흠. 별 같잖은 소릴 내며 수십 개의 책자를 순식간에 훑어 넘기더니 이내 씩 웃는다.

“호령 동자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만.”

“동자…? 난 어린애 잡아먹는 취미는 없어서.”

“인간이 아닐세. 정확히는 어둑시니였던 동자라고 해야겠군.”

아서라는 듯 손을 휘이 내저으며 턱을 괴자 이완은 요점은 다르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둑시니라 함은 퍽 유명세가 있는 요괴였다. 그러니까, 그리 좋은 유명세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새까맣고 형체 없는 것이, 또 겁은 많아서 요괴들 사이에서도 비웃음거리인 놈. 관심을 주면 자라나고 무시하면 끝내 덧없이 사라지는 호롱불 같은 존재. 그리 좋은 평을 듣진 못했으나, 워낙 옛적부터 존재하여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둑시니'라는 이름을 얻은 요괴였다. 그런 요괴가 호령 동자라는 존재로 거듭났었다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어둑시니에 대한 소식이 뚝 끊겼었지.

“호령 동자에게 친우가 한 명 생기며 바뀌었다는군.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준 친우였던 셈이지.”

“그래서 소식이 뚝 끊긴 건가.”

“그래. 예시가 있어서 언급하는 것이네. 어둑시니였던 그는 당시 신수였던 친우와 막역하게 지내며 달밤에 술잔도 기울였다는군. 아주 오랫동안 함께 했어. 한 번은 친우의 도움을 받아 천계로 몰래 올라와 살았다던데, 그간의 죄질이 무겁지 않고 신수를 봐서 천제께서도 적당히 눈 감아주셨단 이야기가 있다네. 하하, 자네의 죄질과는 달리 말일세.”

…이 새, 됐다…. 그래서 그게 내 증상과 무슨 상관인데.”

"자네 또한 비슷한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걸세. 그 호령 동자도 꽤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하니 말이야. 이건 그 '친우'가 쓴 일지인데…. 영 쓸모는 없군."

이완은 중간을 꿰멘 것으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던지듯 건네 받은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기울이고 돌려봤지만 온통 어디서 술을 마셨네, 뱃놀이를 즐겼네 같은 놀음이나 가득 적혀있었다. 이건… 그냥 일기가 아닌가?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이완은 턱으로 추정되는 부위를 쓰다듬으며 골몰한 비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호령 동자, 그가 무언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어떻게 찾는데?"

"나도 모르지? 이 삼족오가 오래 살긴 했다만 천리안은 아니라네."

정녕 저런 새대가리한테 무언가 주기로 약속했단 말이지. 물론 백운, 그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이였으나 그 원인이 자신이라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아마 그는 이 상황도 어느 정도 상정은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장난치냐는 듯 날선 눈매로 쏘아보자 무슨 낯짝을 하고 있는지 모호한 천 너머로 웃음소리가 와하하 터뜨리더니, 마치 뒤를 돌아보란 듯이 턱을 주억거렸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을 것 같나? 그랬다간 태위의 검에 창자가 죄 꼬일 텐데. 퍽 섬뜩한 소릴 웃음 섞어 말한다. 그의 주억임을 따라 옆을 돌아보자, 그곳엔 거의 침실을 꽉 채울 듯이 커다란 새 발톱이 손바닥만 한 책자를 조심스럽게 잡은 채 흔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큰 발톱이 어떤 기척도 없이 제 옆자리를 차지했단 말인가. 흡사 벽에서 튀어나온 듯 까만 공간에서 막 나온 발톱은 그의 새까만 천과 비슷한 색으로, 실로 '두고 온 발'이 무엇인지 알 법했다. 피부 같은 건 종잇장 찢듯 갈라버릴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찌 저 얇고 작은 책을 흔들고 있는 걸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네. 다만, 그대가 오래 지냈다던 자령산 근처인 건 알겠더군."

"자령산……."

설마 그 산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다. 생각해 보면 항상 악몽 속에서 헤매던 곳도 자령산이었다. 여러 산턱보다 안쪽에 위치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커다란 봉우리가 하늘 높이 치솟은 산. 어릴 적의 난, 그 산을 마치 집처럼 여겼었다. 자령을 뼛속까지 잡아먹었던 곳도, 그의 묘비가 불탄 곳도. 속이 울렁이는 착각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 한 번의 심호흡으로 흔들리던 심기를 바로 잡는다. 이완처럼 눈치 빠른 놈에게 치부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발톱 사이에 끼다시피 한 책자를 받아 들자 사람보다 큰 새 발톱은 제 할일을 끝냈다는 듯 나타난 벽으로 슥 기어 들어가며 사라졌다. 집채만 한 발이 가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요령 좋게 사라지는 꼴이란.

"그러니까, 이 책은 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자를 가벼이 흔들었다. 받아 든 책자의 표지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그저 낡고 손때 묻은 흔적만이 남아 곧 튿어질 듯한 끈에 묶여있을 뿐. 이완은 책자에 대한 어떤 일언반구도 없이 은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물이지. 자네가 잘 아는 이의 것일세."

이완은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양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굴 천을 거듭 가리듯 소매 두 개를 겹쳐 올렸는데, 이는 이만 돌아가 보겠노라는 작별 인사였다. 입가 가까이 손을 겹쳐 올려 천천히 허리를 숙이는 몸짓. 어떤 예절과 유사하면서도 은근히 과장되고 한량 같은 몸짓인 그것은 이완의 특이한 인사 습관이었으며, 나는 그의 습관이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았음을 떠올렸다. 바닷속 물방울이 하나, 둘 피어오르듯 떠오르는 기억. …아니, 그럴 리가….

"여선. 나는, 진심으로 그대가 좋은 결과에 닿길 바라네. 자령의 유언대로 말일세."

"이완. 잠깐…, 네가 어떻게…."

"늙은 신수는 그만 빛이나 쬐러 가야겠네. 이만 잘 때가 되었어."

그는 처음 새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 그저 유희였다는 듯 순식간에 불로 화해 사라졌다. 그을음 하나 없이, 홧홧한 열기도 없이 공중의 불씨로 사라진 이의 흔적이란 손에 들린 이름 모를 책자 한 권이 전부였다. 이완, 그는 오랜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신수였다. 아마 지금 찾아가서 만년설의 빙정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절대 깨지 않으리라. 애당초 태양에 가장 가까운 신수이므로, 그의 둥지 가까이만 가도 눈이 멀고 몸이 타버리겠지. 고로 삼족오를 짐승 된 몸으로 쫓아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침상에 털썩 나앉으며 낡은 책자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책자에선 이름 모를 풀 향기와 비 내린 직후의 흙내음이 났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

"자령……."

이 책자는 자령의 것이었다. 과연 그가 무엇을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혹여 이완이 말한 '친우'라는 게 자령을 가리키는 걸까. 기억 속 자령은 신선놀음하듯 여유로이 자연을 거닐곤 했으니 그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지도 썩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느리게 쓰다듬던 책자의 표지를 한 장 넘기자 케케묵은 먼지가 도르륵 떨어졌다. 자령은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호령 도령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 놀음 일지를 남길 정도였으니 가능성 없진 않았다. 호기심 반, 반가움 반. 그리고 희미한 죄책감에 눌린 채 첫 번째 글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그 책자는 다름아닌….

'작은 짐승을 발견했다. 웬 동굴 안에서 숨죽여 울던 아이를.'

―…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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